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5화
아이들을 인솔해서 서울까지 왔다는 중학교 선생님은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임진혁 사장님이시죠? 한명희입니다. 진희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도을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이며 태연하게 서 있자 그녀가 순식간에 돌변해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도을이 너는 이리 와.”
백진영은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이리 와, 라는 말인데 엄청 혼내는 것처럼 들리네.’
아이를 무사히 데려다준 두 사람은 천천히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까 그 선생님, 진희 씨하고 동갑이라더니 나이 들어 보이더라.”
“원래 애들 돌보다 보면 빨리 늙는 법이야.”
말단으로 굴러다니다가 갑자기 감투를 써서 대주 자리가 되어 애들을 통솔하면서부터 원형탈모가 생겨서 괴로워하던 혈도객을 떠올리며 진혁이 담담히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 하여튼 너랑 진희 씨 보고 있으면 소망시는 참 살기 좋아 보여.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니.”
“그 정도는 아니야.”
진희는 중학교 교사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 교사는 마침 김도을이 서울에 가면 꼭 빵집을 찾아갈 거라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라, 저것 봐.”
아까 식사했던 이탈리아식 가정요릿집을 지나치며 백진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 집 간판,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게. 간판이 찌그러졌네.”
진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린 손님이 철없는 소리 좀 한다고 화내는 가게에 어울리네.”
백진영이 근방의 뉴스 속보를 확인하며 말했다.
“우리가 그 숙소 안에 있는 사이에 강풍이 들었나 봐. 우리 가게까지 미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게 문에는 간판 수리를 하는 동안 임시 영업 중단을 알리는 공지가 나붙어 있었다. 볼펜으로 흘려 쓴 글씨가 가게 주인이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는지 알려주는 듯싶다.
“그래, 우리 가게에는 오지 않아서 다행이네.”
임진혁이 태연하게 맞장구를 쳤다.
◈ ◈ ◈
[블로그 포스트]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우승했지만, 디저트 킹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 임진혁, 그가 새로운 성공의 신화를 쓰고 있다.
본디 경기도 소망시의 소망 베이커리에서 진혁 쉐프가 개발한 빵 중 대표 메뉴는 베이컨 파이와 치킨 파이였다. 노을처럼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크림슨 치즈 케이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강남에 진출한 H & J 베이커리 앤 카페에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완전히 다른 메뉴를 내놓았다. 맛뿐 아니라 ‘살인 사건 현장’이라는 독특한 컨셉까지 갖춘 쿠키 하우스 시리즈를 런칭해 성공을 얻었다.
<해와 달>로 가게 이름을 바꾸며 대학가로 본점을 옮겨 개업한 지 이제 3개월.
그는 여기서도 안주하지 않았다. 쿠키 하우스 시리즈를 강남점에 남겨두고, 새로운 쿠키 시리즈를 내놓았다. 맛있는 디저트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놀라운 화두를 내놓았다.
그 화두는 바로 <진정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라는 주제다.
강남점과 같은 방침 하에 운영하는 ‘해와 달’ 본점에서도 1인당 구매 가능한 케이크와 쿠키 수는 정해져 있다.
그로 인해 연인 두 사람이 가게를 방문한 후 서로 먹을 것을 양보하라고 싸우다가 헤어지기까지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2달 전 망원대학교 교지에서도 다룬 바가 있다.
(중략)
오랜 사랑마저도 외면하고 싶을 만큼 치명적으로 달콤한 함정.
이 함정에 빠지는 것이 과연 ‘디저트가 맛있어서’ 일까? 아니면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임진혁 쉐프가 디저트 킹의 제자 자리를 걷어찼을 때 혹자는 젊은이의 패기라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만용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거목의 그늘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기를 선택한 새싹이며, 오롯이 독립하여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홀로 증명하고 있다. 역에서 대학가까지 길게 늘어서 번호표를 받고자 줄 서 있는 손님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제이제이.
◈ ◈ ◈
“이 사람 네 팬인가봐. 엄청나게 호의적으로 썼는데?”
백진영이 블로그 포스트를 보여주었다. 오래전부터 꾸준히 운영되고 있는 블로그는 H & J 카페 앤 베이커리 시절의 빵부터 최근 본점의 빵까지 남김없이 전부 감상을 남겼다. 그 외에는 진혁이 등장한 텔레비전 쇼에 대한 후기, 명품 가방과 옷에 대한 잡담이 보였다. 각 호텔별로 식사에 대한 후기까지 구체적으로 쓰여 있는 걸 보면 꽤 사는 집 사람처럼 보였다.
진영이 보여준 글을 읽은 임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가게에는 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료도 있는데? 너무 형을 무시하는데. 그리고, 맛있는 걸 그냥 먹으면 됐지 뭘 그렇게 주절주절 늘어놔? 남자답지 못하게.”
“…….”
‘이 사람은 아무리 봐도 여자인 것 같은데.’
뜻밖의 반응에 할 말을 잃은 백진영이 다시 입을 뗐다.
“아니야, 내 음료에 대한 칭찬도 다음 포스트에 있어. 글을 나눠서 쓴 거라고. 그리고 이 사람, 우리 가게의 모든 메뉴를 다 먹어본 게 다가 아니야.”
“뭐가 더 있는데?”
“원래 커피도 매일매일 습도랑 기온에 따라서 맛이 다르잖아. 당장 비만 와도 다시 다 내려야 하고. 그래서 그걸 맞춰서 나도 매일 아침 여섯 잔씩 커피 마셔가면서 내리는 거고. 너도 전날마다 다음날 일기예보 챙겨보면서 맞춰서 반죽하잖아?”
“그렇지?”
