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24화 (224/656)

제 224화

“흥미로워 보이기는 합니다만.”

“진혁 쉐프님이라면 괜찮으실 겁니다.”

“시간이 될지 어떨지 지금 당장은 확신하기가 어렵군요. 사내이사님하고 의논해 보겠습니다.”

진혁이 말하던 도중이었다.

“6개월 후? 그 정도면 괜찮네!”

저쪽에서 삼촌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던 백진영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생각해 보시고 대답해 주시죠.”

정지숙이 웃으며 말했다.

“세계에서 제일 인정받는 대회예요. 임진혁 쉐프님이라면 충분히 실력을 발휘하실 수 있을 무대랍니다.”

“그래, 가게 홍보에도 도움이 될 거고.”

곧 트럭이 도착했다. 김가영은 트럭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상자를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백진영이 바로 달려가서 도왔다.

“가영 씨, 고마워! 이번에도 이렇게 챙겨주고.”

“당연히 와야죠. 한 식구인데요. 그나저나 제가 같이 올 걸, 그릇들이 오는 게 좀 더 늦었네요.”

가영은 두 가게에서 쓸 모든 도자기 접시와 컵을 하나하나 구워 가져왔다. 유약을 입히기 전에 금사를 사용해 그린 해와 달은 조그맣게 바닥을 장식하고 있어, 케이크나 빵을 올려놓으면 깔끔하게 가려진다. 빵을 먹으면 그릇 아래에 숨어있는 해 또는 달이 나타나는 구조다.

그녀가 자랑스러워하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오빠가 부탁하신 대로 만들었지요.”

가영의 맞은편에서 백진영이 상자를 맞들었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면서도 표정이 밝다. 원래 체력이 약하고 오래 서 있지 못하던 그는 진혁이 만든 빵을 꾸준히 먹어오면서 체력이 좋아졌다.

“역시 우리 가영이야. 잘했어.”

‘호칭이 바뀌었네.’

진혁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둘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싶다.

◈          ◈          ◈

마침내 그날 밤이 지나고 홍대점이 개업하는 날이다. 간판 위에 플랜카드를 걸기로 했는데 설치하는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다. 백진영이 시계를 세 번째 확인했다.

“설치하는 사람이 조금 늦는다네. 차라리 고사를 지금 지내는 게 좋을까? 음식들을 다 내놓았는데 위에 올라가서 간판을 달면 먼지가 날릴까 봐 걱정되는데 어쩌지?”

안절부절못하는 백진영을 보고 임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내가 하지, 뭐.”

“뭐?”

백진영이 말리기도 전에 진혁은 플랜카드와 테이프를 들고 사다리 위로 올라갔다. 평지를 걷는 것처럼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고 매처럼 날렵하게 움직인다. 서커스 단원이 허공에 걸린 줄 위를 걷는 것처럼 태연한 그 모습을 보며 백진영이 입을 벌렸다.

“너, 너. 그러다가 다친다!”

진혁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왼쪽으로 기울여 왼쪽 끝에 플랜카드를 고정했다. 곡예사가 능숙하게 기예를 펼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나 나와 본 진희가 소리를 질렀다.

“야! 임진혁 너 진짜 죽을래?! 당장 내려와라. 이거 동영상으로 찍어서 엄마아빠한테 보낸다?!”

“괜찮아, 이제 다 했어.”

보통 사람이라면 내려와서 사다리를 한쪽으로 옮긴 다음에 플랜카드의 다른 쪽 면을 고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가운데에 선 채 팔과 다리를 쭉 뻗으며 오른쪽으로 몸을 한껏 펴냈다. 그는 발레리노가 발레를 하는 것처럼 발끝으로 서서 균형을 잃지 않은 채 테이프를 붙이고 내려왔다. 임진희가 어머니처럼 진혁의 등을 철썩하고 내리치려 뻗었다. 진혁은 잽싸게 옆으로 몸을 돌려 피했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맞아주는 것도 힘들어.’

진혁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무슨 방탄조끼라도 입었어? 등 근육이 왜 이렇게 단단해!”

호신강기를 풀었는데도 진희는 오른손이 아프다며 잡고 방방 뛰었다.

“그러게 왜 사람을 치고 그래.”

분명히 손을 올릴 때마다 아파서 팔짝팔짝 뛰면서도 학습 능력 없이 같은 일을 반복한다. 진혁이 피식 웃자 진희가 성을 냈다.

“그러다가 떨어지면 진짜로 크게 다쳤을 거라고!”

“맞아. 이번에는 네가 잘못했다.”

백진영이 거들었다. 진희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백진영이 진희에게도 말했다.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진희 씨.”

진희는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온 인부가 허리를 숙이며 미안해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데이. 근디 초보자가 함부로 건들면 그게 더 잘못되기가 쉬우니 내 다시 살펴볼랑게.”

옆에 서 있던 임진희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목숨 걸고 제대로 설치해 놨으니까 한번 보세요!”

인부는 눈을 치켜뜨더니 사다리를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사다리를 밟는다.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온 인부가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며 반대쪽 역시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 확인을 마쳤다.

“아주 잘했그먼요, 그래. 이리 잘 허눈 사람이 있는데 왜 불렀당게. 허, 참!”

그는 투덜거리면서 인사도 하지 않고 가 버렸다.

“저 사람은 뭐야? 늦게 왔으면서.”

진희가 투덜거리자 백진영이 말했다.

“그래도 돈 안 받고 가셨잖아. 이렇게 시간 단위로 일하시는 분인데 하루 공치니까 속상하신 거지.”

진혁은 이미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고사를 지내기 위해서 미리 구워놓은 케이크를 하나씩 하나씩 내왔다. 하얀 종이를 덮어씌운 테이블 위에 제일 먼저 놓인 것은 사람 머리통 세 개를 합쳐놓은 것처럼 거대한 크기의 돼지머리였다.

