제 243화
공항은 좁고 복잡하며 사람들이 많았다.
‘세상이 정말로 넓긴 넓어.’
중국 여행과는 다르다.
북경과는 달리 프랑스는 완전히 낯선 세상처럼 느껴졌다. 북경의 공항은 묘하게 한국의 대도시를 닮은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인종부터 달랐다. 서양에 왔더니 압도적으로 색목인이 많다. 진혁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냄새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느꼈다.
‘이 향은 익숙한데.’
오감이 민감한 그는 강렬한 땀 냄새나 체취와 뒤섞인 원래 냄새가 온갖 종류의 치즈 향과 대단히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치즈를 좋아하긴 좋아하나 봐.’
진혁 역시 치즈를 즐긴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치즈는 이렇게 진하고 곰팡내 나는 블루 치즈 쪽은 아니다. 그는 새삼스레 쿠프 드 몽드의 지난 우승팀 목록을 떠올렸다.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이탈리아. 독일과 체코.’
절반 이상을 프랑스 팀이 우승했으며 그 외에는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이 이겼다. 동양에서 출전한 이들은 대개 들러리 역할을 맡았다.
단순한 실력 부족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체계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개인 단위로 준비하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 팀은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유키코 씨가 이번 일본 팀도 실력이 좋다고 이야기했는데.’
도쿄 제과 학교에서 학생 때부터 솜씨가 좋기로 유명했던 동기가 이번에 팀을 짜서 출전한다고 들었다. 진혁은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현대 그 자체였다.
‘국경선 따위 없는 옛날이 좋았지.’
인천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받을 때도 복잡하고 분주했지만, 이곳은 더 하다. 시장바닥처럼 복닥거리는 곳에서 한 줌 주먹거리도 안 될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지나가려니 바빴다. 진혁은 암내 나는 사내들과 옷깃도 닿지 않게끔 피해 지나갔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스와 마리오는 인파 사이에서 휩쓸리며 뒤처져서 한참 뒤에서나 따라왔다.
“아얏!”
강마리오는 진혁을 따라가려고 발걸음을 서두르다가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밀쳤다. 꼭 닮은 검은색 캐리어 두 개가 부딪혀 바닥에 나뒹굴었다.
『죄송합니다!』
마리오가 미안해했으나 상대방 남자는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거 참, 앞 좀 보고 다니쇼!』
그는 바닥에 넘어져 있는 검은 캐리어를 주워들고 그대로 가 버렸다. 마리오 역시 자기 앞에 있던 캐리어를 챙겨 달려왔다.
“야! 임진혁! 기다려! 같이 가!”
병아리가 삐약거리는 것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진혁은 조금 더 기다려 주었다. 뒤늦게 합류한 마리오가 헉헉대는 사이 루이스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진혁이 너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
“그냥.”
진혁이 빙긋 웃었다.
터미널 바깥으로 나와 입국장 앞으로 오자, 랑비에 씨가 미리 보내준 기사가 “임진혁, 루이스, 마리오 강”이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울에서 오느라 고생하셨죠?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기사는 세 사람의 짐을 모두 트렁크에 옮겨 주었다.
자동차로 숙소까지는 40여 분가량 걸렸다. 진혁은 창밖에 보이는 평화로운 광경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신기하군.”
“아름답지? 유럽의 건축물들은 오래된 것들이 많아. 우리나라하고는 다르니까.”
“아니, 건물 말고. 풀과 나무가 완전히 달라. 정말로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다른데.”
“지금 이 속도로 달리는데 풀이랑 나무가 보인다고?”
“딱 봐도 다른데.”
도로 바깥에는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겪은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수십여 년, 때로는 백여 년이 지난 나무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 나무들은 저마다 생기를 뽐내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잎의 모양이나 열매의 형태가 새로웠다.
‘한국과 중국도 초목의 생태는 달라. 하지만 비슷한 씨앗들이 사람을 타고 옮겨와 다르게 적응해서 자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완전히 다른 곳이야.’
다른 냄새를 갖고 다른 자연을 즐기며 자라난 사람들.
그런 심사위원들을 상대해서 맛있는 빵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진혁은 새로운 도전을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그때하고 비슷해. 재밌겠는데.’
천하제일마의 이름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한때 무림맹에 혼자 잠입하여 정파의 거두들을 혼자 쳐죽인 적이 있다.
명백하게 불리한 상황이기에 더 흥미롭다. 진혁이 말없이 차창을 내다보자 시끄럽게 떠들던 강마리오도 입을 다물었다.
울창한 숲이 끝나고 도시에 들어선 지도 한참 지나, 자동차가 멈추었다.
“여기가 숙소입니다.”
“감사합니다.”
“짐 옮기는 걸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진혁이 깔끔하게 거절했다.
숙소는 유럽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좁고 긴 창문에 천장이 높으며 벽이 무시무시하게 두껍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엘리베이터 없이 높은 계단이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간다.
“이 건물은 백 년이나 된 건물이야. 대단하지?”
“멋지군. 프랑스 팀이 건축물 주제 나오면 고생 좀 하겠어. 기본적으로 창문이 높고 장식이 많아서 세세하게 데코레이션하기엔 손이 좀 가겠는데?”
진혁은 다른 형태의 건축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빵으로 만들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본 마리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넌 머릿속에 빵밖에 없냐? 머릿속에서 빵 좀 빼고 생각해 봐. 백 년 전에도 이 건물에 사람이 살았다고. 살아 숨 쉬는 역사란 말이야.”
