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1화
진혁이 피식 웃었다.
너밖에 친구가 없다고 진지하게 말하던 백진영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진영이 형, 축하해. 친구 후보가 여기 두 명이나 더 있네.’
“알아서 잘 해 봐.”
소개해주겠다는 말없이 틱 던지는데도 루이스 강이 씩씩하게 말했다.
“대회 끝나면 같이 술이나 먹자고 하지.”
“맞아. 백진영 바리스타님은 인상도 좋고 사람도 너그러워 보이니 누구처럼 틱틱대지 않겠지.”
진혁을 겨냥해 강마리오가 이야기하자, 진혁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인상은 좋지. 그래도 사람 보는 눈도 좀 그렇고, 눈치가 없어. 좀 둔한 편이라고나 할까?”
‘나를 보고 자꾸 상냥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질 않나. 택시 기사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모르고 잠만 자지 않나. 새끼고양이보다 위기감지능력이 떨어지지.’
임진혁이 냉정하게 평가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루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라면서 박하네.”
“진정한 친구는 친구의 장단점을 전부 포용하는 거야.”
“호, 그거 좋다. 진정한 친구.”
루이스와 진혁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들으며 마리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그럼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는 거야? 팀 메이트잖아.”
“어?”
딱히 강마리오가 자신의 친구인지 아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진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이스가 재치있게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연히 친구지.”
진혁이 미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어…어.”
오븐에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릴 시간이다. 진혁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자, 자. 오븐 확인하러 가자고.”
◈ ◈ ◈
한 달 만에 아버지를 만난 진혁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미간을 아주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진혁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아버지가 이유를 물었다.
“요즘 가게가 잘 안 되니?”
“아니요. 잘 됩니다.”
“그럼 대회 준비는?”
“어제 거북선 빵까지 구워 봤는데 나쁘지 않더군요.”
거북선은 한국의 예술과 전쟁을 둘 다 충족시키는 함선이라며 강마리오가 제안한 아이템이었다. 거북의 등껍질 모양을 내기 위해 홈을 패고 그 사이사이에 시럽을 집어넣었는데 생각만큼 모양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혁은 그 문제점을 해결할 아이디어가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희망에 가득 차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거북선이라니 대단하구나. 그럼 대회 쪽 문제는 아닐 테고. 혹시 요즘 여자라도 만나느라 고민이…?”
진혁이 고개를 저으며 아버지의 상상을 끊었다.
“그런 문제는 아니고요, 슬슬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네요.”
옆에 앉아 있던 진희가 웃었다.
“진혁이 네가 페이스트 쉐프를 다섯 명이나 깠다며?”
“까다니. 우리 가게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을 뿐이야.”
“이 사람은 손이 느리고 저 사람은 장식을 못 하고 이 사람은 인성이 나쁘고. 진영이 오빠가 다 얘기해줬어.”
그녀가 킥킥대면서 웃었다.
“빵 만들기도 전에 인성이 나쁘다고 쫓겨난 사람은 대체 뭐야? 지명수배자도 아니고.”
“사람 보면 알지, 어떤 놈인지. 아버지, 아버지도 아시죠?”
진혁이가 아버지를 끌어들이자, 식탁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
“어, 뭐. 사람을 많이 보다 보면 알긴 하지.”
서걱서걱 칼로 사과를 깎고 계시던 어머니가 접시 위에 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느이 아버지에게 물어보아도 소용없어. 네 아버지는 자기가 사람이 좋을 뿐이지 사람 보는 눈은 없어.”
“어머니, 참외는 제가 마저 깎을게요.”
“그래 줄래? 고맙다.”
조그만 과도는 손에 맞춘 것처럼 꼭 맞는다. 현대의 대량생산 기술은 과거의 장인이 만든 것보다 훨씬 우월해서 조금은 슬플 정도였다.
‘이런 칼이 백 자루만 있어도 암천대를 더 완벽하게 무장시킬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이다.’
