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2화
한참이 지났지만, 제시카는 케이크를 고르지 못했다.
『이걸로 해야, 아니, 저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게 더 좋지?!』
브라이언이 도움을 주려 했다.
『아까 미국에서의 케이크는 웨딩 케이크로 한다며?』
『하지만 이런 예술 작품을 우리만 보고 끝날 순 없어요! 너무 아깝다고요. 세 개를 다 할 수는 없나요?』
제시카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임진혁과 백진영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만 하랬잖아.’
‘저렇게 고민할 줄 몰랐지.’
『천천히 결정해서 알려 주십시오.』
『그럼 하루 더 생각해보고 내일까지 알려 드릴게요.』
『아참, 브라이언 쉐프.』
백진영이 말했다.
『드 뺑 마드몽이라는 대회를 아세요?』
『당연히 알죠!』
막 코트를 걸치고 일어나려던 브라이언 신이 몸을 돌려 진영을 바라보았다.
『저는 지금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님 지도를 받아서, 미국 팀으로 출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또 만나겠네요.』
브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진혁 쉐프, 한국 팀으로 나가십니까?』
백진영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가 설득하느라 힘들었죠.』
『아니, 도대체 추천권은 어디서……. 아니, 이런 건 중요하지 않겠군요.』
브라이언이 황망하게 눈을 깜빡였다.
『앞으로 5개월쯤 남았군요. 저도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보통 일 년 정도 준비한다고 하던데, 웨딩 케이크를 세 개나 개발하시느라 시간을 뺏긴 건 아니신지요?』
『웨딩 케이크는 제일 좋아하는 컨셉입니다. 케이크라는 건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축하하는 거니까요.』
진혁은 훈련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서 은혼식(銀婚式) 케이크도 맡겨 주시죠.』
은혼식은 결혼 25년을, 금혼식(金婚式)은 50주년을 축하한다. 혼인한 지 60년이 된 이들은 회혼례(回婚禮)를 베풀기도 한다.
그는 잠시 자신이 처음 만들었던 웨딩 케이크를 짧게 회상했다.
감 노인과 금 씨 할매의 은혼식을 축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젊어서부터 몸을 혹사해 온 그들이 석혼식(石婚式)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아무리 원기를 북돋아 주었다고는 해도, 기껏해야 10년 더 살까?’
사고 없이 산다고 하면 대강의 여명(餘命)은 십여 년. 노화한 골격과 체내에 쌓인 탁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어차피 나이가 들어 노쇠하면 민간인들은 금방 죽어버리기 마련이다. 태어난 이상 모두가 죽는다는 건 해가 떴다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아쉬워해서는 안 된다.
『은혼식이라니, 먼 미래의 일이네요. 그때도 꼭 케이크를 맡길게요.』
『하하! 감사합니다.』
『대회도 응원할게요.』
『제시! 나를 응원해야지.』
『하지만 저런 케이크를 먹고서 어떻게 임진혁 쉐프님을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제시이?』
『물론 자기도 응원하지!』
제시카가 허리를 조금 숙여 브라이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백진영이 흠흠, 헛기침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고요.』
『네!』
생각보다 시식이 길어졌다. 두 사람을 배웅한 임진혁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나는 먼저 일어날게.”
“진혁아.”
“응?”
“오늘도 멋있었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백진영을 보면서 진혁이 피식 웃었다.
“아까 말했던 그 케이크는 백일 기념으로 따로 어레인지해서 만들어 줄 테니까, 열흘 전에 미리 알려 줘.”
“앗싸! 고마워!”
말 한마디로 케이크를 번 백진영이 크게 기뻐했다.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가게 유리문 바깥에서 기웃거리던 사람과 몸을 부딪쳤다.
“악!”
“어, 죄송합니다.”
백진영이 고개를 숙였다. 스포츠머리로 짧게 깎은 머리를 한 남학생이었다. 진영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몸이 꽤 단단했다.
진영이 물었다.
