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2화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면서 웃어 보였다. 그 표정은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았다.
“남사스럽기는, 무슨. 원래 부모가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보면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란대.”
“이미 다 자란 애들 앞에서 민망하게 무슨 소리에요.”
아버지가 투덜거렸다. 부모님을 지켜보고 있던 진희가 긴장을 푼 듯 웃음을 보였다.
“엄마, 할머니도 엄마를 생각해서 아끼던 금팔찌를 녹이신 거잖아요. 어머니가 끼고 시집가시는 걸 보면서 행복해하셨을 거예요.”
“그래. 엄마가 금팔찌보다는 날 더 아꼈다는 증거니까.”
그런 반지를 고작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팔아 버렸던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이 치른 희생이 많구나. 부모님께 잘해드려야겠어.’
임진혁은 새삼스레 결심을 되새기며, 반지를 찾아온 흥신소장에게도 후하게 사례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청금석이나 흑요석, 비취나 호박 같은 걸 박은 반지를 갖고 싶었는데 그냥 민무늬 금이냐고 불평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뭐니.”
“그런 생각을 하셨었어요?!”
“철이 없었다니깐. 완전히 풋내기였단 말이야.”
“그래도 당신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거야.
아버지가 호언장담했다.
“호호호.”
남편이 장담하는 말에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던 어머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진혁아. 내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는데.”
“네? 실력 있는 제빵사가 있어요?”
“느이 아버지하고는 이미 이야기를 해 보았어. 진희도 동의를 했고.”
“그렇다면 설마….”
진혁이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봉이가 저 대신 가게를 봐주러 서울에 올라온대요?”
“그래. 네가 괜찮다고 하면 생각 있다더라. 대신 걔가 너희 가게 봐주는 동안에는 네 집에서 먹고 자고 해도 되지?”
“당연하지요. 저는 어차피 프랑스에서 대회 참석하고 있을 거니까 상관없어요. 일봉이가 손은 조금 느리지만, 솜씨는 쓸만하니까 보조만 한 명 더 되겠다.”
“…그건 네 기준이고. 일봉이는 객관적으로 봐도 손이 빠른 편이야.”
“그 정도에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일봉이도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라고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아버지와 진혁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던 진희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 쌍둥이 남매가 열정 페이를 주는 악덕 사장의 표본 같은 말을 하고 있어.”
진혁이 반론했다.
“내가 일봉이보다 일을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는다고.”
“일봉 매니저님은 진짜 열심히 한단 말이야. 네가 무식한 속도로 엄청나게 많이 하는 거지. 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돼.”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진혁이 너도 일을 더 줄여야 해.”
“젊어서 무리하면 나중에 고생한다, 너.”
아버지가 예전에 다쳤던 팔을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통증 때문에 안 좋아졌었으나 환골탈태 덕분에 이제는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팔이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만 언제 또 어떻게 잘못될지 모르니, 너도 무리해서는 안 돼.”
“알아서 잘 할게요.”
“알아서 하긴 뭘 잘 해, 그러다가 건강을 망치는 건 순식간이다. 아직 어리고 몸이 아파 본 적이 없으니까 몰라서 그래.”
대화는 점점 더 진혁이 원치 않는 흐름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저는 어리지도 않고 아파 본 적도 많습니다, 어머니.’
꼬마 살수로 일할 때도, 암천대의 대주로 활약할 때에도 수도 없이 부상을 입고 회복했다. 천하제일마가 되어 반로환동하여 환골탈태하기 전에는 온몸에 흉터가 있을 정도였다. 지금 하는 일은 정말로 전신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슬렁슬렁하고 있는데 이런 평가를 받을 때마다 당혹스럽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쉬지 않고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어머니가 걱정하고 계셔.”
진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은 빵집에서 열 시간, 연습실에서 여덟 시간인데.’
아예 가게를 그만두고 온 강 씨 형제를 쓸만한 인재로 키워내느라 연습실에서 어느 정도 머물러야 했다.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단련해온 가락이 있어서 일봉이보다는 훨씬 실력이 빨리 늘었다.