“이렇게 큰 돼지머리는 어디서 구한 거예요?”

“만 원짜리도 아니고, 수표를 입에 물려놔야 할 것처럼 생겼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했다. 진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진짜가 아닙니다.”

“그럼 뭐에요? 여기 귀에도 주름이 있고, 진짜 같은데? 이빨이랑 혀까지, 참.”

길을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혀를 찼다.

“요즘 시대가 어떤 땐데 이런 걸 하는지, 참 잔인하지 않아?”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 역시 거들었다.

“사람들이 어쩌면 저렇게 무식한지 모르겠어.”

‘잘 속고 있군.’

진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음식들을 내왔다. 정갈하게 깎은 꼭지 없는 배와 사과, 그리고 생선구이처럼 보이는 케이크들이었다. 배는 바닐라 파운드 케이크에 퐁당을 씌워서 점을 찍었고, 사과는 애플 파운드 케이크 겉에 붉은 초콜릿을 발랐다. 멀리서 언뜻 보면 과일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누구나 진짜 과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이 좋지 않은 자들이 착각해서 뭐라고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 따위에 일희일비하기에는 강호 경험이 지나치게 풍부한 게다. 진혁은 북어 모양의 소고기 육포를 멋지게 늘어놓는 데에 더 신경을 썼다.

‘육포는 이번에 처음 만들어봤는데 꽤 잘 나왔단 말이지.’

처음에는 빵을 만들 때 직접적으로 쓸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만들어 보고 맛을 보니 꽤 괜찮았다. 의외로 몇몇 빵들과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제일 먼저 생각난 건 씹는 맛의 차이를 이용해 소시지에 둘둘 감아서 핫도그를 만드는 정도였다.

진혁이 새로운 메뉴를 잠깐 구상하는 동안, 옆에 서 있던 진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잠깐만요, 거기 손님.”

그녀는 빙글빙글 미소지으며 말했다.

“예? 여기 손님 아닌데요.”

남녀 커플이 똑같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진희가 꽃처럼 활짝 웃었다.

“오해하셨어요. 이거 케이크에요.”

“네?”

“이게 케이크라고요?”

여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자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안 되지. 이게 어떻게 케이크에요. 저기 껍질에 흠집 난 거랑 귀 찢어진 거 봐요. 딱 돼지머리구먼.”

“저희가 바로 고사 지내고 케이크 잘라서 나눠드릴 거니까 그때 확인하세요. 임진혁 쉐프님 아시죠? 디지털 서바이벌 쇼에 나오는.”

침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열 받아 있었는지 엉뚱한 소리를 한다. 옆에서 예은이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디지털 서바이벌 쇼가 아니라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요, 언니.”

“어쨌든.”

“거기 나온 쉐프님이요?! 진짜요? 고사 언제 지내시는데요?”

“한 시간 안에 끝나요.”

진희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다른 손님들도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무슨 케이크에요? 초콜릿 케이크?”

“이상한 모양을 맛있게 만들기로 유명한 그 쉐프 말이야?”

“오빠. 이거 우리 근처에서 기다려 보자. 진짜 케이크인지 궁금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고사를 빨리 지내자.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있네.”

줄줄이 늘어놓은 음식들 앞에서 마음을 다해 절을 한다. 임진혁과 백진영이 차례대로 간단하게 절을 하는 사이에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들었다.

거대한 돼지머리가 케이크고 금방 나눠줄 거라고 알려지자 호기심이 생긴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돼지머리가 과일 생크림 케이크라며?”

“공짜에요?”

“언제부터 나눠줘요?”

“이 사과랑 배, 그리고 한과도 전부 디저트입니다.”

“임진혁 쉐프님!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부터 팬이에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자 강남점에서 풍부하게 경험을 쌓은 예은이 앞에 나섰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오픈한 가게 <해와 달> 홍대점이에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줄을 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바로 가게 안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주문 안 돼요?”

“영업은 오늘 오후 5시부터입니다. 내일부터는 오전 10시부터 엽니다.”

고사를 후딱 치른 후 진혁이 바로 칼을 들었다. 빵칼을 들어 돼지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놓는 데 전혀 힘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진혁을 찍기 시작했다.

“거대 돼지머리 절단 현장! 이 얼마나 잔인한가!”

아까 짜증 내던 커플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사설을 넣었다.

“안쪽에 드러나는 것은 새하얀 케이크 속살! 그리고 층층이 들어가 있는 하얀 크림 레이어하고 숭덩숭덩 큼직하게 썰어 들어가 있는 과일! 진짜 과일 생크림 케이크 맞네요!”

남자가 신나서 해설하며 동영상을 찍는 동안 커플의 여자 쪽이 사과했다.

“죄송해요, 오해해서.”

그녀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사실 제가 반려동물로 미니돼지를 키우고 있거든요. 커다란 돼지머리가 놓여있는 걸 보니까 저희 집 미미가 생각나서 엉뚱한 데 짜증을 부렸어요. 케이크인지는 꿈에도 몰랐지 뭐에요. 너무 잘 만드셔서.”

“어머. 저도 고향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요. 그러시면 그럴 수도 있겠다.”

진희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자, 진혁이 끼어들었다.

“잘 만들었는지 어땠는지는 일단 맛부터 보고 말씀하시죠.”

진혁이 웃으며 종이컵에 담은 돼지머리 케이크 조각을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케이크를 입에 넣는 동안 계속해서 동영상을 계속 촬영하고 있었다.

“어디, 무슨 맛이야?”

그녀는 연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초점 없이 몽롱해진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남자가 당황해서 물었다.

“야, 너 어디 아파?!”

“흐으으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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