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9화
“그냥요.”
“소용없다, 이놈아.”
“뭐가요?!”
굴뚝을 높이 세운 새 공장 건물이 보였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아버지는 주차장 쪽으로 커브를 돌면서 아들에게 대답했다.
“돈 생기자마자 아버지가 다 알아봤지. 이미 옛 저녁에 팔아치워 버리고 없더라. 그게 언젠데 거기서 아직도 갖고 있겠니?”
진혁이 기억을 더듬으며 물었다.
“큼지막한 세공이 되어 있는 금가락지였죠? 원앙 한 쌍이 커다랗게 돋을새김 되어 있는 거잖아요.”
“그래. 24k에 무게도 묵직하고 세공도 좋아서 값을 꽤 받았다고 들었지.”
“아버지, 제가 제대로 한 번 찾아볼게요.”
“알았다.”
멀리서부터 민병철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안경을 쓴 그는 두 팔을 휘저으며 뛰어왔다. 핸드폰 판매점 앞에 서 있는 기다란 모형 인간 풍선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휘적거렸다. 진혁은 그런 민병철을 보며 생각했다.
‘완전히 문사(文士)구만. 전에는 이보다는 체력이 좋았던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순식간에 원기가 상했지?’
가까이 다가온 민병철이 두 사람을 반기며 웃었다.
“자, 자. 먼지가 날리니까 일단 사무실로 들어오세요. 아니면 공장부터 보는 편이 좋을까?”
체력은 좀 떨어진 것 같지만 눈빛은 생생하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준 은인을 보는 눈길에 진혁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아, 응.”
일월신교 교인이 아닌 자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공경하며 우러러 떠받드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분명히 이전부터 말을 놓기로 했고, 진혁이 연하라서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이 태도는 말만 놓을 뿐이지 지극히 공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색해진 진혁이 뻘쭘해 하며 입을 다물자 아버지가 앞으로 나섰다.
“그린 워터 팜(Green Water Farm)부터 보자. 진혁이는 아직 거길 못 봤잖아?”
“아! 그럼 거기부터 갈까.”
아쿠아포닉스 농장을 둘러보며 진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언뜻 보기에도 3, 4미터는 되어 보이는 투명한 천장은 한참 높았다. 그 천장에서는 태양광이 그대로 내리쬐어 빼곡히 피어있는 녹색 잎채소들을 덥힌다.
이 천장 높은 온실 안에 자라고 있는 식물들은 밭고랑 사이에 자라고 있지 않았다. 투명하고 깨끗한 물속에 뿌리를 뻗었다. 촘촘한 뿌리 사이에는 은빛 비늘을 자랑하는 잉어들이 분홍빛 입을 뻐끔거리며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황제가 기르는 잉어보다도 더 행복하고 부유해 보인다.
“여기 물은 정말로 살아있는데?”
물고기의 배설물이 가라앉아 식물의 뿌리로 흡수되고, 그 식물은 새로이 이파리를 뻗는다. 올 때 보았던 논밭처럼 제초제나 해충 약 따위를 쓰지 않아 풀도 물고기도 모두 생생하고 생기가 흘러넘친다.
진혁이 흐뭇해하며 말했다.
“저기에 있는 저건 취나물이지?”
“응. 이쪽은 국산 나물들을 중심으로 기르고 있어. 왜, 새로운 메뉴라도 떠올랐어?”
“사실은 지금 준비하는 대회 메뉴 때문에 필요해서 나물만 좀 따로 좀 사고 싶은데.”
“사긴 뭘 사! 마음껏 가져가. 내가 따로 말해놓을게.”
민병철이 단호하게 말했다.
“얼마나 필요한지 말만 해. 내가 다 챙겨준다.”
“알았어요, 형. 고마워.”
빵 공장은 조금 전의 온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입구에 들어가기 전 병철이 장갑과 마스크 등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자, 여기서 이거 쓰고 들어가야 해. 임 아저씨, 여기 있습니다.”
“그래, 고맙네.”
아버지는 마스크와 장갑을 낀 후 조리모처럼 생긴 모자를 썼다. 진혁 역시 따라 했다.
