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9화
“연애할 사람은 빵을 양보하든 말든 하는 거고, 못하는 사람은 못 하는 거지.”
“너무 팩트 폭력이에요, 사장님.”
“자!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들어가 보라고.”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직원들이 인사하고 돌아가는데, 예은이 등을 돌려 웃으며 속삭였다.
“다시 한 번 연애하는 거 축하드려요, 백진영 바리스타님.”
“알아서 잘 할 거야.”
직원들을 보내고 난 후 진혁은 손님을 기다렸다. 백진영이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은 먼저 가도 되는데.”
“무슨 소리야! 나도 브라이언 쉐프한테 인사하고 싶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진영이 형은 케이크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잖아? 단것보다 덜 단 걸 좋아하잖아.”
“케이크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 아니다? 손님이 오시면 제대로 음료를 대접하려고 있는 거라고. 좋은 라떼 만들어 줄게.”
“너 때문에 입맛 바뀌었다.”
“그렇다면야, 뭐.”
두 사람은 금방 도착했다. 제시카 린든은 브라이언과 팔짱을 낀 상태로 가게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임진혁이 반갑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브라이언 쉐프. 반갑습니다, 제시카 양.”
“Nice to meet you.”
인사하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에게 백진영이 음료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음료수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백진영 사장님! 영업하십니까?”
“아드레아노 존부 사장님 밑에서 인턴십 하시는 건 어떠세요? 많이 힘들죠?”
“하고 싶어서 하는 거긴 한데 쉽지는 않습니다. 임진혁 쉐프님이 이걸 알고 도망쳤나 싶을 정도네요.”
농담처럼 던진 말에 백진영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하하하! 진혁이도 지금 가게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면서 편하게 일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브라이언이 양손을 내저었다.
“그러잖아도 유키코 쉐프님한테 들었습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셔서 일하는 양이 엄청나시다고요.”
“저희가 인간이 아니라 강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실 건 일단 물로 괜찮습니다.”
임진혁이 웃으며 상자를 들고 왔다.
“케이크를 맛볼 때 맛이 섞이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죠, 브라이언 쉐프?”
“예. 아무래도 케이크의 맛 자체에만 신경 쓰고 싶습니다.”
브라이언이 제시카에게 묻자 그녀 역시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크 샘플은 여기에 있습니다.”
진혁이 상자 안에서 다시 세 개의 작은 상자를 꺼냈다. 브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 세 개가 전부 제 결혼식 케이크입니까?”
“흠, 그건 결정하시기 나름이죠. 일단 맛부터 보시고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드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진혁 쉐프님, 오늘 케이크 시트만이 아니라 웨딩 케이크의 실루엣 역시 확인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우습게도 브라이언만이 아니라 백진영 역시 실망한 표정이었다.
‘형은 너무 작아서 그런가 본데?’
케이크 조각을 얻어먹어 보려고 남았는데 막상 그 문제의 케이크가 너무 조그마하니까 실망한 것이다. 등을 돌리고 있지만 실망한 표정인 것이 분명하다. 물을 따르는데 어깨가 축 늘어져 있어 알기 쉬웠다.
진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열어 보시죠.”
제시카가 손을 뻗어 상자 뚜껑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앗!”
초코파이 세 개를 쌓아 올린 것 같은 크기의, 귀여운 3단 케이크가 드러났다. 새콤한 주황빛과 달콤한 초콜릿 브라운 색깔이 대비되어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쪽은 주황색, 가운데는 시린 하늘처럼 푸른 쪽빛, 맨 위에는 조금 더 은은하게 연한 노란색이다.
“세상에, 임진혁 쉐프. 지금 케이크 시트를 조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아예 미니 웨딩 케이크를 만든 겁니까?!”
“샘플을 크게 만들면 양이 너무 많잖아요.”
“아니, 맙소사. 이렇게 조그맣게 구우려면 레시피 자체를 바꿔야 했을 텐데.”
과연 동종 업계 종사자라서 제일 먼저 눈치채는 포인트가 남다르다. 진혁이 키득 웃었다.
“전통 결혼식이라고 하셔서 원래 생각했던 디자인에는 봉황(鳳凰)이 들어갔습니다만, 지금 이건 좀 다르죠. 궁중전통혼례식으로 하신다고 하셔서 일부러 홍단(紅緞)과 청단(靑緞)에 색깔을 맞추었습니다.”
백진영이 입을 벌렸다.
“궁중혼례는 뭐가 달라?”
“보통 전통혼례식은 그냥 마당에서 사람들 늘어놓고 하는데, 궁중혼례는 왕세손과 왕세손빈의 혼례식을 재현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다른 전통혼례와 다르게 청색과 홍색을 많이 써서 색깔이 화려하더라.”
“아…….”
브라이언이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생각했던 전통 혼례식 케이크는 원앙 한 쌍이 올라가 있다거나…… 하는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혁 쉐프님의 감각은 역시 남다르군요. 혼례식장의 전체적인 색깔까지 생각해 주신다니 대단합니다.”
『그럼 다른 2개는 뭐지?』
제시카가 묻자 진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전통적인 웨딩 케이크인 화이트 레이어 케이크입니다. 다른 하나는 직접 맛보시면 아실 겁니다.』
『진혁 쉐프, 영어가 할 수 있잖아요?! 왜 전에는 모르는 척했던 거지?』
『이번에 가게를 열면서 공부했습니다.』
정확히는 회화 집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옛날에는 분명히 영어공부를 하는 것이 아주 어렵게 느껴졌는데, 상단전의 기능이 증진되면서 함께 얻은 공능 덕분에 암기력과 응용력이 늘어 가능했다. Voca 15000개 등 유명한 어휘집 몇 개를 같이 외우자 훨씬 편해졌다.
