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8화
“잘 모르는데…….”
“알았어. 내가 해결할게.”
김소월은 농구부실에 데려다 놓을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상태가 많이 좋지 않으니 학교 병원으로 바로 가는 게 낫겠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데려다 놓은 후, 동아리 연합회 공식 비상연락망에 접속해 농구부 부주장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부주장이 달려와서 보호자 위치를 인계받기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을 처리하고 김소월과 한수희 두 사람은 병원 밖으로 나섰다.
“명환 선배가 어디 크게 아픈 줄 알았어. 갑자기 그런 데서…….”
소변을 지렸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하고 수희가 입을 다물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도 아니고, 영향력 있는 20대 남자가 하기에는 크나큰 실수다. 소월은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 명환 선배와 소변 사진이 돌고 있다. 심지어 학교의 오픈 카톡방에도 사진이 오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빵집이 학교 근처에 있던 탓도 있어 순식간에 소문이 돈 모양이다.
김소월을 보며 한수희가 눈을 반짝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옛날이라니?”
“우리 엄마가 손님 먹으라고 사다 놓은 롤케이크를 내가 몰래 먹었을 때 있잖아. 기억 안 나?”
여덟 살짜리 한수희도 단것에 환장했다. 수희의 어머니가 김소월의 어머니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해 놓은 냉장고 속의 롤케이크를 한 입 훔쳐먹을 만큼 좋아했다. 어린 수희는 가장자리를 조금씩 잘 뜯어먹어서 아무도 먹지 않은 것처럼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소월은 수희보다는 머리가 잘 돌아갔다. 손과 입으로 뜯어먹어서는 각진 모양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소월은 빵칼로 롤케이크 가장자리를 잘라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 그러던 와중에 수희네 어머니와 소월이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오셨다. 두 사람은 막 남의 집 냉장고에서 롤케이크를 꺼내 빵칼로 자르고 있는 김소월을 발견하였다.
“남의 집에서 무슨 짓이니?!”
수희 대신 소월이 혼났다.
그래서 수희는 미안해하며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유리구슬을 주었다. 그녀가 제일 아끼던 것이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김소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무지개색 구슬 같은 건 필요 없는데 말이지.’
수희가 말했다.
“고마워. 너 없었으면 어떻게 해야 했을지 몰랐을 거야. 넌 진짜 대단해.”
그녀가 쿠키 주머니를 내밀었다.
“아까 포장했던 쿠키 중에 폭사 쿠키만 남겨 놨어. 먹어봐, 맛있을 거야.”
‘쿠키를 남겼다고?’
김소월은 해외 출장을 다녀온 아버지가 사 온 과자를 아버지에게조차(!) 양보하지 않고 전부 먹어버렸던 어린 한수희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장 십 년 전의 일을 떠올리지 않아도, 이번에 명환 선배하고 헤어지게 된 일도 케이크 때문이었던 것 역시 안다.
‘평소에는 디저트 따위는 전부 수희에게 양보했으니까 싸울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빵집에서 개업축하선물로 돌린 괴상한 케이크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고 했어. 명환 선배가 한 입 먹어보고 수희한테 왜 자꾸 뺏어 먹냐고 뭐라고 하면서 달려들어서 헤어지게 되었다고.’
마치 주인을 몰라보던 고양이가 쥐를 물어온 걸 보는 것 같다. 조금 감동한 소월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 내가 진짜로 먹는다.”
봉지 안에 있는 쿠키는 쿠키라기보다 잼 반죽에 가까워 보였다. 불그스름하게 반짝이는 얇은 설탕 바닥 모양 위에 조각난 진저브레드맨 모양의 쿠키가 듬성듬성 올려져 있다.
“폭사(爆死) 맞네.”
다시 봐도 괴기한 컨셉이다.
수희가 입맛을 다셨다. 소월이 노려보았다.
“너, 포장해 온 세 개의 쿠키 중에서 두 개를 먹어버리고 한 개를 지금 나한테 주는 거잖아. 그런데 이것까지 노리는 거야?”
“호호호호.”
그녀는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김소월이 사탕 조각을 뚝 부러뜨려 입안에 넣었다.
농익은 버찌처럼 선명한 붉은색에서 상상한 맛과 다르다. 새콤하지 않고 달았다. 달콤하고 따뜻하다.
‘만든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아직 식지 않았어.’
딱딱한 사탕 조각이 깨지며 그 안에서 따끈따끈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얇디얇은 사탕 조각 안에 어떻게 무엇을 숨겼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새콤한 과일 향 초콜릿이었다.
겉에 뿌려진 쿠키 조각은 부드럽고 폭신하게 녹아들고, 딱딱한 사탕이 까득까득 씹힌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질감의 맛인데 초콜릿이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서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다. 달고 상큼하며 부드럽고 단단하다.
“…… 흐으.”
따뜻한 온천물에 온몸을 담그는 것처럼 온화한 기운이 뻗쳐 온몸을 돌았다. 알고 있던 그 많은 한국어 단어들은 그 와중에 목구멍 속 깊숙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김소월이 중얼거렸다.
“맛있다.”
“맛있지! 진짜 맛있지! 나도 폭사 쿠키를 제일 좋아해.”
“제일 좋아하는 걸 남겨 준 거야?”
“…… 원래는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네가 오늘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한수희가 조그맣게 말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어깨는 어렸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둥글다. 지금 손을 뻗으면 그대로 등을 안으며 동그란 어깨를 감싸 안을 수 있다.
이제 소꿉친구가 아닌 한 사람의 남자로 당당히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월이 아주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많이 컸다. 한수희.”
“아얏!”
그는 수희의 이마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어렸을 때는 서슴없이 하던 장난이다.
