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6화
『대놓고 바나나라. 거참, 인종차별적인 케이크로군.』
존부가 코웃음 치며 말하자 브라이언이 차분히 대답했다.
『옛날에는 그렇게 불릴 때마다 발끈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부정당하는 기분이라 괴롭고 힘들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누군가 나를 데이비드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더 이상 브라이언이 아니라 데이비드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자랐고 그 사실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타인을 비하하며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자들이 수치스러워해야죠.』
『그렇다면야.』
아드레아노는 포크로 케이크 파편을 찔러 보았다. 케이크는 부서지거나 뭉그러지지 않고 소리 없이 공간을 내주었다. 포크가 들어가는 감촉에 만족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브라이언 신. 이것이 그의 최선인가?’
디저트의 길.
그 길은 평평한 외길로 쭉 뻗어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누군가는 빙글빙글 겨울 숲을 헤맨다. 이번 결승전에 내놓는 케이크는 한 사람의 페이스트리 쉐프가 자신이 경험해 온 맛들을 총집합해 최선의 기술로 내놓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음식을 다 맛보고 나서 이거라고? 반드시 이것이었어야 했나? 미각적 당위성이 부족하지 않나.’
스텔라 위스커스 역시 케이크에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크림과 함께 빵을 먹었다. 그녀는 슬라이드 위의 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처럼 크림을 묻히지 않은 빵조각을 따로 떼어내 포크로 조각조각 분해했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행동이었으나 그 태도는 무엇보다도 진지해 보인다. 결결이 깔짝깔짝하게 잘린 빵 조각 가장자리만 따로 씹어 먹어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케이크를 반죽할 때 생크림을 넣었어.’
그녀는 시선을 돌려 크림을 보았다. 연노랑 빛깔 몽실몽실한 크림을 듬뿍 스푼 위에 올려 맛보았다. 혀끝에 무게 없이 올라간 크림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흐릿하고 가볍다. 가벼운 크림과 부드러운 빵, 두 가지가 아주 잘 어울린다.
‘최상급 버터의 향을 강조했어. 보통 치즈 크림보다 버터를 조금 더 많이 넣고, 느끼하지 않게 레몬을 추가했어.’
숨김 맛으로 신선한 레몬주스를 깔았다. 깨끗이 씻은 레몬 껍질을 손톱만치만 갈아 레몬주스의 맛을 뒷받침했다. 묵직한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가볍게 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스텔라는 케이크 위에 올라간 화이트 초콜릿 가니쉬를 집어서 맛보았다. 향긋한 베르가못 향이 뒷맛에 남았다.
‘무난하게 바나나를 올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베르가못 화이트 초콜릿을 올렸어. 독특하고 개성적인 맛으로 포인트를 주고 싶었던 거지.’
일반적인 바나나 케이크 같은 것은 일반 가정에서 흔히 만들어 먹는다. 크림치즈 프로스팅이 반, 케이크 반으로 만들어 개량했다고 해도 이 케이크는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다.
‘그저 빵을 조금 부드럽게 하고 크림 식감을 가볍게 바꾸었으며 바나나 크럼블을 넣고 베르가못 화이트 초콜릿을 올린 평범한 바나나 케이크야.’
제작방법이 단순하니만큼 최고의 디저트를 만들기 위해서 조금만 더 푹신한 크림을 위해서, 조금 더 거친 빵의 결을 위해서 몇 번이고 다시 배합을 조절해 만들기를 반복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 방향이었을까?’
스텔라는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질문을 떠올렸다. 기술은 발전하고 시대는 변한다. 십여 년 전, 가정식을 재해석한 디저트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면 이 케이크는 아주 완벽한 답변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추구하는 답변이 과연 ‘아주 잘 만든 가정식’일까?
“후우.”
아드레아노 존부와 스텔라 위스커스 두 사람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 없는 심사위원들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브라이언이 숨을 죽였다.
‘이 케이크는 내 역작이야. 저 두 사람도 케이크의 진가를 모를 리는 없어.’
그는 심호흡하면서 판결을 기다렸다. 맥박은 거세게 고동치며 등에는 땀이 배어 나온다.
“자, 그러면 심사위원님들은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이희주가 웃으며 말했다. 심사위원들은 무대 저쪽 끝에 있는 벽 너머로 사라졌다. 출연자와 방청객들에게 목소리가 닿지 않을만한 거리다. 클래식풍의 현악기 소리가 나지막이 배경에 깔렸다.
보조 스태프 한 명이 메인 피디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선호 형, 이번에 우승자 누구예요?”
“지금 결정하는 중이잖아?”
“헐. 미리 깔아 놓은 거 아니에요?”
“당연히 둘 중 누가 되더라도 제대로 진행할 수 있게 시나리오는 다 잡아 놨지. 내가 여의도 김선호 아니냐.”
“당연히 브라이언 쉐프님 아니에요? 금방 결혼도 할 거고, 스토리도 좋고.”
“신 쉐프가 스토리가 있으면, 임 쉐프는 국뽕이 있다고. 둘 다 괜찮아.”
“판 짜놓은 줄 알았는데.”
“우리 심사위원님들, 보통 입김 센 사람들이 아니야. 다들 자기 기업 하나씩 가지고 있는 분이시라고. 방송국 판에 놀아날 분들이 아니셔.”
“그래도 대충 보면 알지 않아요?”
“모른다, 이놈아! 지금 우리도 다 기다리고 있어.”
“누군지 진짜 궁금하네.”