“손님, 저희 가게에 볼일이 있으신가요?”
“아, 그게…… 저…….”
소년이 중언부언하며 머뭇거리는데 임진혁이 낯익은 기운에 반갑게 말했다.
“김도을 학생 아니야? 소망시에 있는 빵집에 자주 오던.”
“와! 역시 사장님은 알아보시네요!”
새벽같이 나와서 치즈 케이크를 도시락 대신 사 가던 단골이다. 나중에는 예리하고 선명한 미각으로 이런저런 신제품을 품평하기도 해서 도움이 꽤 많이 됐다. 유일봉과는 형, 동생 하는 사이다.
임진혁이 피식 웃으며 손바닥으로 도을이 입고 있는 교복의 왼쪽 가슴께를 가리켰다.
“명찰 달고 있잖아.”
“제가 키가 많이 컸잖아요. 사람들이 못 알아보더라고요.”
꾸준히 빵을 사다 먹으며 키가 부쩍 크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세가 좋아졌다. 비쩍 마른 채 항상 어깨를 구부리고 소심해 하던 그는 이제 없다. 어느 정도 몸이 좋아졌다.
“얼굴은 그대론데.”
소망시에 가더라도 예전처럼 가게에서 온종일 일하는 것이 아니니 도을을 만날 일은 없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보자 반가웠다.
“진혁이가 정말 아끼는 단골손님인가 봐요. 이렇게 반가워하는 건 가족들 빼고 처음 보네.”
“제가 소망 베이커리가 오픈할 때부터 진짜 빼놓지 않고 갔거든요. 인스타그램이랑 트위터에 빵 사진도 맨날 올려요!”
소년이 스마트폰을 흔들며 자랑했다. 진혁이 그런 도을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서울에는 어쩐 일이야?”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는 도을이네는 형편이 그리 좋지 않다. 도을이가 부리는 유일한 사치는 점심으로 먹는 케이크 조각이다.
중학교 2학년생이고 이제 곧 3학년이 될 아이가 서울에 올라올 일이 무엇이 있을까?
진혁이 자신의 중학생 때 생활을 돌이켜보며 고민했지만 생각날 듯 말 듯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백진영이 먼저 물었다.
“수학여행 왔어?”
“에이, 경주도 아니고 누가 요새 서울로 수학여행을 와요.”
소년이 자랑스럽게 말하며 몸을 움직여 보였다. 앞으로 한 발 나섰다가 돌면서 옆으로 주먹을 휘둘러 보인다.
통통했다가 살이 쪽 빠진 몸은 유연하게 움직여 정권을 지르는데 진혁이 보기에는 아주 어설펐다. 파리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것 같은 주먹을 보며 진혁이 진지하게 물었다.
“춤을 배우는 거냐?”
도을이 실망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춤이라니 너무하네요. 일봉이 형한테 못 들으셨어요?”
“어?”
“제가 서울에서 하는 청소년 태권도 품새 대회에서 주전으로 선발돼서, 이번에 경기도 대표로 출전한다고요.”
‘저게 무술이라고?’
방금 전에 소년이 한 동작은 흐느적거리는 것이 꼭 낙지가 물속에서 다리를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술이 아니라 춤이라고 생각해 준 이유는 그나마 뭔가 리듬이 보였기 때문이다.
진혁이 멍청하게 대답했다.
“아, 태권도.”
백진영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진혁이 너는 육군 제대라며. 군대에서 안 했어?”
“음, 무슨 띠를 따긴 했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진혁이 눈을 껌뻑거렸다.
“자세도 모르시는 거 보면 노란 띠나 분홍 띠 아닐까요?”
초급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며 도을이 놀렸다.
“사장님이 엄청 몸이 좋으니까 태권도도 잘 하실 줄 알았는데, 못 하시는 것도 있네요.”
진혁이 입가를 슬쩍 끌어올렸다. 그가 가게 문을 잠그며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밥이라도 사 줄게.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우왓! 감사합니다!”
