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3화
“너한테 원하는 홍보는 좀 다른 종류야. 지금 우리 빵집에 씌워져 있는 오명을 벗는 거지.”
“오명? 무슨 오명이 있는데?”
임진혁이 백진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풀잎에 내린 이슬방울의 무게처럼 미미한 힘을 사용하였으나. 백진영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커, 커흑.”
“…….”
진혁은 백진영의 등에 손을 대고 잠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푸르스름했던 낯빛에 점차 혈색이 돌아왔다. 백진영이 중얼거렸다.
“반죽을 많이 해서 그런가? 손힘이 장난 아니다. 악력 재면 몇십 킬로 나오는 거 아니야?”
“어. 응.”
임진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다시 원래 도을과 하려던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우리 빵집이 커플 브레이커라고 알려졌잖아.”
“아! 저도 그거 페이스북에서 봤어요.”
김도을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커플들이 사랑을 증명한답시고 왔다가 하도 많이 깨지고 가서, 이제 커플은 거기 안 간다면서요?”
“맞아. 쌍쌍이 오는 손님은 꽤 줄었지. 보통 여자들끼리나 남자들끼리 와.”
디저트 가게의 경우 여자들이나 커플들이 오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한 일이다. 백진영이 거들었다.
“남자들끼리 와서 우정을 테스트한답시고 나눠 먹으려다가 서로 양보하지 않아서 투덕거리는 경우도 있어.”
“흐~음.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김도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진영 역시 어리둥절해 하며 임진혁에게 물었다.
“설마 전에 유키코 쉐프님이 말했던 그 제안을 실천하고, 도을 학생한테 홍보해 달라고 하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그 제안이 뭔데요?”
“아예 독서실 책상처럼 칸막이를 만들어서, 각자 자기 자리에서만 먹게 하는 거지. 일본의 라면 가게 중에서는 그렇게 하는 가게도 있대.”
“우와! 손님들이 좋아하겠어요.”
“그래?”
“마주 앉아서 먹으면 앞에 있는 사람이 뺏어 먹기가 너무 쉽잖아요. 그런데 칸막이도 있고 하면 좋죠.”
“…… 그래. 하지만 내가 생각한 건 그게 아니야.”
진혁이 말했다.
“여기 있는 진영이 형을 봐.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지?”
“응? 나는 왜?”
“봤는데요?”
듣기 좋은 진혁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가게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사실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오픈 키친에 있던 요리사까지 전부 백진영을 보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진영이 당황해서 물었다.
“내가 뭘 했는데?”
“김가영 씨한테 케이크를 양보했잖아.”
진혁이네 테이블을 바라보던 다른 손님들이 피식피식 웃으며 먹고 있던 요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탈리아인 요리사 역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마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도을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양손을 벌리며 소년이 물었다.
“헐. 설마 작은 사장 형이 만든 케이크를 양보했다고요?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라워하는 그 모습에 진혁이 킥킥 웃었다.
“도을이 너도 케이크 조각 하나씩 더 받는 날에는 어머니 드실 치즈 케이크는 남겨 가잖아.”
“그건 하나씩 더 주셨던 날이나 그렇죠. 내가 먹을 게 있어야 양보를 할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런데 지금 형이 말하는 투를 보니까 그런 게 아닌데?”
“맞아. 백진영 형은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케이크 몫까지 전부 양보하는 사람이야.”
“케이크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 아니면 아예 작은 사장형 케이크를 못 먹어봤나?”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쳐다보자 백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단 거 좋아한다. 진혁이 케이크는 없어서 못 먹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김도을이 물었다.
“같은 가게에서 일하니까 매일매일 케이크를 실컷 먹어서 양보할 수 있었다든가?”
“형이 케이크를 양보한 사람도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어.”
도을이 씨익 웃었다. 먹이를 발견한 호랑이처럼 도을이 눈을 빛냈다.
“가게에서 일하면 케이크를 실컷 먹을 수 있나 봐요. 혹시 아르바이트 안 구해요? 저 잘할 자신 있는데. 케이크 많이 먹여 주시고 월급만 잘 주시면 돼요.”
“넌 일단 고등학교부터 졸업해라.”
중학생 아르바이트생을 구할 생각이 없는 진혁이 잘라 말했다.
“진짜 좋아하면 맛있는 케이크 따위는 양보할 수 있어야지. 진영이 형만 그런 게 아니야. 쿠키를 양보한 사람이 또 있어. 김소월이라고, 이 근처 대학교 다니는 학생이지.”
특별히 자기소개를 들은 적은 없지만, 손님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 기억하고 있다. 임진혁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백진영은 진혁이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알았다. 깨진 사람들에게 주목하지 말고, 진정한 사랑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잘 포장해서 진정한 사랑을 알 수 있는 가게로 만들자고.”
진영은 자신이 특별히 엄청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렴. 내가 가영 씨한테 케이크를 양보할 수 있었던 건…….’
가끔 임진혁이 집에서 만들어 본 샘플 케이크들을 자신에게 따로 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케이크를 싫어한다거나 가게에서 일하고 있으니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만도 아니다.
자신이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보다 김가영이 훨씬 더, 아주 많이 케이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빵은 먹으면 사라져버리지.’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더 많이 김가영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케이크를 먹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는데, 그 표정을 보고 싶어서다. 그 얼굴을 보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한 듯 따뜻해진다.
