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7화
정지숙과 랑비에가 자리를 떠난 후, 뒤늦게 마리가 돌아왔다. 전장에서 승전하고 귀환하는 장수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오늘 왔다던 손님들도 별거 없지? 나나 루이스 형보다 미각이 더 예민한 일반인이 있을 리가 없다고.”
문을 벌컥 여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목소리에 루이스가 이마를 짚었다.
“…… 동생아. 철 좀 들어라, 좀.”
“어?”
“넌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 임진혁이만큼 하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절반이라도 좀 따라와 봐.”
“어어어어?”
마리가 양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가득 담겨있던 감자 칩과 비스킷, 초콜릿 따위의 간식거리가 굴러 나왔다.
“설마 진짜로 그 일반인 두 사람이 나하고 형보다 더 맛 구별을 잘해?!”
“두 사람은 아니고, 한 사람. 반죽을 한두 번 메친 차이를 귀신같이 구별하더라.”
“어떻게 그렇게 하지?!”
“나도 모르지.”
마리는 풀이 죽어 과자를 다시 주워 모았다. 임진혁은 감자 칩을 봉투에 넣어주며 말했다.
“이건 또 뭐야?”
“일하느라 힘드니까 같이 먹자고 사 왔지.”
루이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멍청아, 맨날 이런 인스턴트 식품만 먹으니까 미각이 둔해지지.”
“무슨 소리야! 형도 여기 감자 칩 좋아하잖아.”
“됐어. 난 이제 그런 거 끊으련다.”
“내가 담배를 어떻게 끊었는데! 지금 이것도 끊으라고?!”
마리는 감자 칩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인 것처럼 소중하게 꼭 껴안았다.
“난 그렇겐 못 해!”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럼 하지 마.”
◈ ◈ ◈
단합을 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식사는 다 같이 한다. 주로 연습실 내부에서 직접 만든 빵을 먹는다. 끼니 외적으로 내내 빵을 먹다 보니 합숙 한 달이 지난 지금, 슬슬 빵이 질릴 만도 하다. 루이스와 마리는 뱃살이 조금 늘었지만, 진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진혁이는 살이 찌지도 않네.”
루이스가 크루아상을 뜯으며 말했다.
“너 혼자 몰래 뭐 하는 거 있지? 좋은 건 다 같이 나누자.”
생크림을 바른 크루아상을 입에 넣으며 마리가 웅얼거렸다. 진혁과 마리는 동갑이고 루이스가 제일 나이가 많다. 진혁이 우유를 따르며 말했다.
“지금 네가 뭘 먹고 있는지를 봐.”
임진혁은 바게트를 우유에 찍어 먹으면서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지방이 풍부한 생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힌 마리가 흥분해 말했다.
“생크림 크루아상이 어디가 어때서?! 딸기를 얹으려다가 안 얹은 거라고.”
“나도 살이 덜 찌는 체질인데 진혁이 너에 비하면 정말…….”
루이스가 한숨을 쉬었다. 합숙하면서 매일 만드는 빵의 양도 만만치 않기에 그나마 이 정도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임진혁처럼 완벽한 근육질 몸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이러다가 실전 때 체력 떨어지면 안 되는데.”
루이스가 걱정하자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어.”
자신이 만든 실험용 빵을 꾸준히 먹고 있으니 대회에 나갈 때쯤에는 저절로 체력이 붙을 것이다.
식탁 위 접시에 놓인 바게트를 맛보는 마리의 표정이 변했다. 아까부터 기분이 저조했는지 마리는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불안한 표정이었다.
“이거 진짜 딱딱하네. 무슨 돌 같기도 하고.”
“제대로 만든 프랑스식 바게트는 원래 그렇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빵칼로 썰어내는 빵조각 모양이 만족스럽지 않자, 진혁이 빵칼을 들고서 다른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잘라 주지.”
“이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마리가 초조해하며 언성을 높이자 루이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호의를 보이는데 왜 그 모양이냐? 넌.”
