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3화
귀국하는 길에는 어설픈 비행기 테러범 따위는 없었다. 수월하게 공항에 도착한 진혁은 공항 입구 앞에 서 있던 가족들을 만났다.
“이 녀석아! 걱정했잖아.”
몇 시간을 기다렸는지 지쳐있던 아버지가 진혁을 반겼다.
“몸 상한 데는 없고?”
어머니 역시 근심을 가득 안은 표정이었는데, 멀쩡하게 서 있는 진혁을 보고 안심했는지 표정이 좀 펴졌다.
“괜찮습니다. 별일 없었다니까요.”
“그게 큰일이지! 테러범이 있어서 무슨 일이 생겼을지 어떻게 알고!”
아버지가 언성을 높였다. 진혁이 다급하게 진희에게 눈짓했다. 진희가 씩 웃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우승 축하해, 진혁아!”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얼굴에 도화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미소가 번졌다. 입술 꼬리가 올라가고 눈썹이 올라가며 이가 드러난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우승 축하한다, 우리 아들.”
어머니 역시 조금 전까지 무거웠던 마음을 내려놓고 진혁을 반겼다.
“아주 잘했어.”
어머니 역시 칭찬하며 진혁을 껴안았다. 진희는 뒤쪽에서 어머니에게 보이지 않게 진혁을 걷어차려고 했다.
‘달팽이가 기어오는 것만큼이나 느리군.’
너무 느려서 맞아주기도 어렵다. 진혁은 무심코 피했다가 다시 발을 움직여 진희의 발이 닿을 공간에 발을 밀어 넣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정강이 근육을 걷어찬 진희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녀는 양손으로 자기 발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아파, 아파!”
“진희야, 왜 그래? 어디 찧었어?”
“아…… 아니요…….”
진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혁이 혀를 찼다.
“좀 조심하지 그랬어.”
◈ ◈ ◈
대회가 끝난 지도 3개월이 지났다.
드디어 온갖 법률적 절차가 끝나고 리모델링도 완전히 마쳐, 정식으로 H & J 베이커리의 간판이 바뀌는 날이다. 인부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간판을 바꾸어 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진영이 새로 달린 간판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빵집 이름이 <해와 달>이라니, 조금 고풍스러운 것 같기도 해. 너하고 잘 어울린다.”
“한자를 사용해서 일월이라고 하는 건 형이 반대했잖아.”
진혁이 투덜거리자 백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한눈에 알기 쉬운 게 좋으니까.”
조그마한 해와 달 마크는 단골손님이 디자인해 주었다. 파리의 미대 출신인 손님은 디자인을 해주면서 오히려 영광이라며 기뻐했다. 새로 올라간 간판을 보면서 서 있던 두 사람에게 유키코가 다가갔다.
“진혁 대표이사님 오셨어요?”
“유키코 지점장님.”
“으악,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진혁이 떠나면 강남 본점의 점장을 맡을 유키코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결국 ‘쿠키 하우스 살인사건 시리즈’의 마지막 버전은 홍대점에서 볼 수 있겠네요.”
“예.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았으니까요.”
“이번엔 어떤 죽음이 나올지 손님들이 내기하고 있어요. 정숙 씨는 폭사가 나오지 않을까 하던데요?”
“폭사요?”
“시한폭탄이 폭발해서 박살 난 진저브레드맨 조각이 뿌려져 있는 거죠.”
예은이 옆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진혁 쉐프님이 너무 잔인한 소재를 가져오지 않았나 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저희 가게의 특색있는 상품이 됐어요. 저는 익사가 제일 좋았어요.”
오랜만에 가게를 방문한 김가영이 아는 척을 했다.
“아! 투명한 스트로베리 젤리 안에 들어있던 초콜릿 말이죠. 진짜 맛있었는데. 진혁 쉐프님, 그거 또 만드실 생각은 없어요?”
“따로 주문한다면.”
“아싸! 그럼 나중에 주문서 제출할게요. 저희 사부님이 아주 좋아하실 것 같아요.”