도을이 90도로 허리를 접어서 인사했다.
“하지만 신세를 지는 건 좀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백진영이 손뼉을 쳤다.
“홍대점 트위터 홍보?”
“예!”
“글쎄, 손님이 이미 충분히 오고 있어서 사실 홍보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럴 때일수록 전략적인 홍보가 필요하죠.”
세 사람은 함께 근처의 식당으로 향했다. 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모처럼 서울까지 왔는데 맛있는 걸 먹는 게 좋겠지? 아까 파스타 먹고 싶다고 했지?”
“네!”
“이탈리안 가정식 파스타를 하는 집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1km가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 곧 도착했다. ‘하얀 집’ 이란 단어가 이탈리아어와 한국어로 적혀있었다. 벽에 있는 책장에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와 영어, 일본어와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된 요리책이 꽂혀 있었다. 도서관처럼 벽을 꽉 채운 책장 때문인지 사람이 몇 있는데도 가게 내부는 조용했다. 느지막하고 어슴푸레한 조명이 희미하게 가게 안을 밝히고 있다.
“나하고 가던 가게들하고 너무 다른데.”
진혁 역시 처음 와 보는 가게다. 보통 두 사람이 같이 가는 가게는 곱창집이나 치킨집, 삼겹살집이나 횟집처럼 소주를 곁들여 마실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백진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애를 데리고 술을 마시러 가냐?”
벽에 걸린 새장 속에는 초록빛과 노란색 알록달록한 깃털을 뽐내는 앵무새가 횃대 위에 앉아 있었다.
“와! 앵무새가 있어요!”
앵무새에게서 생기(生氣)를 전혀 느끼지 못한 진혁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가짜일걸.”
“엄청 진짜 같이 생겼는데요?!”
“호오.”
높은 조리모를 쓴 요리사가 미소를 지으며 오픈 키친에 서 있다. 수염을 제대로 기른 이탈리아인이었는데, 그는 능숙한 한국어로 세 사람을 맞이했다.
“한눈에 보고 로렌이 가짜라는 걸 아신 분은 처음입니다.”
백진영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했다.
“어머니의 맛 코스 3인분 주세요.”
김도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코스라고요?”
“괜찮아, 괜찮아.”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가격조차 모르는 비싼 음식이 나올까 두려워진 소년의 동공이 흔들렸다. 진혁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진짜로 부담되면 아까 말했던 트위터 홍보라도 대신 해주던가.”
“이미 손님이 너무 많아서, 형이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점원이 유리병에 담긴 물을 가지고 나왔다. 포도주병처럼 목이 높은 투명한 유리병은 겉에 양각으로 포도와 포도 덩굴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걸 처음 본 김도을은 감탄하며 물병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제가 물 따라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곧 나온 식전 빵은 시큼한 호밀빵이었다. 겉은 딱딱하고 안은 부드러우며 건포도가 들어있다. 빵을 찢어먹던 소년이 인상을 찡그렸다.
“작은 사장형이 만든 빵이 더 맛있는데요.”
“이건 천연 발효종을 사용해서 만든 빵이라 원래 이런 맛이야. 대신 소화가 잘 되고 건강에 좋을걸.”
“부드럽고 촉촉하고 맛있는 치즈 케이크 같은 게 있는데 왜 이런 개떡 같은 걸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픈 키친에서 요리사가 흠칫하는 것을 본 백진영이 웃으며 수습했다.
“빵 껍질을 남겨놓았다가 이따가 파스타 소스를 발라서 먹으면 맛있어.”
백진영이 말하자 김도을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것도 작은 사장형이 만드는 껍질 식빵이랑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오픈 키친이 바로 앞에 있어 소년이 말하는 소리가 다 들린다.
요리사의 이마에 핏줄이 서는 것을 본 임진혁이 팔짱을 꼈다.
‘얘가 미각이 예민하고 배려심도 깊은 편이고 어른스러운데…… 눈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