고개를 휘휘 젓는 동안에도 손은 쉬지 않는다. 혹여나 진혁이 과일을 깎다가 손이라도 다칠까 하여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가 놀라며 말했다.
“언제 깎는 연습이라도 했니? 여보, 이것 좀 봐요.”
“참외 껍질을 무슨 종잇장처럼 얇게 깎아놓았구먼. 너 푸드 카빙은 언제 연습했어?”
푸드 카빙(Food carving)은 수박이나 호박, 참외나 사과 등 먹을 수 있는 과일 등을 주재료로 해서 다양한 모양으로 깎아내는 기술을 말한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틈틈이 했어요.”
“역시 우리 아들이야.”
어머니가 기특해하며 진혁이를 바라보았다. 진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면접 보러 온 사람 보고 인성 나쁘다고 쫓아내는 아들이랍니다, 어머니.”
“진혁이가 알아서 잘 했겠지.”
어머니가 진혁이를 옹호하자 진희가 발끈했다.
“저도 그 사람 사진이랑 이력 봤는데 멀쩡했다구요.”
“이력서만 보고서는 모르지. 실제로 사람을 보면 또 다르니까.”
아버지가 말하자 진희가 풀 죽어 말했다.
“그건 그렇죠. 저 전에 일하던 때에도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맞아. 엄마가 전에 파출부로 일하던 때에도 그 집 아들이 완전히 썩었더라니까. 얼굴은 성한 애가 어쩜 그리 심보가 못되어 먹었는지!”
진혁이 깎은 참외를 한 조각 집어 먹으며 물었다.
“무슨 짓을 했는데요?”
‘혹시 어머니를 괴롭히거나 했으면 가만 안 둬야지.’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제사가 있어서 준비를 해 놓으면, 제일 맛있는 것만 골라서 홀랑 집어먹질 뭐야. 명문대를 가면 뭘 해.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인데.”
“…그것참 소박하네요.”
“제일 예쁜 전만 골라서 모아 뒀는데 귀신같이 그걸 눈치채서 쏙 빼먹는 게 얼마나 얄밉던지.”
툴툴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진혁이 웃었다.
“아 참, 어머니. 선물이 있어요.”
“응?”
진혁은 붉은색 공단 주머니를 꺼냈다.
“뭔데, 뭔데?”
임진희가 진호를 안고서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리 아들이 엄마를 위해 사 온 거야? 이 모양을 보니 반지인가?”
공단 주머니를 받아든 어머니가 반색하며 웃었다. 옅은 주름이 진 눈가가 깊이 휘며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아버지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진혁이 재촉했다.
“어머니, 열어보세요.”
주머니를 단단히 감고 있는 금빛 매듭을 풀어내자 안에서 두툼한 금가락지가 굴러 나왔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금반지를 본 가족들이 깜짝 놀라 저마다 외쳤다.
“이 반지가 어디서 났니?!”
“진혁이 네가 어떻게 이걸 구해왔어?”
“이거 엄마가 계속 끼고 다니던 반지잖아요? 언젠가부터 안 보였던….”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집어 들어 손가락에 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반지를 놓쳐 식탁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반지를 주워서 어머니의 왼손 엄지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러고 보니 진혁이가 저번에 물어보긴 했어. 이 반지를 어느 전당포에 맡겼었냐고.”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내가 가서 물어봤을 때는 이미 팔아버린 지 오래돼서 찾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찾아왔니?”
“아는 사람 중에 심부름 업체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분한테 부탁했어요.”
“아이구, 내가 진작에 부탁할 걸 그랬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가 손을 뻗었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 주는 손길은 다정하고 따스했다. 한가로운 봄날, 창문을 통해 햇볕이 내리쬐어 가족들을 비춘다. 어머니는 눈앞에 반지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지 이미 낀 금가락지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시집올 때 즈음에는 이렇게 무늬를 큼지막하게 세공하는 게 유행했어.”
