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27화 (227/656)

제 227화

“공기로 떡을 만들다니…….”

정신없이 쿠키를 먹고 있던 수희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진짜로 우유로 만든 게 아니에요?”

“예.”

임진혁 쉐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여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김소월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 사람은 좋겠다. 저렇게 잘생기고 능력도 있으니까.’

여자친구도 있을 것이고, 연애 때문에 고민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김소월이 다시 탁자 위로 시선을 돌렸다.

“한수희, 너 지금 네 것은 다 먹고 내 쿠키까지 먹으려고 하는 거야?”

“이거 다 다른 맛이란 말이야.”

사과는커녕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는 수희의 입술에는 과자부스러기가 묻어있다.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모습이다.

“야. 네가 유치원생이냐?”

김소월이 어이가 없어 말했다.

“내가 돈 준다고 했잖아.”

“내 접시 위에 있잖아. 친구라고 그렇게 막 먹어도 되냐?”

접시를 보호하듯 끌어당기며 자기 앞으로 가져오는 김소월을 보고 수희가 미간을 찡그렸다.

“야, 김소월.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그녀가 고개를 들며 눈을 치켜떴다.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은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수희가 입을 여 열었다.

“너가 날 친구라고 생각하긴 해?”

“어?”

“신입생 MT 이후로 네가 내 전화랑 문자 다 씹었잖아.”

“그건…….”

명환 선배가 수희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얼쩡거리지 말아라’에 전화나 문자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얼쩡거리는 것에 속하는 건지 염려가 되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고민하며 망설이다보니 비참해지고 쭈그러들어서 그는 아예 수희를 연락처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처음에는 수희가 몇 차례 전화를 했었다. 문자가 오기도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연락을 완전히 씹었더니 5월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6월의 어느 날, 집 앞에 서 있는 수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잊지 않고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동시에 불안감과 두려움이 확 밀려들어왔다.

당시 김소월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 앞의 놀이터로 향했다.

커다란 엉덩이를 조그만 그네에 간신히 끼워 넣고 양손으로 녹슨 쇠사슬을 잡아 삐걱거리는 그네를 혼자서 탔다.

불과 작년만 해도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수학 학원을 마치고 나면 수희와 함께 여기서 그네를 타곤 했다.

비 오는 날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고 있으니 한없이 비참해졌다.

빗물과 함께 눈물이 섞여 흘러내려 젖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그때 명환 선배의 차가 보였다. 수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옆좌석에 타고 있었다.

지금 와서 그때 일을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복잡한 표정이 된 김소월에게 수희가 다그치듯 말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렇게 일방적으로 날 무시했어?”

김소월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묵묵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쿠키의 이름은 ‘답살(踏殺)’이다. 납작한 진저브레드맨 쿠키의 위에는 초콜릿 발자국이 빼곡하게 찍혀있었다. 크고 작은 발자국은 모양이 다 달랐다. 화이트 초콜릿 발자국과 다크 초콜릿 발자국, 밀크 초콜릿 발자국이 복잡하게 엉겨있다.

그리고 쿠키의 아래쪽에는 흘린 피처럼 퍼진 붉은 딸기잼이 담뿍 얼룩져있다.

‘이 답살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있긴 한지 모르겠어. 단어 자체도 처음 본다. 신문부에서 부장이 된 나는 어휘력이 풍부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고대 중국 같은 나라에서나 썼을 법한 괴상하고 잔인한 형벌이다. 실제 자신의 상황과 꽤 가깝다는 생각을 하며 김소월이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건 없어.”

‘남자를 고르는 눈이 없을 뿐이지.’

애초에 그에게 찾아와서 이야기한 사람은 명환 선배였으니까, 수희에게 확인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수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럼 네가 그때 우리 집 앞에 찾아온 게, 나한테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따지러 온 게 아니었어?”

“왜 날 무시하고 연락도 받지 않는지 물어보러 간 거였지!”

수희가 답답해하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깔끔한 프렌치 스타일 젤 네일 끝이 살짝 부러졌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네가 먼저 명환 선배한테 내가 귀찮게 달라붙어서 떼어내 달라고 했다며!”

수희가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떨어뜨렸다. 접시 위에 떨어진 쿠키는 부서지지도 않고 탱 하고 굴러가 김소월의 접시 위에 안착했다.

“내가 왜 명환 선배한테 그런 말을 해?”

정말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싶다. 김소월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애인 생겨서 바쁜데 귀찮게 한다며!”

“내가?!”

나라를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수희가 반문했다. 그때 김소월은 깨달았다.

‘명환 선배가 견제한 거구나.’

생각해보면 한수희는 좀 눈치가 없고 둔한 데가 있지만 악의가 있는 애는 아니었다.

그때는 왜 그것까지 생각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 그녀가 그런 말을 직접 했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명환 선배는 원래 애인 생기면 남자인 친구들이 알아서 거리를 두어 주는 게 진정한 우정이라고 했는데…….”

한수희가 과거를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네가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날 배려하고 있는 거니까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했거든.”

‘그걸 믿었냐?’

눈치가 없고 둔할 뿐만 아니라 멍청하다. 저 머리로 어떻게 대학교에 입학했는지 궁금할 정도다. 김소월이 고개를 저었다.