진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알지? 쿠키 하우스 시리즈는 리미티드 에디션인 거.”
“네! 다른 손님들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않을게요.”
가영이 신나서 말했다. 옆에서 백진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그래도 드디어 해와 달 간판도 달았잖아.”
“다음 주에는 홍대 본점도 오픈하고.”
진혁이 거들었다. 백진영은 뒤쪽에 다가온 사람을 보고서 반갑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삼촌. 삼촌 덕분이에요.”
임진혁 역시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백정흠 회장님.”
“허허, 참! 의삼촌이라고 부르라니까.”
백정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혁은 이 사업가를 마음속으로 평가했다.
‘아버지가 친구를 할만한 사람이야.’
오늘이 오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초기에 백정흠은 임진혁이 백진영과 함께 다른 가게로 가는 것을 열렬히 반대했다. 그때 백진영은 삼촌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놓아 보내기 싫어한다고 오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백정흠의 진심이 아니었다.
“계약을 파기하는 건 괜찮다. 너희들이 터전을 옮기려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여태까지 쌓아온 걸 버리고 갈 필요는 없다. 내가 무슨 사기꾼도 아니고, 너희들을 등쳐먹겠니?”
진심 어린 설득 끝에 세 사람은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진혁과 백진영이 오픈하려는 가게와 구 H & J 베이커리 앤 카페를 각자 홍대 본점과 강남 본점으로 하여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오픈하기로 한 것이다. 백정흠은 백진영에게 가게를 그냥 주려 했으나 진영은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대신 어린 시절 양도받아 소유하고 있던 오피스텔 절반의 권리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베이커리 앤 카페의 권리를 양도받기로 했다. 가게 월세도 없이 완전히 백진영의 소유가 된 것이다.
새롭게 홍대에 오픈하는 지점은 전액 진혁이 자신의 돈을 들여 구입했다. 미국에서 제작하고 있는 밀키트 덕분에 추가로 받은 인센티브로 충분했다. 아버지나 어머니도 돈을 내고 싶어 했지만, 진혁이 거절했다.
백정흠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신 우리 화웅제과제빵기계공업의 오븐 홍보나 많이 해달라고.”
“당연하죠. 홍대점에 들여놓을 오븐도 이미 다 주문했잖습니까.”
“하하! 당연하지. 제일 좋은 기계로 보낼 거야. 맡겨만 달라고.”
“임진혁 대표이사님은 기계 욕심은 없으니까. 삼촌이 많이 팔고 싶어도 얘가 잘 안 살 걸요.”
“진영이 형! 형이 그렇게 부르니까 이상해.”
“흐흐. 나는 사내이사님이라고 불러달라니까.”
“…….”
동업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대표를 누가 맡을 것인지를 가지고서도 여러 차례 관건이었다. 진혁은 나이가 많은 백진영에게 대표이사 직위에 취임하라고 종용하였으나 그는 여러 차례 단호하게 거절했다.
“네 빵집이지 내 빵집이냐?”
결국 백진영이 극구 양보한 끝에 진혁이 프랜차이즈의 대표이사 겸 헤드 쉐프, 메뉴 개발을 맡았다. 백진영은 그 밖의 다른 일들과 헤드 바리스타, 음료 개발을 맡았다.
사실은 지점이 3개가 될 뻔했다. 어머니가 소망 베이커리의 간판 역시 진혁이의 가게와 같은 이름으로 바꾸어 다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낸 것이다. 진혁은 임운정의 뜻을 짐작해 그것을 반대했다. 소망 베이커리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경영해 온 빵집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그대로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맛있는 빵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 목적으로, 진혁이 원하는 ‘프리미엄 빵의 판매’와는 대상이 다르다.
축하하러 와 있던 진희는 홍대점 오픈을 알리는 브로셔를 넘겨보며 투덜거렸다.
“진짜 예쁘다. 그 손님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소개해 주셨다며?”
“정숙 씨라고, 자주 오시던 분이 있어.”
“그분이 가게 마크도 디자인해주셨다며. 우리 가게도 그분한테 처음부터 맡겼으면 좋았을 텐데.”