‘연습실에 오행진을 진작에 설치해두었어야 했어.’
삐죽삐죽 날카롭게 툴툴거리던 마리오는 드디어 완전히 진혁을 스승으로 인정하고,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래도 동갑내기라며 친구 취급을 하는 건 여전하지만 빵을 만들 때는 조언을 잘 듣는다. 루이스는 드디어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었다며 크게 기뻐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회 준비도 잘 하고 있고, 가게 매출도 좋아요. 저도 쉬어가면서 천천히 일하고 있구요.”
“아들이 열심히 일한다는데 기특하지 않은 어미가 어디에 있겠니? 다만 네가 너무 성실하니까 자칫하다가 무리해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하하, 저는 쓰러지지 않아요. 오븐이라면 모를까.”
“오븐이?”
“백정흠 회장님이 연습실에 설치해주신 오븐에 문제가 생겨서 애프터서비스를 요청한 적이 있어요.”
진혁이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아버지가 어린애처럼 킥킥 웃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비디오. 본인이 직접 왔구만?”
“네. 오븐을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많이 써서 혹사시킨 탓에 일시적으로 문제가 생긴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뭐?”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희 연습 주방에 최신식 모델을 기증했다고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더니. 정흠이 그 녀석, 결함이 있는 기계를 선물했던 거였어?”
“그런 건 아닙니다. 저희가 받은 건 프로토 타입 모델이었어요. 아직 발매하기도 전에 제일 좋은 거라고 일부러 골라서 주신 건데, 하드웨어 극한 테스트를 하기 전에 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연습 주방에서 교대로 오븐을 사용할 때 거의 24시간 내내 사용했거든요. 20시간 이상 연속 사용할 경우 오븐의 트레이에 균일하게 열이 퍼지지 않고 특정 부위에 집중된다는 걸 알게 되셨대요. 설계상의 문제를 개선해서 다음에는 그 점을 광고하며 출시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진희가 놀라워했다.
“24시간이라고? 팀원이 세 명밖에 안 되는데, 대체 누가 밤을 새워서 빵을 굽는 거야?”
‘내가.’
진혁은 자세한 것은 설명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일봉이가 와준다면 난 고맙지만, 그럼 아버지 가게는 어떻게 해요?”
“여름 동안에는 수업이 없으니까 내가 있을 수 있어.”
진희가 입술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진희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그래. 네가 보면 놀랄걸?”
“어느 정도나 늘었는데?”
“기다려봐, 내가 가져올게.”
그녀는 무릎 위에서 쓰다듬고 있던 고양이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냉장고에서 낯익은 케이크 상자를 꺼내왔다.
“이것 봐!”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진혁이 예전에 자주 많이 구웠던 치즈 케이크였다.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
케이크의 가운데에서 시작한 붉은색이 점차 은은하게 주홍색으로 물든다. 흠뻑 짙어진 진주홍 빛 물결은 지는 태양처럼 노랗게 흐려져 가다가 가장자리에서 희어져 모든 빛깔을 잃는다. 진혁이 전에 만들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컬러 레이어링이다.
“아주 예쁘게 만들었는데. 진희가 케이크 데코레이션을 하는 솜씨가 또 늘었구나.”
“장식도 중요하지만, 맛을 봐야죠.”
“먹어 봐! 먹어 보라고!”
진희가 케이크를 자르려고 빵칼을 꺼냈다. 진혁이 물었다.
“내가 잘라줄까?”
“어어? 그러든지.”
‘자르면서 빵의 텍스쳐를 살펴볼까.’
진혁은 삐죽삐죽하게 솟은 플라스틱 칼날에 미미한 강기를 실었다. 습관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앗차.’
케이크는 두부처럼 부드럽게 갈라졌다. 진혁은 접시나 식탁까지 갈라버리기 전, 완벽한 타이밍에 칼질을 멈추었다.