“널 무시한 건 미안해. 하지만 나한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이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신경쓰였다.

“우리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난 일어날래.”

수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쿠키랑 케이크는 내가 먹어도 돼?”

“…….”

소월은 억울했다. 이 특이한 쿠키 역시 마감 떡과 비슷한 식감이지만 맛을 꼭 보고 싶다. 분명히 맛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포장해 달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그는 갈등 끝에 말했다.

“야, 나 한 입만 줘.”

“안 돼.”

“치사하게 진짜! 먹을 거 가지고 그러냐!”

“네가 애초에 이유도 없이 날 씹었잖아!”

투닥거리는 두 사람 뒤에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키가 큰 근육질의 남자였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였냐, 한수희?!”

명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          ◈          ◈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예은은 아까부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추리닝을 입고 앉아 있는 여자와 평범한 남학생 두 사람이 점차 언성을 높이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임진혁 쉐프님, 쟤네들 어떡해요? 진작 내보내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젊은이들이 사랑싸움을 좀 할 수도 있지. 내버려 둬.”

“언성이 점점 더 높아지는데요.”

“칼이나 활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테이블 좀 치는 정도는 괜찮아. 이 테이블은 아주 튼튼한 걸로 골라서 저렇게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 두드리는 정도로는 금도 가지 않거든.”

‘쉐프님, 그런 의미가 아닌데요.’

주변에 있는 다른 손님들이 흘깃흘깃 보는 시선이 신경쓰인다.

하지만 임진혁 쉐프님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하자 신입 직원인 민제가 곤란해 하며 말했다.

“예은 선배님, 저 사람이 오면 안 좋을 것 같은데요?”

계산대를 전담하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예은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임진혁 쉐프님께 말씀드려줘. 좀 말려 달라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바로 어제 이 가게 앞에서 열렬한 사랑을 속삭이던 남녀다.

남자는 어제와 똑같은 패딩점퍼를 입고 있어 알아보기 쉬웠다. 여자는 메이크업도 하지 않고 모자에 추리닝을 입고 있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쉽게 알 수 있다.

“어제는 케이크 때문에 싸우더니 오늘은 다른 남자 때문에 싸우나 봐.”

“어머! 어머! 지금 때리려고 하는 거 아니야?!”

옆 테이블의 여대생들이 놀라 속삭였다. 180cm을 조금 넘는, 운동선수인 명환이 손을 올리고 막 수희의 뺨을 때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잡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민제가 가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임진혁은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손님, 가게 안에서 폭력은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야! 당신! 얘는 내 여자친구라고!”

“여기는 제 가게입니다.”

명환이 안간힘을 쓰며 눈앞의 제빵사를 밀어내려 했다.

‘뭐야. 이 요리사 왜 이렇게 힘이 세?’

하지만 상대는 밀려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오픈 키친에 서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의외로 키가 크다. 자신보다 키가 큰 다른 사람들은 농구부 외에서는 보기 어려웠는데 자기보다도 7,8cm는 더 큰 것 같아 보였다.

진혁이 전혀 겁먹지 않고 무감각하게 남자 앞에 서 있자 명환은 조금 두려워졌다. 그는 애써 큰 소리를 치며 움직이려 했다.

“지금 이년이 바람났는데!”

그는 짜증스럽게 소리치며 눈앞의 제빵사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일까?’

살의를 느낀 명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파들파들 떨면서 뒤로 물러나려 하는 것 같았으나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며 암모니아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으나 그는 느끼지 못했다.

진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사이 낯익은 기계음이 들렸다.

삐. 삐. 삐.

카운터에서 백진영이 119에 전화를 거는 중이다. 임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게 현대구나.’

객잔이나 주루에서 손님끼리 싸움이 벌어졌을 때 포쾌를 부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공권력이 있는 자들은 신뢰할만한 상대가 아니며, 피해야 할 자들이다. 무림인은 관리들과 거리를 둔다. 관가의 이들 역시 강호인들을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현대는 이런 일이 있을 때 다들 자유롭게 경찰에 신고한다.

“손님, 이분이 조금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은데요. 아는 사람인가요?”

진혁이 명환을 부축해서 옆에 앉혔다.

‘지금 명환 선배가 오줌을 지린 거야?’

김소월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명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주먹을 휘두르려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린 모습에는 어딘가 섬뜩한 부분이 있었다.

“욱. 냄새 나.”

직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바닥의 노오란 액체를 지웠다. 카운터에 있던 예은 역시 달려와 그 위에 소독약을 뿌렸다.

“죄송합니다, 손님들. 조그만 소란이 있었네요. 사죄의 뜻으로 저희가 테이블당 쿠키를 하나씩 더 드리겠습니다.”

“와아아아!”

다른 손님들은 기뻐하면서 박수를 쳤다.

‘이 선배가 미쳤나. 진짜 왜 이래?’

김소월은 명환을 부축해서 가게를 나섰다. 옆에서 한수희 역시 명환을 부축하는 것을 도왔다.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발걸음에 힘이 없다.

“으으으으.”

“수희야, 명환 선배네 연락처 알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