“그래요.”
“하지만 둘 다 돈이 없어서 시집올 때 그런 건 엄두를 못 냈지. 그걸 마음에 걸려 하셨던지, 친정어머니께서 금팔찌를 녹여서 반지로 만들어 주셨어.”
어머니는 옛 추억을 회상하며 눈물을 마저 닦았다.
“그 팔찌는 느이 할머니한테 정말로 소중한 물건이었거든. 내가 어렸을 적에 손도 못 대게 했어. 자개 반닫이장 서랍 안쪽에 깊숙이 넣어놔서 만져보지도 못했어. 경사가 있을 때마다 꺼내서 소중하게 닦고서는 끼지도 않고 도로 서랍에 넣으셨어. 아까우셨던 게야.”
“그리고 옛날에는 그런 금붙이를 함부로 끼고 다니질 않았지, 요즘이랑 다르니까.”
“맞아요, 여보. 그런 걸 끼고 다니면 도둑 꼬인다고 하심서 절대 문밖엘 내놓으실 않으셨어. 내가 어머니가 그 반지 끼신 것을 꼭 세 번밖에 못 봤는데, 큰언니 결혼식이랑 둘째 언니 결혼식, 그리고 셋째 언니 결혼식이야.”
진희가 물었다.
“어머니 결혼식 때에는 안 끼고 오셨어요?”
“맞아. 그날 사진을 보면 안 끼고 오셨어. 이미 그때 마음을 정하신 게지.”
그녀는 앨범을 꺼내와 빛바랜 흑백 결혼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미 얼굴조차 남아 있지 않아 흐려진 옛 사진 속에서는 이미 돌아가신 친척 어른들이 굳어진 표정을 지은 채 박제되어 남아있었다.
진혁과 진희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에, 둘은 실제로 외할머니를 뵌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래된 사진만 몇 장 보았을 뿐이다.
사진 속의 외할머니는 흐린 회색 한복을 입고서 딱딱하게 굳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혁이 중얼거렸다.
“큰이모랑 똑같이 닮으셨어요.”
“첫째 처형이 나이 드시면서 점차 장모님을 닮아가고 있어. 나도 가끔 뵐 때마다 장모님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라.”
진희가 미소지으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가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큰언니를 만난다고 예전에 어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 팔찌는 당연히 큰언니가 물려받은 줄 알았어.”
“그럼 언제 아셨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큰언니가 얘기해 주었어. 내 결혼하면서 반지 하나 없다고 속상해하는 걸 들으신 어머니가, 팔찌를 따로 금방에 맡겨 녹여서 반지로 세공을 해 주었대.”
“큰이모가 말을 안 해준 거예요?”
“당연히 자기가 팔찌를 물려받을 줄 알았던 큰언니가 화가 나서 일부러 나한테 말을 안 했대. 내가 나이 터울 많이 나는 장씨 집안 막내딸이라 혼자서만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같아 질투가 났다고.”
“아이고.”
“실은 내가 결혼식을 할 때 눈치를 챘어야 했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고맙다고 얘기를 해야 했는데 말이야. 그때는 나도 스물너덧 살밖에 되지를 않았으니 철이 없어서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그 반지를 해주셨는지, 귀한 줄을 전혀 몰랐지 뭐니. 엄마가 어디서 돈이 생겨서 갑자기 이렇게 몸값 비싸고 묵직한 놈을 데려왔는지 생각도 안 했지 뭐야.”
오래된 고백은 한숨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어쩌면 그냥 새 반지가 좋아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어. 엄마가 무슨 돈이 있어 갑자기 그런 걸 해줬는지 알고 싶지 않았던 거야.”
‘이 고백은 우리가 아니라 외할머니가 들으셔야 했는데.’
진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손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장모님은 하늘나라에서 다 보고 계실 거야.”
“여보.”
“응?”
“애들이 보고 있어요. 남사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