“형은…….”
“줘 봐. 내가 잘라줄게.”
루이스가 손을 뻗는데 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은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 한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왼손에 바게트를 잡은 채로 그대로 박차서 나가 버렸다.
루이스가 입을 열며 따라 나가려고 하는데, 진혁이 그런 루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혼자 있게 두지.”
“아, 응.”
루이스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동생 놈이 아직 많이 모자라서 미안하네.”
“그럴 수도 있지.”
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다.
“저 녀석이 뭔가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별로 없어. 또래 중에서 자기보다 빵을 잘 만드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네 빵이 제대로 단단해진 걸 보고 자기도 많이 놀랐고 부러운가 봐.”
“파리에서 제대로 빵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왔다며? 거기서는 정통 바게트 만드는 방법도 안 가르쳐 줬대?”
“그래서 네가 지금 제대로 된 빵을 만들고 있으니까 부러운 모양이야.”
진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흐음.”
◈ ◈ ◈
뛰쳐나간 강마리오는 멀리 있지 않았다.
“…… 아무도 날 붙잡으러 오지 않는 거야?”
연습실의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최근에는 형이 끼니 내내 식빵과 뺑 오 쇼콜라, 바게트만 먹는다. 둔한 미각을 예민하게 한다면서 비슷한 걸 계속 먹어대는데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 부분이 신경 쓰여서 큰맘 먹고 특별히 주머니를 털었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가기 전에, 형이 맛있게 먹던 과자들만 골라서 사 왔다.
‘형은 이 브랜드의 오리지날 감자 칩만 좋아하니까, 일부러 다른 가게까지 갔다 왔는데.’
봄 한정 신메뉴 과자들이 늘어나서 그런지 작은 마트에서는 팔지 않는 칩도 많았다. 그래서 일부러 큰 마트까지 걸어가서 어렵게 물어물어 찾았다. 과자를 사 온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그래서였다.
‘형은 나만 싫어해.’
원래는 대학 대회 따위에는 나갈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형이 나가라고 했고, 또 무슨 회사에서 오븐을 준다고 넌지시 이야기해서 억지로 나갔다. 그렇게 나간 다음에 바로 탈락하는 망신을 겪었고, 분해서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형이 ‘재킷을 강탈했다가 도로 돌려준 이상한 놈’에게 완전히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루이스 형은 언제나 우러러봐야 할 멋진 사람이었다. 같이 프랑스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어를 훨씬 빨리 익혀서 마리에게 가르쳐 준 것도 형이었고, 제빵사의 도제로 들어가 빵 만들기를 먼저 배우기 시작한 것도 형이었다. 형이 구워오는 신선하고 향긋한 빵 냄새에 홀려서 마리 역시 어린 나이에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맞벌이하러 나가서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여름날의 밤.
슈퍼마켓에서 사 온 밀가루랑 다른 재료들을 이것저것 반죽해서 쿠키라도 굽고 있으면 제빵사의 도제로 일하고 있는 형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했다.
처음에는 먹지 못할 정도의 쿠키였지만 점차 연습을 거듭해나가면서 쿠키나 케이크, 롤케이크나 빵 등이 점점 더 먹을만한 수준이 되었다. 반복적인 연습 끝에 꽤 맛있는 빵을 구울 수 있게 되었을 무렵, 형의 스승이 소개한 집 근처의 빵집에서 인턴십을 하게 되었다.
인턴십을 마치고서 그날그날 만든 빵을 하나둘씩 찍어 올렸는데, 의외로 반응이 꽤 좋았다.
유튜브에서 이름을 꽤나 알리게 되면서 어머니의 사정상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가면서는 팬클럽도 생기고, 대학 생활도 즐거웠다.
임진혁이라는 폭탄을 만날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금연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강마리오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손에 쥔 바게트를 내려다보았다. 임진혁이 어제 구워낸 빵은 여전히 벽돌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아까와 다른 점이 있었다.