세련되고 멋진 인테리어를 부러워하는 진희를 보며 진혁이 씩 웃었다.
“네 가게를 차릴 때 이분에게 맡기자.”
“엄마랑 아빠 일도 도와야 하고. 아직 내 실력도 너무 부족하잖아. 그런데 내가 언제 빵집을 열 수 있겠어.”
진혁은 사실 이미 진희가 가게를 차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따로 떼어놓았다. 하지만 아직 진희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가 보았을 때 가게를 열어서 책임질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때 열어줄 생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진희가 밝게 말했다.
“지금 교대로 일하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내가 가게 하나를 통째로 책임지면 또 얼마나 빡세겠어.”
“그래도 일하는 만큼 벌잖아?”
“그러니까 이만큼이라도 일하지.”
자연스럽게 나뭇결을 드러내고 흰색으로 마무리해서 깔끔한 가게 사진을 보며 진희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이런 건 정말로 프로페셔널한테 맡겨야 해. 넌 센스가 없잖아. 생일 선물로 말린 대추하고 건포도 따위를 사 오는 애한테 뭘 바라겠어?”
벌써 몇 달 전, 진혁이 중국여행을 다녀왔을 때의 일인데 아직도 우려먹는다.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서 제일 좋은 대추였다니까. 생기(生氣)가 풍부해 약으로도 쓰는 물건이야. 한국은 이미 토지부터 기가 좋지 않아서 구하기도 어렵다니까?”
“…… 그 좋은 공항 면세점을 두고 거기에 가서 시장에서 건포도를 사 오냐고…….”
“알았어, 알았어. 다음에 해외에 나갈 일이 있으면 면세점에서 사다 줄게.”
“네가 해외에 나갈 일이 또 언제 있겠냐?”
진희가 입을 삐죽거렸다.
“새로 가게 오픈해서 엄청나게 바쁠 텐데.”
◈ ◈ ◈
꽃다발을 든 중년 여성과 함께,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백인 남자가 다가왔다. 진혁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젤로스 사의 랑비에 씨. 정지숙 님.”
프랑스산 밀가루를 직수입하는 거래처의 담당자와 가게 마크까지 디자인해준 단골이다. 랑비에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마닙니다! 임지뇽 파티쉐.”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는 이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졌다. 정지숙 역시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새 간판이 참 예쁘네요. 누가 디자인했는지, 호호.”
옆에 서 있던 진희가 고개를 숙여 함께 인사하자 랑비에가 아는 척을 했다.
“아름다우신 숙녀분, 지뇽 쉐프님과 많이 닮으셨네요.”
“쌍둥이예요.”
“오오오! 가족 모두가 멋지십니다.”
가벼운 잡담을 나눈 후 랑비에가 진지하게 말했다.
“프랑스의 드 뺑 마드몽을 아십니까?”
처음 듣는 단어에 진혁이 눈을 껌뻑이며 서 있는데 김은동이 화들짝 놀라며 끼어들었다.
“당연히 알죠! 제빵 월드컵이잖아요. 매년 세계 각국의 제빵사들이 파리에 모여 경연을 하잖아요.”
“올해는 프랑스의 대통령도 심사를 한다고 합니다.”
“네. 그런데요?”
“저희 랑비에 사에서 이번에 출전팀을 지원하고자 하는데, 임진혁 쉐프님을 출전 후보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대회라…….”
“연습에 필요한 밀가루와 체류비 등은 전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사실은 이미 선정한 팀원이 있는데, 그분이 임진혁 쉐프님이 팀원으로 오는 것을 강력하게 원하시더라고요.”
“브라이언일 리는 없고.”
그는 임진혁이 거절한 대신에 아드레아노 존부 아래에서 인턴십을 하는 중이다. 이미 디자인적 감각이 뛰어난 신메뉴를 여러 개 내놓아 디저트 팩토리에 올리고 있다.
“참석하신다고 하면 6개월 후에 출전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팀원들과 맞추어 준비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