진혁은 그다지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그는 건물 안에 있는 자그마한 생명들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바퀴벌레와 쥐가 많군. 백 년 전엔 더 많았겠지.”
“으악! 실제 같은 소리 하지 마. 끔찍해.”
마리오는 진저리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혁을 두고 앞서가고 싶다.
‘분명히 진혁이 짐이 우리 것보다 더 무거웠는데.’
임진혁은 30L 등산 배낭까지 짊어지고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고 있는데 날아가는 것처럼 속도가 빨랐다. 캐리어만 양손에 간신히 들고 낑낑대며 올라가는 강 씨 형제와 비교할만한 속도가 아니다.
‘진혁이 저놈은 도대체 왜 짐을 들어준다는 걸 거절한 거야? 여기에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마리오는 아직 반도 못 올라갔는데 벌써 진혁이 숙소에 도착했는지 집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쿵.
“쟤 벌써 도착한 거야?”
“체력 진짜 좋다…젊어서 그런가.”
“형, 나도 쟤랑 동갑이야.”
“젊다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루이스 형도 그렇게 차이가 안 나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강 씨 형제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진혁이 눈앞에 서 있었다.
“으악! 임진혁, 언제 내려왔어?!”
“짐 줘. 내가 들고 올라갈게.”
‘저 허약해 빠진 두 사람이 짐을 들고 올라오는 것보다 자신이 내려오는 게 더 빠르겠어. 저렇게까지 체력이 나쁜 줄 알았으면 그 기사님을 돌려보내지 않는 건데.’
진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루이스가 고마워하며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마리오 짐 좀 들어 줘.”
마리오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캐리어를 내밀었다.
“고마워!”
캐리어 손잡이를 받아 든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강마리오. 이거 네 캐리어가 아닌데?”
그는 공항의 수화물 수거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잠시 들어주었던 때의 무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과 같은 형태지만 무게가 달랐다.
“어? 내 거 맞아. 여기에 있는 공항 태그를 보면?!”
마리오가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진혁이 캐리어의 태그를 읽어주었다.
“미스터 리암 에이든…?!”
루이스가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아까 공항에서 부딪혔잖아. 그 사람하고 캐리어가 바뀐 것 같은데. 뭐 중요한 거라도 들어있어?”
“내 아디다스 윙즈 레인보우 에디션….”
동공이 확대되고 저절로 입이 벌려진다. 암천대원 선발시험에 탈락한 꼬마 살수 같은 표정으로 마리오가 말했다.
진혁이 이해하지 못하고 말했다.
“그게 뭔데?”
“쟤가 한정판 운동화를 모으거든.”
“캐리어에 운동화가 들어있다고?”
“내 행운의 운동화란 말이야! 그걸 전날 밤에 머리맡에 두고 자야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고!”
마리오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진혁이 어이가 없어 말했다.
“그럼 그때 나랑 승부한 대학 대회 나갈 때는 머리맡에 안 두고 자서 졌어?”
“동남향이 아니라 서북향으로 놓고 자서 그래. 이제는 방향도 알았으니까 절대 그런 실수를 안 한다고.”
“….”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단 말이야.’
생각해보면 무림인들 모두 각자 자기 나름대로 미신을 갖고 있다. 사람을 죽이고 나면 귀나 코를 잘라 기념품으로 목걸이를 꿰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악한이 있는가 하면, 전장에 나가는 무인의 무사를 기원하며 비단 손수건을 검대에 매어주는 처자도 있다. 물론 진혁은 그런 미신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짓 하는 동안에 차라리 수련을 한 시진 더 하지.’
그리고 그는 속마음을 숨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 하는 동안에 차라리 빵을 하나 더 굽지.”
“뭐라고?!”
마리오가 빼액 소리를 지르는데 루이스가 침착하게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기, 루델호프 항공사네. 우리도 여기 비행기 타고 왔으니까 항공사에 연락해보자.”
◈ ◈ ◈
항공사의 전화상담원은 아주 친절했다. 그녀는 상대방에게 연락해 주고 결과를 알려준다며 전화번호를 받아갔다. 세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식당은 고풍스럽고 오래된 건물의 1층이었다. 화려하거나 장식이 많거나 하지는 않지만 단순하고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흰 커튼, 그리고 재스민 향이 풍기는 음식점 내부에는 테이블이 많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여기 밥을 먹여 주려고 언제부터 예약했는지 알아? 한 달 전에 예약했다고. 그것도 전화를 스무 번이나 걸어서 간신히 한 거야.”
마리오가 잘난 척하며 말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고맙네.”
하지만 이번에는 속마음을 내뱉지 않았다.
‘빵 만드느라 바쁘다고 한 사이에 쓸데없이 이런 식당 예약 같은 걸 하고 있었군…. 오늘 저녁에 연습할 때에는 특별히 더 신경 써서 봐줘야겠는걸?’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좋아, 무사히 화해했어.’
“고마울 필요는 없어! 넌 이 구역에 무슨 식당이 있고 뭐가 맛있는지도 모르잖아. 내가 안내하는 대로 얌전히 따라다니기만 하면 돼.”
강마리오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지식을 뽐냈다.
‘진혁이 녀석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 봤자 해외여행 한 번 해본 촌놈이지. 아주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 눈이 돌아갈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