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6화
“예은 씨?”
진혁이 대답하자 예은이 말했다.
“우리 돼지 머리 케이크 다 떨어졌어요. 번호표는 90개 정도 더 나갔고요.”
“번호표 가져오시면 5시에 미니 케이크 하나씩 덤으로 드린다고 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망원대학교 신문부실.
부장 김소월이 노트에 메모를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즘은 기사가 될만한 게 없다니까. 다들 우울한 소식뿐이야. 뭔가 학생들이 즐거워할 만한 소식이 없을까?”
부부장인 안은명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 테러범 잡은 제빵사가 빵집 열었대.”
“그게 왜 학생들이 즐거워할 만한 소식이야?”
2학년인 신문기자 남학생이 끼어들었다.
“그 빵집 때문에 명환 선배랑 수희가 깨졌거든요. 지금 소문 다 돌고 있어요.”
“그 바퀴벌레 한 쌍이 깨질 리가 없지.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 금방 돌아올걸?”
“이번엔 좀 달라요. 어제 빵 때문에 싸우고 오늘은 학교도 따로 왔어요. 헤어지느니 어쩌느니 해도 이렇게 따로 온 적은 없잖아요. 밥도 따로 먹고 교양 시간에도 따로 앉았다더라고요.”
부장이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빵 때문에 헤어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
“헤어지려고 하면 이쑤시개 때문이라도 헤어질 수는 있지. 원래 콩깍지 썼던 게 벗겨지면 그렇잖아.”
2학년 남학생이 킬킬대며 말했다.
“명환이 선배가 수희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니 어쩌니 하면서 항상 동영상 찍어서 올리는 거 알죠?”
“그거 때문에 애들이 다 걔 싫어하잖아. 빨리 헤어지라고 난리지.”
“맞아요. 수희가 빵 먹고 명환이 선배 빵도 빼앗아 먹는 게 찍힌 동영상이 지금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각도를 보면 명환이 선배가 찍은 건 아닌데, 망원대 돼지녀라고 소문이 다 나버려서 수희는 빡쳤어요. 인스타에도 짤이 돌아다니는걸, 뭐.”
“뭐야, 대체 무슨 영상인데?”
복학생과 신입생 커플이었던 이명환과 한수희는 자타가 공인하는 망원대 커플이었다. 농구부의 주장과 치어리더 팀 리더 둘이서 만나 오랜 기간 연애를 해왔다. 신입생이 보여준 영상을 보고서 김소월이 고개를 흔들었다.
“수희가 이런 얼굴을 하는 걸 보니까 빵이 맛있기는 진짜 맛있나 보다. 나도 먹고 싶네.”
“그쵸? 우리 부비로 거기에 취재하러 가요.”
“취재는 무슨. 이걸 기삿거리로 쓸 순 없지. 그냥 가십이잖아.”
“그거 말고요! 커플을 헤어지게 하는 빵이요. 지금 수희랑 명환 선배만 헤어진 게 아니거든요. 영란 선배랑 주서 커플도 깨졌어요.”
“엥? 걔들은 또 왜?”
“사랑을 시험해 본답시고 그 빵을 먹고 서로 양보해 주기로 했는데요, 둘 다 양보를 안 하더래요. 그러다가 싸움이 나서…….”
“허, 참. 재밌긴 하네.”
“그쵸? 기사로 쓸만하죠?”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 ◈ ◈
하지만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신문부장 김소월은 그 빵집 앞에 섰다. <해와 달>이라는 간판 아래에 죽 늘어선 줄은 꽤 길었다.
‘손님이 꽤 많네. 애들이 소문냈나.’
교내 미인 중 탑 3안에 꼽히는 한수희는 무언가를 먹을 때 항상 예쁘게 보이는데 신경 쓴다. 쌍꺼풀을 살며시 내리깔며 어깨를 좁히며 입술을 조그맣게 벌렸다가 닫으며 오물오물한달까. 대학교에 와서는 멀어졌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소월과 수희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녀가 연애를 하면서 멀어졌지만, 수희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줄 서 있는 와중에 수희도 보였다.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풀메이크업을 하는 평소의 모습과 다르다. 후드티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모습은 고등학교 때 이후 처음 본다. 대학에서 수희를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그녀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 보였다. 김소월은 한수희의 옆에 가서 섰다.
“야.”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모습을 보니 이미 멀어진 친구라고 해도 맘이 좋지는 않다. 한수희가 작은 목소리로 톡 쏘아붙였다.
“너도 빵 때문에 차인 여자 구경하러 왔어?”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김소월은 순간적으로 모르는 척했다.
“그게 무슨 얘기야? 난 처음 들어.”
“모르면 됐어.”
한수희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두 분은 일행이신가요?”
길고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정장을 입은 젊은 여자가 두 사람을 반겼다. 명찰에는 예은이라고 쓰여 있다. 수희가 힐끔 김소월을 쳐다보았다. 소월이 말했다.
“네. 두 명이요.”
“테이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주문하시면 됩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어쩐지 몸이 붕 뜨며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소월은 기지개를 켰다. 찜질방에 들어가서 사우나를 하고 나서 기분 좋게 안온해지는 듯한 편안함이다.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가게인데도 페인트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진하지 않은 꽃향기가 가게 안에 은은히 감돌았다. 높은 천장에 드문드문 놓인 조명은 은은하게 주변을 비추었다.
“이 가게 느낌 좋다.”
“그렇지?”
풀 죽어 있던 수희가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나씩 하나씩 주의 깊게 먹을 것을 골랐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마감 떡, 그리고 초콜릿 오렌지 케이크하고 액사하고 의사, 그리고 익사 쿠키 하나 주세요.”
