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9화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여기까지 오실 거였으면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 미리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네 아버지가 말려서…….”
“서프라이즈 파티니까! 깜짝 놀란 만큼 더 즐겁다고.”
진혁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소망시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멀고 위험하니까요. 언제 사고가 나거나 흉악범이 달려들지도 모른다고요.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제가 데리러 갔을 텐데.”
진희가 그 말을 듣고서 어이없다는 듯이 받아쳤다.
“그럴 리가 있어? 아빠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알아서 서울에 잘 왔다 갔다 했다고.”
“하하하! 진혁이 더 걱정이 많다니까.”
아버지 역시 농담으로 받아넘기며 웃었다.
“요즘 치안이 좋지 않습니다.”
가족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유키코가 블루베리 크림치즈 케이크에 초를 하나씩 꽂았다. 알록달록하고 길쭉한 초에 조그마한 불꽃이 하나씩 타올랐다.
“주인공! 이쪽으로 오세요!”
진혁이 발걸음을 옮겨 케이크 앞에 섰다. 백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진희 씨도 이리로 와야죠.”
“어, 그래도 오늘은 진혁이를 축하하는 날인데…….”
“쌍둥이잖아요.”
“그래. 같이 하렴.”
예은이의 낭랑한 목소리, 은동이의 수줍은 목소리만이 아니다. 우렁차게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리처드 베이커에, 작은 목소리로 축하노래를 부르는 유키코에, 어깨를 들썩거리며 크게 손뼉 치는 서창덕까지 함께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진혁이와 진희-”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후우-.”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노래가 진혁과 진희,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초를 불었다. 초들은 한꺼번에 꺼져 희미한 흰 연기를 뿜어냈다.
한순간 불 없이 사위가 어두워졌다.
진희가 임진혁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찍었다.
“진혁아, 무슨 소원 빌었어?”
“그건…….”
“야, 야. 그걸 말하면 안 되지! 입 밖으로 내면 안 이루어진대.”
진혁은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진희가 킥킥 웃었다.
◈ ◈ ◈
‘생각해보면 내 생일만이 아니라 진희 생일이기도 한데, 무심했어.’
인천에서 북경까지 비행기로는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임진혁은 허리에 안전벨트를 차고 비행기 좌석에 몸을 기댔다. 북경-베이징에서 우루무치까지 비행기로 간다면 3시간 30분가량 걸린다. 북경행 비행편과 달리 우루무치 직항선은 그리 많지 않아 한 번 놓치면 하루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백진영이 여러 번 걱정했으나 환승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자체에서 간체자로 간략화된 한자는 거의 읽을 수 없었지만, 알파벳으로 표기된 한어 병기 발음의 도움을 받았다.
처음에 탔던 거대한 비행기와는 달리 두 번째로 탄 비행기는 작았다. 기껏해야 70여 명 정도 탈 수 있을 법한 자그마한 비행기였다.
‘태양에 더 가까워서 그런지 축기(畜氣) 하기가 더 쉽군.’
공기가 희박하고 차가운 창공이라고 해서 기가 더 희박하지는 않다. 오히려 오염된 대도시보다 낫다. 진혁은 편안한 마음으로 운기조식을 하며 쾌적한 시간을 보냈다.
“후보지는 여기와 이곳, 그리고 이쪽 세 군데 정도인가?”
비행 중 그는 백진영이 출력해 준 지도를 들여다보며 자신이 살았던 산이 어딘지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봉우리 세 개는 모두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세 군데만 확인해도 사흘이 모자랄 수 있다.
‘시간이 일주일 정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촬영이 마무리되자마자 비자를 발급받고 바로 떠나는 데 사흘이 걸렸다. 백진영과 가족들은 결승전 생방송을 같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결승전 영상을 보는 것보다 중국에 다녀오는 것을 선택하자 특히 백진영이 안타까워했다. 결승에서 탈락해서 상심해 중국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진혁은 그들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내막을 밝히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 촬영분이 방영되면 모두 풀릴 오해다.
촬영이 끝나고서는 바빴다.
인턴십은 브라이언에게 양보했고, 새 촬영 제안을 받았다. 한국 내의 윈도우 베이커리들을 돌아보며 빵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투어다. 진혁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해야지.’
그는 나름대로 생각해둔 것이 있었기에 당장은 또다시 ‘스케줄’이라는 것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 중국식 치파오를 입은 여성 승무원이 다가와 간식 봉지를 건네주고 플라스틱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진혁이 짧게 말했다. 승무원이 미소짓고 다시 다음 손님에게 간식 봉지를 건넸다. 초록색 비닐봉지를 열자 안에서 양념 가루를 뿌린 볶은 땅콩이 나왔다.
“음.”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짭짤하고 간이 세다. 우습게도 오히려 이 맛이 조금 더 익숙하다. 땅콩을 씹다 보니 순간적으로 뒤에서 살기가 확 치솟아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
진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기감을 퍼뜨렸다. 복면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방금 진혁에게 땅콩을 준 승무원을 협박하며, 그녀에게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날붙이를 목에 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두려운 냄새를 풍기며 바들바들 떨었다.
‘기껏해야 삼류 무인이나 되려나?’