“반죽에 머리카락이나 먼지 같은 게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렇게 하는 건가?”
“응, 여기 소독기 통과해서 가면 돼.”
작업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남자들 역시 소독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오른쪽엔 파이프 오르간처럼 길쭉한 은빛 기둥이 줄줄이 서 있고, 왼쪽에서는 거대한 기계 원통이 상하로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호오.”
진혁은 가운데에 있는 기계를 보았다. 거대한 쇠로 된 주걱이 모터 소리를 내며 윙윙 돌자 희멀건 한 반죽이 점차 점성을 가지며 끈적해진다. 그들은 잠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로 반죽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성인 세 명보다도 거대한 부피의 반죽이 천천히 반죽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자 직원 한 명이 잠시 기계를 중단시켰다. 일행과 마찬가지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운을 입은 남자였는데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거대한 온도계로 반죽을 찌르더니 흡족해하며 숫자를 읽었다.
“화씨 265도. 좋습니다. 진행하세요.”
“진행 오케이!”
“진행합니다!”
맞은편에 서 있던 다른 직원들이 복창했다.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던 그 남자가 내려와서 다시 버튼을 눌렀다. 기계는 반죽 덩어리를 강철 캐리어와 함께 통째로 회전시켜 아래쪽에 있는 또 다른 기계로 옮겼다.
‘자동화가 이루어졌어도 중간중간 사람이 온도를 체크하는구나.’
진혁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사람 손이 더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민병철이 웃으며 말했다.
“자동 기계 시스템이 온도를 체크하긴 하는데, 저만한 분량의 반죽이 발효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못쓰니까. 사람이 한 번씩 더 체크하는 게 안전해.”
“그렇군.”
진혁은 힐끗 뒤쪽을 돌아보았다. 쌓여있는 밀가루 포대의 양만 해도 엄청나다. 일반 소매점과는 단위부터 다르다. 인부 두 명이 거대한 밀가루 포대를 다섯 개 실어놓은 카트를 밀다가 일행을 보고 멈추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십시오.”
민병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일하는 이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찬 것을 보고 진혁은 이전에 공장을 오픈하기 전에 미리 깔아두었던 오행진을 떠올렸다.
‘깔아둔 지 3개월이 지난 오행진은 단순히 주변의 물품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야.’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정도의 효과를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부가적인 효능이 있다.
‘직장에서 사람들이 서로 배려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도 있나 보군?’
임진혁의 가게에는 진상 손님이 없다. 가게 안에 들어온 이들은 불쾌함과 짜증을 잠시나마 잊고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며 상쾌함에 젖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직장 내에서 서로 배려하며 유쾌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잘 되어있군.’
진혁은 기계들을 돌아보며 기계들이 들어오기 전에 새겨둔 바닥의 오행진들이 잘 있는지를 확인했다.
공장 시찰이 끝나고 사무실로 이동하자 민병철이 서류를 내밀었다.
“임운정 아저씨부터 받으세요. 진혁이 너도 이번엔 거절하지 못할걸?”
임운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초반부터 투자자들에게 무리하게 이익금을 분배할 필요는 없잖아.”
“무리한 이익금 분배가 아닙니다. 지금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데요. 어제부로 샌드위치 프랜차이즈 집만 전국적으로 300개 정도가 생겼어요. 더 늘어날 겁니다.”
“대단한데!”
“그런데 진혁아. <해와 달> 본점에는 그린워터 샌드위치를 들이지 않을 거야?”
“우리 가게는 프리미엄 디저트 카페를 지향하고 있으니까, 샌드위치도 바로바로 만들어서 소량만 팔고 있어.”
“그린워터 샌드위치도 프리미엄급인데.”
진혁이 피식 웃으며 민병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마 그 얘기를 하자고 여기까지 부른 건 아닐 테고. 정말 하려는 이야기가 뭔데?“”
“공장도 보고, 농장도 보고 가라는 이야기였지.”
“그것만은 아닐 거 아냐.”
“새 샌드위치 개발은 다음 주까지 가능해?”
“이미 해서 가져왔어.”
진혁이 아까부터 들고 있었던 바인더를 꺼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샌드위치 레시피를 본 민병철이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바쁘다더니….”
