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18화 (218/656)

제 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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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은 촬영을 마치고 최종 인터뷰까지 하고 나오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혁아. 고생했다.

아버지가 보낸 짧은 문자를 본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승리에 대한 집착이나 격려가 아니라, 여태까지 한 수고에 대해서 염려하는 모습이 아버지답다. 진희와 어머니, 그리고 일봉이 역시 기나긴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진혁은 거래처에서 보낸 축하 메시지들은 뒤로하고 H & J의 동료들이 보내온 연락을 먼저 체크했다.

-고생 많았어. 오늘 저녁에 촬영 끝나고 가게에 들르는 것 잊지 않았지? 김가영 씨 환송회 있잖아.

발신자는 백진영이다. 진혁은 방송국 문 앞을 나서며 문자와 함께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서 피식 웃었다.

“뭐야, 진영이 형. 여기까지 데리러 온 거야?”

“네가 문자를 못 보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

촬영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 피곤할까 봐 데리러 온 것이 분명한데, 엉뚱한 핑계를 댄다. 진혁이 킥킥거렸다.

“그래. 내가 문자를 확인하지 않을 수도 있지.”

태연하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진영이 물었다.

“안 피곤해?”

“이 정도로는 그다지…….”

그 뒤에 브라이언 신이 나오고 있었다. 눈 밑에 그늘이 지고 퀭한 얼굴에 어깨도 추욱 늘어뜨린 모습이다.

“임진혁 쉐프 체력이야 강철 같죠. 페이스트리 쉐프에게 있어서 최고의 자질이라고나 할까요.”

“아, 브라이언 쉐프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쪽은 백진영 바리스타님입니다. 저번에 가게 잠깐 들를 때 보셨죠?”

“예.”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 진혁은 백진영이 몰고 온 차에 탔다. 브라이언 역시 기다리고 있던 양부모와 함께 합류했다. 차창 너머로 그 모습을 보는 진혁에게 백진영이 말했다.

“저기는 부모님이 와 계시네.”

“…….”

진혁이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에서 아들 보러 온 부모님들이시니 어디 갈 데도 없이 거기 와 계신 거겠지.’

그 얼굴을 본 백진영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부러워할 필요 없다. 사실은 지금 내가 여기 와 있는 거, 네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거야. 네가 오늘 피곤할 테니까 데리러 가 달라고.”

“어?”

“아버지께서 널 많이 생각하신다고.”

“그, 그래. 고마워.”

진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일 밤늦은 시간이라 도로에 차는 많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 촬영 마지막 날이니 마지막 뒤풀이라도 할 법한데 안 한대?”

“다음 주에 최종 방영이 끝난 다음에 다 같이 하기로 했어. 오늘 저녁에는 너무 늦게 끝나서 스태프들이 다음날 촬영 때문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하더라.”

“그쪽도 우리 못지않게 바쁜 직업이네.”

진혁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백진영을 흘깃 바라보았다. 진영 역시 승패의 결과가 궁금할 텐데, 그는 누가 우승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저런 면을 보면 은근히 어른스러운 점도 있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만 오면 시작한다.”

“가영 씨가 드디어 가는구나. 거의 한 달은 고민한 것 같던데.”

“네가 어떻게 알아?”

진혁이 입을 다물었다. 사무실에서 백진영과 김가영이 속닥이는 소리를 전부 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가영 씨한테 직접 들었나 보네. 네게도 고민을 털어놓았구나.”

스스로 납득한 백진영이 뺨을 살짝 붉힌 채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내가 한 걸음 나설 수 있게 등을 떠밀어 줬어.”

“오. 어떻게?”

“가영 씨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했지.”

운전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백진영은 시선을 눈앞의 도로에 고정시키며 웃었다.

“다 네 덕분이야.”

“음?”

‘내가 뭘?’

진혁이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네가 맛있는 빵을 만든다고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알잖아.”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며 진영이 유쾌하게 외쳤다.