앞쪽에 있는 승무원은 아직 뒤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진혁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땅콩 봉지를 떨어뜨렸다.
“엿차.”
살기라고는 없이 태연한 동작이다. 실제로 그는 저 남자에게 살의를 느끼지는 않았다.
‘죽일까, 말까.’
바퀴벌레나 모기를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지 번거로울 뿐이다. 기껏 돈 주고 산 비행기 티켓이 쓰레기가 되어 버리면 귀찮다. 저 녀석이 지금 하려는 대로 비행기를 납치해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거나 하면 사흘의 휴가가 부족해질지도 모른다.
진혁은 괴한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땅콩을 튕겼다.
이전에 배워두었던 탄지(彈指)공을 응용한 잡기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허공을 격발해 나아간 땅콩은 날붙이를 들고 있는 복면범의 팔꿈치 아래께를 정확히 맞추었다. 수삼리혈(手三里穴)은 팔꿈치가 굽어지는 곡지혈 바로 아래에 있는 혈로, 엄지손가락에 이어지는 신경이 연결되어 있어 손을 위축시키는 급소다.
「으아아아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렸다. 떨어진 칼은 그대로 괴한의 발등을 찍었다. 승무원은 그대로 남자를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코드 7, 긴급상황입니다!」
곧 비명은 수십 개로 늘어났다. 발등에서 피를 뿜으며 비명을 지르는 남자와 도망치는 여자를 본 승객들이 일제히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대저 비명이란 타인에게 상황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나 이곳은 대략 10km 상공이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쇳덩이 밀실 안이다. 도움도 되지 않고 시끄럽기만 하다.
앞쪽에 있던 승무원이 조종실에 상황을 전했는지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승객분들은 침착하게 지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방송을 하는 조종사 역시 그리 침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발등에 칼이 꽂힌 괴한이 누워서 발등을 붙잡고 바닥에서 신음하였다. 진혁은 그 아마추어 같은 행태에 눈살을 절로 찌푸렸다.
‘고작 발등 좀 찍혔다고 엄살은.’
암천대는커녕, 광폭대라도 저런 놈이 있었다면 당장 대주가 직접 목을 잘라 버렸을 것이다. 삼류 무인보다 민간인에 가깝다. 점혈 되어 마비된 한쪽 팔을 떨구고 한쪽 손만으로 발을 감싼 괴한은 애처롭게 신음을 흘렸다. 진혁은 범인의 무능함에 쯧쯧 혀를 찼다.
뒤늦게 두 번째 복면한 괴한이 튀어나왔다. 그는 앞서 복면한 괴한이 흘리던 살기조차 뿌리지 못하는, 나약해 보이는 자였다. 그는 승무원을 협박하기보다 쓰러진 괴한을 응급처치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내 형이 죽으면 내 너희들을 가만둘 줄 알아?! 여기 의사 없어!!」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협박하는 말을 잊지 않는 것이 아주 다급해 보였다.
‘굉장히 어설퍼 보이는 놈들이네.’
자리에 앉아 있는 고객들이 숨죽여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게 귀를 때리던 비명들은 어느샌가 멎은 후였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 정체를 숨기고 있으려고 했던 진혁은 이 ‘조금 귀찮지만 재밌어 보이는 일’이 ‘아주 귀찮은 일’이 되기 전에 행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 정도 하면 알아서 제압해줄 줄 알았더니.’
그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쪽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진혁의 옷자락을 잡아끌려 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만용을 부리는 젊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뻗은 순간 이미 진혁은 그 자리에 없었다.
덩치가 작지 않은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눈에 확 띄었다. 쓰러진 괴한의 발목에 찢은 옷을 둘둘 감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진혁을 바라보았다.
「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중국어로 하는 협박을 이해하지 못한 척 진혁이 웃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뒷목을 가볍게 내리쳤다.
‘죽지 않을 정도로 살살.’
이 현대에서 68여 명의 목격자가 보는 동안 살인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정도의 경각심은 있다. 진혁은 현대의 문명 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한 자신을 돌이켜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
급소를 가격당한 남자는 끈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널브러졌다.
◈ ◈ ◈
비행기는 무사히 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내리자 춥고 메마른 공기가 확 끼쳐왔다. 그래도 서울보다는 더 따뜻하다. 대략 영하 5도 정도 되는 날씨였다. 진혁은 지나가는 이들의 옷차림을 눈여겨보고서 겨울 코트를 팔에 꿰었다.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나온 진혁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자네같이 용기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네. 나에게 꼭 연락을 해주게나.」
『당신은 나와 내 아들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진혁의 옆자리에 앉았던 할머니 역시 진혁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했다.
「젊은 청년이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건 아닌가 했는데,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고맙네.」
마지막에 나선 사람은 아까 땅콩을 주었던 승무원이었다. 멍든 손목과 목에 붕대를 감은 그녀가 정중하게 진혁에게 허리를 굽혔다.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선생님?」
진혁이 H & J 빵집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건네주었다.
「항공사에서 반드시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합니다.」
「저도 일정이 있어서요.」
「공안에서 사정 청취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
진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저도 시간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급하게 갈 데가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