“봄 한정 재료를 사용한 쑥과 달걀, 베이컨 샌드위치.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그릴드 햄 샌드위치.”
진혁이 하나씩 하나씩 레시피를 짚어 주자 옆에서 아버지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이 재료들은 미리 병철이가 골라준 거 아냐?”
“요즘 덜 팔리는 채소들이요.”
“고마워, 정말로 고맙다. 레시피 비용은 계좌로 따로 입금할게.“
임진혁은 팔짱을 끼며 민병철의 두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개처럼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점이 신경 쓰였다.
“그거 말고 또 할 말 있잖아. 그래서 진짜로 왜 불렀는데?”
민병철이 입술을 깨물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네가 전에 산 공장 지분을 거래하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
“진혁이가 지분을 매입했다고? 아니, 막 자기 사업을 시작한 애가 무슨 돈이 있다고 투자를 해.”
처음 듣는 소리에 임운정이 눈을 크게 떴다. 진혁이 웃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때 밀 키트 사업 때문에 잠깐 들어온 돈이 있었습니다. 그때 환율도 좋았잖아요.”
당시 달러 시세가 널뛰던 시점인데, 진혁이 돈을 받았을 때는 달러로 돈을 받는 게 훨씬 유리했다. 진혁이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 채 민병철을 바라보았다.
“아, 임운정 아저씨도 아시는 줄 알고….”
민병철이 두 손을 모으며 미안해했다.
“아버지, 제가 돈을 빌려준 게 아니고 회사 지분을 산 겁니다. 좋은 투자처니까요.”
진혁이 킥킥 웃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지분 팔 생각 없는데, 오히려 형이 판다고 하면 더 살 생각은 있어.”
“에이, 난 괜찮아.”
“그럼 됐어.”
“알았어. 대회에 필요한 채소들은 목록 정리해서 보내, 정기적으로 필요한 만큼 다~아 충분하게 공급해 줄 테니까.”
“알았어.”
돌아오는 길, 진혁은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아버지는 운전석에 앉으며 아들을 바라보고 킬킬대며 웃었다.
차를 운전해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물었다.
“그 지분 산다는 사람, 다른 사람이 아닌 것 같았지?”
“형이 제 지분까지 갖고 싶었나 보네요.”
“네가 지분을 얼마나 갖고 있는데?”
일부 투자를 하기는 했지만 ‘그린워터 샌드위치 팩토리’의 자세한 상황은 모르는 아버지가 물었다. 진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51%요.”
“…팔라고 하고 싶어 할 만하긴 하구나.”
“그럼 팔까요?”
운전하던 아버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갖고 있어라. 그린워터 샌드위치 팩토리는 한창 잘 나가고 있잖니. 공장 시스템도 아주 괜찮고, 사람의 눈으로 항상 체크하고 있으니 안전하고.”
“기계가 빵을 만드는 광경을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긴 하더라구요.”
“난 네가 신기하다, 이놈아.”
“예?”
아버지가 자동차 전면의 유리창 너머 보이는 도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기특하고 능력 있는 아들을 낳았는지, 이제 일은 그만두고 놀아도 될 것 같구나.”
“그러셔도 되는데요.”
“예끼! 사지 멀쩡한 아비가 아직 핏덩이처럼 어린 아들한테 부양받으면서 살 일이 있니?”
“핏덩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보면 너는 말이야, 아직 핏덩이만도 못한 어린애야.”
“….”
“지금도 분홍색에 쪼글쪼글하고 조그마해서 원숭이처럼 생겼던 너를 생생히 기억한단다. 간호사가 아들이라고 안아보라며 건네주는데 받아들기가 무서웠어. 너무 조그맣고 약해 보여서 말이지.”
“네.”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커 주었으니 아버지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
“느이 어머니 반지에도 신경 쓸 필요 없어. 대회니 일이니 뭐니 바쁜데 괜한 데에 기운 쓰지 말고 네 일에만 집중하렴. 네가 행복한 게 네 어미와 내 행복이란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자동차가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진혁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못생긴 금가락지 꼭 찾아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