“삼촌이랑 담판 지었어. 이 가게는 유키코 쉐프님한테 맡기고 우리는 새 가게로 나가는 거.”

“계약 기간 끝나기 한 달 전에 말하자며?”

“내가 삼촌한테 말하기 무서워서 그랬던 거야. 말하고 나니까 속 시원해.”

백진영이 먼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촌 형이나 누나가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단 말이지. 음료는 잘 만들지만, 빵은 잘 못 해서…… 뭐랄까, 경쟁력 없는 사촌으로 남아야 한다고 믿었거든?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 실력이 있으면 뭐든지 상관없어! 널 보고 있으니까 피가 끓더라.”

“커피 잘 만들잖아.”

“응, 그렇지. 평생 삼촌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줄만 알았어. 그런데 너를 봐.“

붉은 신호등 앞에서 멈춰선 백진영이 진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를 믿고 사랑한다고 해서 아버지 밑에서 계속 있을 필요는 없지. 나이가 차면 독립해야지. 돈이 없으면 만들면 되고. 그냥 삼촌이 주었던 것들을 포기하기 싫었던 내가 욕심을 부렸던 거야. 이제 나가기로 하니까 홀가분하고 좋아.”

삼촌이 주었던 것들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커브를 도는 차 안에서 진혁이 물었다.

“……형, 뭘 돌려줬어?”

“오피스텔 절반. 어차피 삼촌이 주신 건데, 뭘. 원래 돌려드리려고 했던 거야.”

“내가 사는 곳도?”

진혁이 스카웃되어 오면서 혜택을 받아 따로 세를 내지 않고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다. 백진영이 낄낄댔다.

“거긴 내 거야. 집주인님이라고 불러.”

진혁은 그 말을 무시하고 대답했다.

“우리 새로 여는 가게. 반드시 성공하자.”

“당연하지. 잘 되면 프랜차이즈도 내자고.”

백진영이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그런 오피스텔은 두 채라도 살 수 있을 만큼 벌게 해줄게.”

“하하하! 말만이라도 고맙다.”

쾌활하게 웃음 짓는 진영을 보며 임진혁은 예전에 진희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진희에게 가게를 사준다고 했는데 아직도 못 사줬지.’

진희는 지금 일봉에게 제빵을 배우는 데에 만족하고 있다. 가게 매출이 올라갈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으며 신나하고 있다.

‘지금은 아직 역량이 부족해 자신만의 가게를 꾸려나갈 상황이 안 되지. 하지만 일 년 정도 있으면 충분히 가게를 맡아 꾸려나갈 수 있을 거야.’

“그 프랜차이즈 말이야, 독립하고 일 년 후에는 내는 거로 목표를 잡자.”

“…… 어? 음? 좋지.”

“그리고 중국에 갈 일이 있어서 휴가를 부탁하고 싶은데. 유키코 쉐프님이 대타를 해 주기로 했어.”

“어, 반년만 있다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는데.”

백진영이 가게 옆의 주차장에 주차하며 말했다.

“반년이나?”

“새 가게로 옮기고 어느 정도 자리 잡으려면 그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 음.”

진혁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번 여행은 혼자 갔다 오고 싶어서.”

“짜식…… 그런 거였어? 그러면 진작 말을 하지. 알았어.”

백진영이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응?”

임진혁이 차 앞으로 걸어가며 진영을 바라보았다. 진영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대회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지금까지 온 것만 해도 잘 한 거야. 힘내라.”

‘아니, 그거 아닌데…….’

탈락해서 우울해하며 혼자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진혁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

어차피 다음 주에 결승전 편이 방영되면 알게 될 일이다. 진혁은 낯익은 기감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 어머니, 진희.’

영업시간이 지나 문이 닫힌 H & J 제과점 앤 카페 안에는 직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혁의 가족들 역시 모여있다.

‘놀라게 해 주려고 와 있는 건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진혁의 뒤에서 따라오며 백진영이 말했다.