“그걸 다 눈치채고 있더라니까. 날씨는 한결같지 않은데 빵은 한결같다고 다른 빵집이랑 비교해서 구체적으로 근거를 들고 있어.”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눈치챘단 말이야?”
“그렇지?”
그는 좋은 것을 발견했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런 미세한 차이를 미각만으로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 지금 연습하는 메뉴를 먹어주면 좋겠는데.”
백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회 준비로 만들고 있는 빵 말이야?”
진혁은 현재 팀에 합류해 새벽과 저녁마다 연습장에서 빵을 만들며 연습하고 있다. 밀가루의 조합 비율을 조금씩 바꾸어가면서 최적의 프랑스식 식사용 빵을 만들려고 한다.
랑비에 사에서 수천 킬로그램에 달하는 밀가루나 부재료를 넉넉히 지원해 주었기에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연습이다.
지금까지 만든 빵은 예전에 백진영이 소개했던 가톨릭계 보육원을 겸한 보육원과 노인시설로 보내왔다. 진영이 말했던 아이는 입맛이 예민한 편이었지만 밀가루의 배합을 0.1%씩 바꾸어서 빵을 굽기 시작하자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며 두 손을 다 들었다. 수십 개 이상을 먹어본 후에 김가영이나 백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어요. 둘 다 겉바속촉한데 뭐가 다르다고 말하기가 어렵다고요.”
“겉바속촉? 그게 뭔데?”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거요. 이 바게트가 딱 그런 느낌인데.”
0.1%의 차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김가영과 백진영 등은 더 이상 시식단으로 활약할 수 없었기에 진혁이 계속해서 맛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나 진희는 이 두 사람보다는 민감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매번 소망시로 빵을 보낼 수도 없고.’
같은 팀으로 출전할 예정인 쉐프들은 이미 완성도가 충분하다며 ‘예술적인 빵’ 부문을 연습하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진혁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빵 A와 빵 B가 있다고 해 보자.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게 0.1%만 다르게 만들었다. 진혁은 이 둘 사이에 있는 0.1%의 차이가 한강보다 더 깊다고 느낀다. 지나치게 민감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인해서, 타인이 얼마 정도나 차이를 느낄 수 있는지 짐작하는 것이 미묘하다. 절정 고수에게 있어 일류고수 한 명과 이류고수 한 명의 차이는 알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진혁처럼 절정을 초월해 신화경에 다다른 이에게는 삼류 무인이나 이류 무인이나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나란히 놓고 고르라고 하면 누가 더 못하는지는 쉽게 고를 수 있지만, ‘삼류 고수만큼의 공력을 내주세요!’라고 하면 또 살짝 애매하다.
민감한 미각과 후각을 통해 음식을 받아들이며, 요리인들이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통역해 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이 사람이라면 도움이 될지도.’
블로그 화면을 쿡쿡 누르며 이리저리 움직이던 진혁이 물었다.
“이 안부 게시판에서 안부를 물으며 연락해달라고 하면 되나?”
진혁이 적고 있는 메시지를 보면서 백진영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어…… 그렇긴 한데. 정말로 그렇게 쓸 거야?”
“응. 전에 도을이도 같이 갔던 이탈리아 식당 기억나? 도미 봉지 구이에 사이드로 취나물을 갈아서 만든 소스를 올려놓았잖아.”
“그런 건 또 귀신같이 기억하네.”
“기본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빵 자체는 순수한 프랑스 빵이야. 바게트나 뺑 오 쇼콜라도 전부 프랑스 기준에 맞춰야 하니까, 밀가루 같은 건 프랑스 밀가루를 쓸 수밖에 없지. 하지만 가능한 한 한국적인 재료를 살려서 만들어보고 싶단 말이지.”
특별히 애국심이 넘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 팀’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가는 이상 차별화를 두어야 하고, 진혁은 그걸 이 재료를 사용해 구체화할 생각이었다.
“따로 생각해놓은 재료가 있어?”
“응.”
진혁이 웃었다.
◈ ◈ ◈
한남동에 있는 고급 저택의 서재에서 정지숙은 오후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해와 달 바리스타에게 더치 커피라도 만들어달라고 할까 봐. 집에서 마시는 커피가 예전 같은 맛이 나지 않으니, 원.”
“마님, 주방장님께 커피를 다시 올려달라고 할까요?”
“괜찮아요, 아주머니. 나가셔도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가사 도우미가 나간 것을 확인한 정지숙은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진바라기의 2대 회장을 겸하고 있는 파워블로거 정지숙은 블로그 포스팅을 하기 전에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내가 프랑스식 케이크나 빵을 좋아하는 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이렇게 파워블로거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질 순 없지.’
그녀는 쪽지함에 새로운 쪽지가 있다는 알림 메시지를 보았다. 파워블로거가 된 이후 블로그를 판매하라는 쪽지가 수없이 오고 있다.
<쪽지함에 확인하지 않은 쪽지 1,315개가 있습니다.>
보나 마나 스팸 메시지라고 생각해 확인도 하지 않고 지우려던 참이었다.
진바라기의 페이스북 그룹 채팅방에 메시지 알림이 들어왔다. 정지숙은 깜짝 놀라 바로 확인 창을 클릭했다.
“가영 씨가 메시지를 다 보내고, 웬일이야?”
김가영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정지숙은 내심 짐작하고 있다. 매니저 김가영이 강남점을 그만두고 도자기 공방으로 옮겨간 이후, Kim88 역시 직장을 옮겼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장 답변해 달라는 긴급한 메시지였다. 정지숙은 메시지 내용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kim88 : 지숙 언니! ‘스위트 퀸’ 블로그 운영자 제이제이가 언니 맞죠?!]
정지숙은 무어라 대답할까 잠시 고민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녀는 양손을 키보드에 올려놓고 자판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