“액사랑 익사?”
케이크 가게에서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단어를 듣고 김소월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액사(扼死)는 남이 손으로 목을 졸라 죽는 것이며 의사(縊死)는 스스로 끈 등으로 목을 매서 죽는 것을 말한다. 익사(溺死)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일 터다.
‘죽음’ 시리즈의 쿠키들은 진저브레드맨 모양이었다. 이 쿠키들은 각자 다른 맛 잼으로 데코레이션이 되어 있었다.
“저는 딸기 크레이프 케이크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감사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아무거나 고르는데 수희가 옆에서 절박하게 김소월의 옆구리를 찔렀다.
“너 그것밖에 안 시킬 거면 내가 케이크 하나랑 쿠키 세 개 더 시킨다?”
“응? 그래.”
“마감 떡 하나 더하고, 다른 죽음 시리즈 쿠키 세 개도요.”
“알겠습니다, 고객님!”
예은이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건넸다. 김소월은 생각보다 높은 가격에 이맛살을 찡그렸고, 옆에서 수희가 속삭였다.
“내가 이따가 돈 줄게.”
나무 탁자 위에는 단정하게 흰 테이블보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는 불투명한 유리판이 올라가 있다. 예은이 바로 떡과 케이크, 쿠키를 가져왔다.
“제일 먼저 마감 떡부터 드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마감 떡은 평범한 인절미처럼 생겼다.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황톳빛 콩고물이 골고루 묻어 있다. 단정한 하얀 도자기 접시는 인절미보다 조금 더 컸는데, 이 떡을 위해 특별히 만든 것처럼 크기가 딱 맞았다.
“나도 이거 하나 먹는다.”
“…….”
수희는 이미 눈앞에 있는 케이크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소월은 젓가락으로 마감 떡을 집어 올리려 했다.
“……!”
그것은 떡이 아니었다. 떡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호기심이 생긴 김소월은 마감 떡을 반으로 갈라 보려고 했다. 옆에서 다른 테이블에 서빙을 하고 있던 예은이 웃으며 말했다.
“손님! 마감 떡은 잘라서 드시는 것보다 그냥 베어 무시는 편이 더 맛있어요. 저도 그렇게 먹거든요.”
“알겠습니다.”
‘무슨 놈의 떡이 먹는 방법도 따로 있담?’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다. 김소월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주변을 바라보려 눈을 굴렸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모태솔로 신문부 부장이 여자랑 같이 있네.”
“여자도 완전 쭈글하네.”
들을 가치가 전혀 없는, 가벼운 뒷이야기들이다. 수희가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김소월은 못 들은 척 마감 떡을 물었다.
사실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수희와 자연스럽게 멀어진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고등학생 때처럼 둘 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밥을 자주 먹거나 했다. 하지만 명환 선배가 수희와 만나기 시작했다. 수희 앞에서 선배는 쿨한 척을 했는데, 그는 김소월을 따로 불러내서 오해할만한 행동은 아예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당연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굳이 수희를 만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희는 충분히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냥 빵 쪼가리 따위에 헤어질 정도로 연애할 거면서, 그렇게 쓸데없이 견제하고 다녔는지 몰라.’
수희는 명환 선배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소월은 굳이 그걸 수희에게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떡이나 먹자.’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방금 전에 느꼈던 그 가벼움은 착각이 아니었다. 입안에서 바로 갈라진 떡은 가벼운 맛이 났다. 폭신폭신하고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이건 떡이 아니었다.
“이건…… 우유인가? 머랭을 아주 가볍게 친 건가? 살짝 달면서 부드럽고 가볍고.”
“맛있지?”
수희가 자신이 만든 양 잘난 척을 했다. 이미 자기 몫의 마감 떡은 다 먹어버린 그녀가 입가에 콩가루를 묻히고 말했다.
“진짜 행복해지는 맛이야.”
사실 그때 명환 선배는 소월에게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칠 것처럼 주먹을 들이댔고 실제로 거의 칠 뻔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그 공터로 오지 않았으면 정말로 쳤을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폭력보다 펜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눈앞의 단순한 폭력이 훨씬 더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수희를 보는 것조차도 불편하고 괴로웠으며 싫어졌다. 명환 선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피하는 거라며 자신을 속였다. 왜 그랬을까?
‘명환 선배가 싫었지만, 그것보다 난 나 자신이 더 싫었어.’
수희를 좋아했지만 고백하는 건 무서웠다. 괜히 고백했다가 편안한 친구 관계가 무너지는 것이 싫었다. 수희는 댄스 동아리 회장을 했고 자신은 도서부장으로, 클럽 활동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도서관에서 만나는 사이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설령 수희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더라도 자신은 계속 친구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김소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픈 키친에 서 있는 쉐프에게 다가갔다. 임진혁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쉐프는 영화배우처럼 잘생겼고 키도 컸다. 그는 잼 위에 쿠키를 올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기묘했다. 붉게 퍼진 잼 위에 조각난 진저브레드맨 쿠키가 떨어져 있는데, 아까 수희가 주문한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폭사 쿠키…….’
보통 생과일 모양을 살리거나 하트나 곰 인형 따위 귀여운 모양을 만들 텐데 특이하기는 하다.
“마감 떡은 우유로 만드신 건가요? 식감이 엄청 가볍더라고요.”
“공기입니다.”
“네? 공기요?”
“제가 브라이언이라는 요리사에게 배운 분자요리 기법인데, 물에 공기를 넣고 겉에 인절미 콩고물을 버무린 겁니다. 가볍고 플러피한 식감을 내려고 그렇게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