『백진영 형이 회화를 함께 연습해줘서 금방 늘었죠.』
『와, 완전히 개인 과외를 받았나 보군요.』
『그런 셈이죠.』
『알아서 다 공부해서 과외할 것도 없던데요.』
남자 둘이 서로를 칭찬하고 있는 동안 제시카가 끼어들었다.
『그럼 이걸 맛보면 될까요?』
『제가 잘라 드리죠.』
빨강과 파랑, 언뜻 보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강렬한 원색의 조합이다. 하지만 진혁은 매끄러운 케이크 층의 겉면에 오돌토돌한 작은 무늬를 그려내 강렬한 적색을 조금 더 눌러주었다. 파란색은 희미한 회색 선으로 갈라져 있어 더 우아해 보인다. 맨 위에 있는 연 주홍빛 케이크 위에는 새끼손가락에나 어울릴법한 작은 티아라가 올라가서 아름답게 반짝였다.
『너무 예쁘다.』
백진영이 끼어들었다.
『나도 맛봐도 될까요? 제삼자로서 어떤 것이 좋을지 결정을 내려드리죠.』
『편한 대로 하세요.』
진혁은 조그마한 도자기 접시에 작은 케이크를 한 조각씩 잘라 내려놓았다.
“자, 첫 번째인 이홍청(二紅靑) 케이크입니다.”
백진영이 중얼거리며 포크를 가져왔다.
“조선 시대 사또 이름 같은 네이밍 센스야.”
“그런 뜻은 아니지만 말이지.”
임진혁과 백진영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브라이언이 포크를 들었다.
‘솔직히 임진혁 쉐프가 어떤 걸 가지고 나올지 궁금했는데.’
임진혁 쉐프는 한국에서 태어나 계속해서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페이스트리 쉐프에게 있어서는 불리한 편에 속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는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허공에 비상하여 온 세상에 자신의 실력을 널리 알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현재 업계 최고의 디저트 쉐프라고 할 수 있는 아드레아노 존부 아래에서 수학할 기회를 거절하다니, 제정신으로는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다.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기술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고루 인맥을 쌓을 수 있는 황금 같은 찬스인데 말이다. 자신이 쫓고 있었던 목표를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 버리는 임진혁을 보며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질투하기도 했다.
‘임진혁 쉐프는 자아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라곤 없었을 거야. 한국에서 태어나 계속해서 한국에 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부레옥잠은 나무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가 거센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동안 부레옥잠은 그대로 물결에 휩쓸려 어딘가에 흘러가 버린다.
하지만 임진혁 쉐프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가족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임진혁 쉐프가 거절한 덕분에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의 제자가 되었어.’
끝까지 사양하면서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진혁 쉐프는 아드레아노 존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위치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서 거절한 거야.’
하지만 브라이언은 그때 임진혁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후회하지 않겠냐고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돌덩이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 버리고 가버리는 친구에게 원석의 가치를 설명하지 않았다.
질투심과 애정과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늪처럼 뒤엉켜 복잡하다.
‘대신 나는 진혁 쉐프에게 기회를 줄 거야.’
케이크를 한술 뜨며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의 제자로서 이것저것 배우며 만난 수많은 사람을 모두 결혼식에 초대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임진혁의 케이크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진혁의 솜씨에 달렸다. 그는 할 만큼 했다.
케이크가 입술에 닿는 순간 브라이언은 모든 고민을 잊었다.
『……!』
눅진하고 달콤하며 끈적한 초콜릿은 세콤 쌉쌀한 오렌지의 상큼한 맛과 어우러져 혀를 향해 돌격한다. 지나치게 달지도 않고 과도하게 새콤하지도 않다.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두 맛은 편안하게 입안에 고이며 몽롱한 황홀경을 선사했다.
『…… 오렌지 껍질을 갈아 넣었군요.』
『그것만 넣은 건 아닙니다. 조금 더 맞춰 보시죠.』
진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시카는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 크림을 핥았다.
『초콜릿이랑 오렌지는 처음 먹어봐요! 정말 너무나 맛있네요. 다른 건 먹어볼 필요도 없이 이걸로 하는 게 좋겠어요.』
입가에 얼룩덜룩하게 초콜릿을 묻힌 채 제시카가 열렬하게 말했다.
『어때, 자기? 브린도 그렇게 생각하지?』
백진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나머지 두 개도 먹어보고 난 다음에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진영이 임진혁에게 몰래 속삭였다.
“이거 진짜 맛있다. 딱 가영 씨가 좋아하는 취향이야. 우리 데이트 15일 기념일 케이크로 이거 만들어 줘.”
“브라이언 쉐프를 위한 특제 케이크라서 안 돼. 만일 두 사람이 이 케이크 말고 다른 두 개 중에서 웨딩 케이크를 고른다고 하면 그때는 생각해보지.”
진혁이 거절했다. 그는 다른 케이크를 내놓았다.
『엘더플라워를 올린 화이트 레이어 웨딩 케이크입니다.』
『이건 정말로 임진혁 쉐프의 취향이 아닌데?』
『누구 아이디어야? 어서 말해봐.』
이전에 임진희가 제안한 케이크다. 진혁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케이크로 결정하신다면 그때 말씀드리죠.』
하얀 포말이 수북이 감싼 동그란 삼단 케이크는 장식이라곤 없이 단순하다. 하지만 그만큼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다. 큼지막하게 한 송이 피어 있는 엘더 플라워는 금빛 반짝이와 광택이 도는 하얀 진주 알들로 장식되어 아름답다. 시선을 확 끄는 아름다운 케이크였다.
『어머나. 이것도 너무 예뻐요! 나중에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이 케이크를 쓰면 좋겠어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