‘잘 구웠네.’
맛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임진희의 케이크 굽는 솜씨는 이미 일봉이와 비슷하다. 진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쌍둥이 남매를 바라보았다.
‘기특하네.’
병원을 그만두고 일봉이에게 제빵을 배우며 어머니 가게 일을 도운 지 꽤 되었다. 서울에 있어 진희가 어떻게 하는지 곁에서 내내 지켜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봉이가 드문드문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동안 열심히 했다고 들었다.
“잘 만들었네.”
“빵을 먹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가족 모두가 한 조각씩 맛볼 수 있게 네 조각을 잘라내어 접시에 얹었다. 크림 한 점 흘리는 일 없이 깔끔한 솜씨였다. 어머니가 웃으며 감탄했다.
“진혁이가 케이크 자르는 저거, 저렇게 자르는 건 아무리 해도 따라 할 수가 없더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께서 직접 끓여주신 콩나물국은 아무리 따라 해 봐도 그 손맛이 안 나더라구요.”
어머니가 기뻐하시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 오늘 저녁에도 끓여줄 테니까 기대해.”
미묘하게 감칠맛이 덜하게 매우면서 싱거운 콩나물국.
요리를 잘 못 하시는 어머니가 아들 몸을 신경 쓴다고 이것저것 넣어서 맛이 괴상해진 국이다.
그래도 진혁은 그 맛이 좋았다.
옆에서 임진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입술을 움직여 속닥거렸다.
“야! 너는 그거 맛있다고 하면 그냥 가면 됐지, 사흘 내내 그 국을 먹어야 하는 건 나야. 차라리 내가 끓이지!”
진혁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며 치즈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제일 먼저 혀에 닿은 것은 케이크의 겉면에 씌워진 글레이징이었다. 번들번들하니 윤기 나는 설탕 시럽의 달콤한 맛이 지난 후에는 폭신하고 보들보들한 치즈 무스가 무너지며 혀를 감싼다. 촉촉하고 농후한 치즈 크림이 그 뒤를 따른다. 다시 한 번 글레이징이 크림을 감싸며 맛보기가 끝난다. 군침이 흐를 정도로 달콤하고 풍미가 깊은 치즈 케이크는 유일봉이 만든 것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괜찮네.”
진혁의 짧은 평가에 진희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맛있지!”
덩어리짐 없이 골고루 퍼진 질감은 완벽하게 익힌 오믈렛보다도 더 부드럽다. 깔끔하고 얇게 발린 글레이징은 진혁이 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
‘반죽을 할 때 힘이 약간 부족한 것, 그리고 오븐에 굽는 시간만 약간 더 조절하면 내가 한 것과 거의 차이가 없겠는데.’
진혁은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런데 네가 남고 일봉이가 올라오면 곤란하지 않아?”
“응?”
“네가 추진하던 계획이 있잖아.”
진희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임진혁이 입을 벙긋거려 말했다.
‘야, 임진희. 너 서미란 씨와 유일봉이가 연애하도록 만들겠다며?’
“그건….”
진희가 머뭇거렸다. 어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너희 둘이서만 무슨 이야기 하니? 나도 좀 같이 들어보자.”
“별거 아니에요, 어머니.”
두 사람이 얼버무렸다. 진희가 진혁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내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줄게.’
◈ ◈ ◈
“인천 공항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군.”
프랑스의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한 진혁이 짧게 평했다.
“오랜만이다, 파리.”
마리오가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루이스 강이 그렇게 말하는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작 반 년만에 오면서 뭘 그렇게 폼을 잡아?”
“아, 형! 지금 방송할 거 찍고 있잖아. 분위기 좀 깨지 마.”
반년간 치열하게 준비한 끝에 드디어 쿠프 드 몽드에 참가하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진혁이 너는 시차 때문에 피곤하지는 않아?”
“괜찮아.”
1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지친 강 씨 형제 두 사람과 달리 임진혁은 쌩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