스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 요리 대회에서는 미리 깔아 놓은 우승자가 있기 마련이다. 결승전 심사 중이 아니라 결승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심사위원들이 진짜 깐깐한가 보네.’
◈ ◈ ◈
소리가 들리지 않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진혁이 피식, 하고 웃음 지었다.
어머니와 진희가 요리대회나 랭킹전 따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좋아하기 때문에 관련 프로그램을 많이 보았다. 그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스태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보통 미리 짜놓는 모양이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네. 방송이란 것도 벽보와 비슷하구만. 정보를 가진 이들이 마음대로 조작하기도 하고.’
그가 참석했던 무림 대회의 승부 역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점창파의 일대 제자는 화산파의 매화검수에게 승리를 양보하고, 남해검문의 검도는 당문의 소문주에게 져 준다. 정의와 협을 숭상하는 정파라는 놈들이 한다는 짓거리가 그따위였다. 진혁은 숭산파의 제자로 위장하고 난입해서 그들이 맺은 위선적인 약속이 깨지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브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진혁에게 말했다.
“진혁 쉐프는 긴장되지 않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습니다만…… 여유가 넘치네요. 저는 지금 호텔에 처음 출근하던 날같이 떨립니다.”
진혁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케이크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만족할만한 완성도였죠. 그걸로 충분합니다.”
“지금 심사위원들이 심사하고 있는데, 제대로 만든 거로 충분하다고요?”
“예. 내 메뉴가 디저트 팩토리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나는 내 가게에서 팔 거니까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디저트 팩토리의 인턴십을 하면서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 아래에서 배운다면 정말로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아까 한국에서만 오래 배운 게 사막의 선인장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음. 그렇지만 이미 적응했으니까요. 혼자서 이것저것 보고 하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 거기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죠.”
“하긴. 임진혁 쉐프처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좋은 스승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드레아노 존부라는 뛰어난 쉐프의 지도를 받으면 지금 만들 수 있는 빵보다 조금 더 좋은 빵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십여 년간 디저트계의 킹이라고 불리며 군림하는 그 남자는 제자를 함부로 두지 않는다.
디저트 팩토리에서 일하는 페이스트리 쉐프들 중 선발된 자들,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존부에게 직접 배운다. 다른 이들은 존부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브라이언 신은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제과학교를 졸업한 동기들을 보면 똑같이 10년 차 페이스트리 쉐프라고 해도 자신은 잘 나가는 편이다. 디자인이 뛰어난 쉐프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으며 나름 명성을 쌓아왔다. 하지만 그 이름은 아드레아노 존부 앞에서는 그야말로 등잔 앞의 성냥불만도 못하다.
브라이언은 친부모를 찾기 위해서 한국에 오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하지는 않았다.
진혁은 가볍게 대답했다.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의 케이크라면 디저트 팩토리에서 팔잖아요? 그걸 먹어 보면 되니까.”
“아니, 그것과 직접 배우는 건 다르잖습니까.”
진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먹어 보면 압니다.”
브라이언이 이마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 맛은 알지만, 그 맛을 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진혁은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먹어 보면 당연히 아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일봉이도 먹어 보고 모른다고 했지.’
말없이 눈을 깜빡이는 진혁을 보고 브라이언이 말했다.
“심사위원들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요.”
이미 넌지시 심사위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는 척 대답했다.
“심사를 하고 있겠죠.”
“일부러 흔하게 집에서 만들어 먹는 케이크의 맛을 최고로 맛있게 끌어놓아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거든요.”
“바나나 케이크 말이죠?”
“예. 원래는 새롭고 독특한 걸 고안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오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왜 빵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하이스쿨 시절로 돌아가 보니까 답이 나오더라고요. 난 별로 혁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제일 편하고 좋은 건 집에서 직접 구워 먹는 빵과 케이크고요. 화려하고 맛있는 바나나가 들어가면 더 좋고.”
브라이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혁은 동시에 심사위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심사위원들은 한 사람을 빼고는 브라이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 ◈ ◈
스텔라 위스커스가 말했다.『가장 미국적이고 가정적인 음식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바나나 케이크가 나오지는 않지요. 브라이언 쉐프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Simple is best(단순한 것이 가장 좋다)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은데.』
『어느 정도 예의를 차려야 하는데 지나치게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치즈 크림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포실하고 사뿐한 크림은 충분히 뉴욕까지 찾아가서 맛볼 가치가 있는 맛이었어요.”
주영모가 옹호했다.
『임진혁 쉐프의 초콜릿 브라우니 케이크 역시 혁명인걸요. 마시는 초콜릿보다 더 빠르게 녹아 없어지는 케이크라니. 분자 요리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질감을 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맛있지 뭐예요.』
『버터크림과 그 위에 피어있는 버터크림 꽃 역시 아름다움과 기능을 다 갖추었지. 예쁠 뿐만 아니라 초콜릿 브라우니에 촉촉하게 스며들어와 입안에서 살살 녹았잖아.』
아드레아노 존부가 격찬하는 데 이어 주영모도 동의했다.
“무덤하고 토막 난 시체를 만들던 쉐프가 정말로 많이 발전했죠. 맛 역시 더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 했는데 짧은 시간 내에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성장이라는 면에서는 브라이언 쉐프는 어땠지?』
“좋아졌다고 할까, 그렇지 않다고 할까. 화려한 원색을 주로 쓰면서 장식을 많이 올리다가 단순하고 우아한 계열로 넘어왔지. 그것도 꽤 잘 어울리고.”
스텔라 위스커스가 물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