“가영 씨, 그만두더라도 주말마다 손님으로 온댔어. 단골 서비스 많이 달라고 하더라.”

백진영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매니저로 일해도 결국 승진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공방 수제자로 일하면서 나중에 자기 공방을 여는 게 백배는 낫지. 이 험한 세상에 자기 길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진영이 그렇게 언급하는 김가영 역시 지금 가게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김가영 씨 환송회에 부모님과 진희가 와 있다고? 가영 씨랑 진희가 그렇게 친했나.’

진혁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백진영이 덧붙였다.

“너도 딱 제과제빵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잖아. 그거 말고는 어울리지 않아. 빵 만드는 거 안 했으면 뭐 하고 살 뻔했냐?”

진혁은 자신이 하기에 적당한 직업을 떠올려 보았다.

‘청부살인?’

임진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백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진혁이 너 말야. 지금처럼 성실한 태도로 일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못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도 빵을 만들지 않는 너는 상상이 안 돼.”

전부터 느끼지만 백진영은 진혁을 묘하게 선량하게 평가한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백진영이 주차하는 동안 먼저 내린 임진혁이 가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셔터를 내린 가게 정문이 아닌, 직원용 출입구 쪽이다. 뒤에서 백진영이 삑삑삑 문자를 보내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이 열리는 순간 폭죽이 터지며 진혁에게 날아왔다. 그는 얇은 종잇조각이 머리에 뿌려지기 전 빠르게 천마군림보를 사용해 모든 조각을 피했다. 어둡던 가게 안이 확 밝아지며 조명이 켜졌다.

“진혁아, 생일 축하해!”

“임진혁 쉐프님, 생일 축하드려요!”

여러 사람이 일제히 외치는 목소리에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생일…… 이라고?”

촬영이 끝난 기념으로 모여 있는 것만 생각했지, 깜짝 생일 파티 따위는 짐작도 못 했다. 그의 청력이라면 모든 것을 눈치챘어야 하는데, 대회 때문에 자리를 비운 사이 급하게 기획한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데 어머니 역시 미소를 띠고서 진혁을 바라보았다.

“오늘 네 생일인 것도 몰랐어?”

진희가 연보랏빛 크림으로 프로스팅이 된 원형 케이크를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네 생일을 기념해서 이 몸이 직접 구워주신 케이크다. 블루베리 크림치즈 케이크야.”

“진혁 쉐프님과 진희 씨 생일 선물로 구운 도자기 컵이에요. 일부러 넉넉한 크기로 만들었어요.”

거대한 머그잔에는 매화와 난초가 힘찬 남빛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매화와 난초로 장식된 하얀 도자기 잔이 하나 있고 다른 한 잔은 대나무와 국화가 장식되어 있는 것이 매우 아름다웠다.

“진희 씨가 벤티 사이즈(706mL) 잔 이야기하셔서, 일부러 크게 만들었어요.”

김가영이 웃었다. 백진영은 갈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집에 가서 혼자 봐.”

“제 상자도 나중에 풀어보세요.”

예은이는 분홍색 리본으로 묶여 있는 갈색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쿠키네?”

“어떻게 알았어요?!”

“냄새나잖아.”

“아니, 냄새가 나기는 무슨…….”

“계속 쿠키 연습했잖아, 진혁 쉐프가 눈치챘나 보지.”

유키코가 웃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그녀가 건넨 쇼핑백에는 커다란 갈색 상자가 들어있었다.

‘이건 책이군.’

아무리 진혁이라도 굳이 심안을 쓰지 않는 이상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투시할 수는 없다. 백진영이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놀랐지? 네 생일을 축하해주러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다고. 준결승까지 간 것만 해도 대단하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마.”

“진혁 쉐프, 탈락했어요?!”

“진혁이는 아무 말 안 했어. 내가 추측한 거야.”

“괜히 이상한 설레발 치지 말아요. 우승했을 수도 있잖아.”

서창덕과 김가영, 김은동과 예은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받은 선물들을 테이블 한 켠에 올려둔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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