“뭐 하는 짓이야! 김소월!”
소월이 씩 웃었다.
한때는 수희를 이성으로 의식했던 적도 있다. 제멋대로인 면도 없지 않지만 나름 귀엽다. 치어리더팀의 주장을 맡을 정도로 운동을 열심히 하고 몸매도 좋다.
“네가 너무 내 친동생 같아서
“동생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너보다 2달 더 먼저 태어났거든?!”
“정신 연령은 내가 훨씬 더 높지.”
소월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 ◈ ◈
한 달 후, <해와 달> 빵집에는 여전히 손님이 많았다. 막 백진영이 CLOSE 팻말을 내걸자 직원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개업 빨 떨어지면 사람이 더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가 줄지를 않네요.”
막내 아르바이트생인 민제가 정장 바지 허리께를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휴학하고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유 있게 유럽여행비를 모을 생각이었는데,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하루에 8시간씩 꼬박 일하고 나서 바지 사이즈가 1인치나 줄어 들어버렸다.
예은이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줄어들 리가 없지. 강남점도 처음에 오픈하고 6개월은 계속 사람 많았어.”
“그때는 한창 TV 출연하고 계셔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엄청 홍보해줬으니까 그랬던 거 아니에요?”
“맛없는 가게가 TV 홍보하면 사람들 몰려들어서 순식간에 망해. 맛있으니까 잘 된 거지.”
“우리 가게가 맛있긴 맛있죠. 여기 봐요, 우리 학교 신문부에서 낸 신문 가져왔어요.”
민제가 친구에게 받은 신문을 흔들어 보였다.
“망원대학교 신문?”
“광고를 낸 적도 없는데.”
백진영이 신기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진혁은 부지런히 쿠키를 굽고 있었다. 신작 쿠키를 굽는답시고 진저브레드맨 쿠키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잘라 늘어놓는데 표정이 아주 진지했다. 살인청부업자가 갓 죽은 사람을 토막 내는 것처럼 심각해 보인다. 쿠키를 굽던 진혁 역시 고개를 들어 물었다.
“뭐라고 났는데?”
“읽어보시면 아실 거예요. 어쩐지 요즘 커플들이 많이 온다 했는데…….”
<지금 당신의 연인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최근 망원역 앞에 새로 연 빵집이 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가게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놀라운 기술로 엄청난 맛으로 완성한다는 특징이 있다. 개업식 당시에는 돼지머리를 완벽하게 재현한 과일 생크림 케이크를 내놓아 시선을 끌기도 했다.
케이크 못지않게 음료 또한 맛있지만, 데이트하는 장소로는 권하지 않는다. 일단 대기 시간이 너무 길다. 번호표를 발급받아도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둘 다 인내심이 사라져 쉽게 싸울 수 있다. 또한, 그렇게 기다린 후 가게 안에 들어와 테이블에 앉게 된다면 그 이후가 더 문제다.
1인당 음료 2개, 케이크 2개와 쿠키 3개까지 고를 수 있다. 일반적인 빵집이라면 모자라지 않겠지만…….
소리 내 기사를 읽던 백진영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빵을 하나 먹고 난 다음에 남은 빵과 쿠키를 다 양보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네?”
“그리고 그 사랑 테스트를 하러 온 사람들은 다 깨졌대요. 지금까지 50쌍이 넘는다고 하는데요?”
민제가 하는 말에 백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왜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려고 하지? 애초에 그런 테스트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당연히 헤어지게 된다고.”
임진혁은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먹을 것이 조금 맛있다고 정인(情人)에게 양보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런 관계라면 빨리 헤어지는 편이 좋아.”
예은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음식이라면 저도 그렇게 얘기하겠지만요, 진혁 쉐프님 케이크한테 그런 기준을 적용하면 안 돼요.”
“양보하고 다시 만들어서 먹으면 되잖아.”
“구매하는데 개수 제한 있잖아요!”
“왜 예은 씨가 흥분하고 그래?”
“저도 저번에 진혁 쉐프님 케이크 사 갔다가 엄마 생일 파티할 때 싸움 날뻔했단 말이에요. 아빠가 엄마 케이크를 다 먹어버리려고 했어요.”
“그건 좀 그렇다.”
“진혁 쉐프는 그런 적 없어요?”
“어머니 생신 케이크라면 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시니까, 그럴 일은 없지.”
“아니, 그런 일 말고요. 알잖아요, 진혁 쉐프가 직접 만든 빵이나 케이크를 가져가면 사람들이 서로 먹으려고 다투는 거.”
진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자 예은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백진영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난 있어.”
“응?”
“처음에는 너무 맛있으니까 양보할 생각 따윈 없었거든. 그런데 진혁이가 만든 케이크랑 빵을 나누어 먹으니까 애인이 생기더라.”
“백진영 바리스타님 설마? 그 설마에요?!”
예은이 방방 뛰었다.
“가영 언니랑 진짜 사귀시는 거예요?!”
“어, 어? 가영 씨인 줄 어떻게 알았어?”
백진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예은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 언니가 전에 어떤 사람을 남자로 의식하게 되기 시작했다고 말했었어요. 자기라면 도저히 못 할, 엄청난 희생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 엄청난 희생이라.”
진혁 역시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가영 씨, 케이크 좋아하긴 하지. 누구한테 양보하는 걸 본 적이 없어.’
“그게 너무 고맙고 감동적이라 점점 더 눈여겨보게 된다고 했던 적이 있거든요.”
임진혁이 정리해주었다.
“봐. 진영이 형도 케이크를 포기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연애를 하게 됐다고. 우리 가게 빵이 커플 브레이커라니 누명이야, 누명.”
‘누명 아닌 것 같은데…….’
예은은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