김가영이 자신에게 케이크를 단 한 번도 양보한 적이 없다는 사실 따위는 그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나랑 가영 씨는 그냥 평범하게 사귀고 있을 뿐이라서 특별히 그렇게 대단한 연애를 하고 있는 건 아니야. 그리고 나는 이 가게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니까 홍보하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도을이 네가 주목해주기를 바라는 게 이런 거야. 케이크가 맛이 있건 없건 알아서 잘 사귀는 커플들은 사귀고, 깨질 커플들은 어차피 깨져.”
백진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그렇게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서로 먹을 것을 양보하는, 사이 좋은 커플들의 이야기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잖아.”
“어…… 음. 그렇지?”
“디저트는 원래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달하는 거야. 리처드 베이커 쉐프도 케이크와 빵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디저트 서바이벌 쇼를 하는 동안 짧게나마 함께 지냈던 리처드 베이커 쉐프는 진혁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백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랬지.”
정확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라는 이야기였다. 그에게서 깨달음을 얻은 후, 기괴하고 흉측한 케이크만 골라 만들어대던 임진혁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변했다. 대중들이 선호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취향을 버리지 않았다.
‘진혁이 내심 신경 쓰고 있었나.’
백진영은 <해와 달>이 커플 브레이커, 우정 브레이커로 유명해진 것에 대해서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았다. 손님들이 많이 몰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해와 달>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일상에서 한순간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곳이야. 사막처럼 힘든 세상을 헤매며 만사에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처럼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커플 브레이커라니. 자기들이 양보심 없는 걸 왜 가게 빵이 맛있는 탓을 해?”
“어…… 그래.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가게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붙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빵을 맛없게 만들 수도 없으니.”
“그건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요!”
백진영과 김도을이 동시에 외쳤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원래 남자라면 자신의 무… 일에 최선을 다하는 법이니 말이지.”
그는 무공(武功)이란 말을 삼켰다. 점원이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요리 나왔습니다.”
서너 겹 되어 보이는 종이가 구겨져 감싸고 있어 안에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굳이 손을 뻗어 봉지를 헤쳐 보았다. 봉지를 벌리자 뭉게뭉게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분명히 생선구이인데도 비린 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강한 향신료 향만 난다.
‘바질과 칡나물? 신기한 향을 쓰네.’
진혁은 그 독특한 향신료의 조합을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방 안에서 다양한 향신료 향이 풍겨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한국식 나물도 이탈리아식 요리에 접목할 줄은 몰랐다.
“한국 재료를 쓴 이탈리아 요리네.”
다진 올리브가 빼곡히 올라간 도미 위에는 반으로 잘린 방울토마토와 이름 모를 조갯살, 송송 썰린 차이브 잎과 조그마한 마늘 조각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얀 생선 살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생선 국물에 반쯤 잠겼다. 도을이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우와! 이건 맛있어 보여요!”
‘그건 아까 빵들은 맛없어 보였다는 이야기잖아…….’
백진영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는 국자에 스튜를 가득 담아 소년의 접시에 덜었다. 도을은 요리보다 냄비에 더 호기심을 보였다. 종이가 여러 겹 겹쳐져 있는 종이 냄비를 처음 본 탓이다.
“이것 봐요, 냄비가 종이에요.”
“여기 명물인 <봉지 도미 스튜>야.”
“이게 도미라고요? 도미는 회로나 먹는 줄 알았는데.”
“구이나 조림으로도 많이 먹어. 여기 구이는 맛있으니까 잘 먹어 봐.”
희고 단단할 살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무너져내렸다. 크림처럼 촉촉한 단백질을 입안에서 느끼며 진혁은 생각했다.
‘중간에 생선 뼈 손질 하나 빼먹었네. 이것만 없었어도 완벽했을 텐데.’
하지만 백진영과 김도을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렇지? 재료들도 우리나라에서 직접 공수한 것만 쓴다고 했어.”
“보통 이탈리아 요릿집이면 이탈리아에서 재료 가져와서 쓴다고 광고하지 않아요?”
“비행기 타고 오래 걸리니까 신선하지 않고 비싸다고, 일부러 한국 재료를 쓴다더라.”
“작은 사장님네 가게하고 비슷하네요. 직접 키운 채소들만 사용한다고 막 그러잖아요. 듣도보도 못한 이파리들 잔뜩 넣어서 샌드위치 만들고.”
“왜, 샌드위치도 맛있잖아.”
“맛있지만 저는 치즈 케이크가 더 좋아요. 그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맛이라고요.”
신선한 도미와 조개, 향신료에서 우러나오는 국물은 농축되고 진하면서도 비린내가 하나도 없다. 빵에 찍어 먹으면 좋을 것 같은 국물이다.
진혁은 손을 들어 올렸다.
“식전 빵을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때 주방 안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픈 키친에 나와 있는 이탈리아인 요리사와는 다른 목소리다.
“텔레비전에 출연하시는 유명 쉐프님이라고 해서, 어린애를 시켜서 잘난 척하는 건 곤란하지.”
“자기 빵이 맛있다고 자랑하고 싶으면 블로거지들한테 보내서 글이나 쓰게 하지, 왜 남의 집 빵을 욕해?”
주방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은 진혁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