분명히 빵칼을 들고 있는 손과 내뻗던 손이 다른 손이었는데, 잘려있지 않던 빵이 반쯤 갈라져 있다.
‘진혁이 녀석, 도대체 이걸 언제 자른 거야?’
마리오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종일 좁은 연습실에서 이것저것 빵을 만들다가 오랜만에 외출했더니 피곤하다. 그는 지금이라도 연습실 안으로 돌아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그를 데리러 나오지 않았다.
쪽팔리고 민망하다.
‘배고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하루 묵어 숙성된 빵 특유의 그윽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솔솔 풍겨 나왔다. 강마리오는 바게트를 찢어내어 입에 물었다.
“……!”
그건 실수였다.
조금 전까지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리고 있던 얼굴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얼굴에 짜증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부드럽게 주욱 찢어지는 빵의 속 살결은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봄날 뛰노는 아기곰처럼 사랑스러우며 여름날 첫 소풍의 추억처럼 달콤하다.
마리오의 얼굴이 누그러진 것처럼 환히 펴졌다가 다시 찡그려졌다.
‘이거, 그 녀석이 만든 빵이지.’
하지만 너무나 맛있다.
갓 구운 빵도 맛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보통 가정에서 먹는 것과 똑같이 하루 더 숙성해낸 빵은 차원이 달랐다.
‘진혁이가 이전에 만든 빵보다 더 맛있어.’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바게트는 ‘맛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설탕이나 유지, 버터 따위를 넣지 않고 밀가루와 소금, 물과 이스트 등 기본적인 재료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빵에는 절대로 ‘맛없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탑에 갇힌 공주님 같은 맛이야.’
벽돌처럼 딴딴한 바게트 껍질이 지켜주고 있기에, 내부에서 기포를 잔뜩 숨긴 희디흰 속살은 한없이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렇게 한 거지?’
의문점이 거품처럼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금방 사라지고 다시 빵을 뜯었다. 초콜릿이나 설탕 따위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데도 빵 자체의 속살에서 은은하게 단맛이 느껴진다.
버터나 달걀로는 이런 맛을 낼 수가 없다.
‘재료가 한정되어 있는 이상 바게트를 더 맛있게 만들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임진혁이 바게트를 맡은 이유가 그거였다. 형이 뺑 오 쇼콜라를, 그리고 자신이 크루아상을 맡았다. 한없이 부끄럽다.
임진혁이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방을 만드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전의 패배에서 크게 반성해서 파리에서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노력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막 피우려고 꺼내 들었던 담배를 부러뜨리며 그는 다시 빵 껍질을 뜯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는 금방 잊어버렸다.
순식간에 빵을 다 먹어버린 다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습실로 돌아왔다.
루이스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데 임진혁이 웃으며 먼저 물었다.
“먹을 만했어?”
“으으음.”
“음이 뭐야? 뭔가 평을 해 봐.”
“정말 빵 본연의 맛을 끌어내는 맛이었어. 분하지만 대단하다.”
마리오가 진혁이 구운 다른 바게트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문득 손을 멈추며 말했다.
“잠깐. 이 바게트가 아까 낮에 그 고객님이 맛을 구분해냈다는 그 빵이야?”
“맞아.”
“그럼 나, 이거 먹어볼래.”
강마리오는 이번에는 진혁이 잘라 주는 빵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빵조각을 입에 물더니 말했다.
“진짜 모르겠는데. 뭘 다르게 한 건데?”
루이스는 킥킥 웃기만 하고 대답해주지 않았다. 임진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밀가루와 같은 레시피로 만든다고 해도 반죽에 가하는 힘과 습도 같은 주변 조건들은 계속 달라지잖아.”
“지금 습도를 다르게 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오! 나 맞춘 거지?!”
신나서 방방 뛰는 강마리오를 바라보며 진혁은 혼자 생각했다.
‘다혈질이고 단순한 녀석. 놀리니까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