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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215화 (215/656)

제 215화

영모는 그다지 버터크림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 버터크림보다 치즈 크림을 더 선호해 왔다.

치즈는 다양한 소재의 맛을 돋보이게 해주며 담백한 맛을 즐기게 해주는 완벽한 재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위처럼 견고했던 그 믿음이 지금 이 순간 흔들린다.

‘맙소사. 이 맛은…….’

강렬한 맛의 폭풍이 혀 위에서 회오리치며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무거운 버터크림이 중후한 다크 초콜릿과 함께 어우러졌다. 수없이 먹어보았던 버터크림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다.

‘초콜릿 버터크림이 이런 맛이었나.’

초콜릿의 바다에 얼굴을 그대로 묻은 것처럼 콧속까지 초콜릿 향이 가득하다. 혀를 습격한 빵은 이미 녹아내려서 형체가 없다. 빵의 결을 느낄 새도 없이 치명적으로 고운 브라우니 속에 숨어있는 독특하게 새콤한 뒷맛이 강렬하다.

‘이건 초콜릿 크림이 아닌데.’

선연한 커드 크림은 레몬이 분명하지만 무언가 다른 맛이 느껴졌다. 임진혁 쉐프는 평범한 초콜릿 브라우니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속에 품은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기상이 이 초콜릿 안에 숨어 있다.

브라우니와 무난하게 어울릴 초콜릿 칩이나 아몬드 같은 일반적인 첨가물을 포기하고 커드 크림을 선택한 것이다.

자칫하면 버터크림과 섞여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되었을 터인데 용감한 시도다.

‘아니, 모험이라고는 할 수 없어. 이건 수백 번, 수천 번 테스트를 거쳐 적합한 비율을 알아내서 재현한 거야. 한 번에 이런 맛을 만들어냈을 리가 없어.’

크림이 입안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달고 새콤하고 다시 끈적이게 달다.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던 맛의 향연이 끝나고 난 후에야 주영모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곳에 심사위원으로 왔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주 맛있어.”

그것은 자신이 그저 한 명의 손님인 줄 착각하고 흘러나온 본심이었다. 주영모는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서둘러 정정했다.

“다크 초콜릿과 밀크 초콜릿 맛이 잘 어울리는군요. 텍스쳐도 아주 좋고.”

그는 다른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고개를 들어 둘러보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스텔라 위스커스였다. 그녀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에 묻은 초콜릿 크림을 살짝 핥았다.

단 밀크 초콜릿 버터크림과 달곰씁쓸한 다크 초콜릿 브라우니는 입안에서 솜사탕처럼 흔적없이 녹아 없어졌다.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치명적이다. 스텔라는 케이크의 단면을 꼼꼼하게 살폈다.

보통 브라우니는 불규칙한 빵의 결에 미세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하지만 이 선인장의 속 줄기 브라우니 안쪽에는 빨대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빈 관이 있으며 그 안에는 노오란 크림이 꽉 차 있다.

그녀는 브라우니 케이크의 절반을 잘라내 포크를 사용해 연한 노란색 크림만 따로 집어냈다.

초콜릿에 파묻혀 있지 않은 크림을 맛보자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브라우니에 레몬 커드 크림이라.’

커스터드 크림이나 레몬 커드 크림은 보통 초콜릿과 함께 쓰지 않는다.

레몬의 신맛이 초콜릿의 단맛을 보조해주기보다 서로 따로 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진혁은 레몬 커드 크림을 초콜릿 브라우니에 어울리도록 만들었다.

‘우아한 들러리야. 베이스에 연유와 생크림을 섞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했어.’

레몬 커드 크림에 초콜릿 브라우니라는 생각지도 못한 조합을 만들기 위해 담담한 맛을 깔았다. 만족스럽게 영혼까지 채우는 달콤함은 저절로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게 한다. 스텔라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케이크 안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지지 않아?』

“힘이라니? 무슨 힘 말입니까?”

『이 안에 있는 엄청난 파워가 느껴지지 않아? 압도적이고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고.』

스텔라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초콜릿의 황제 폐하라고 할 만큼 위엄있는 단맛이긴 하죠.』

『그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무언가 같은데. 검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참, 특이한 평가네요. 초콜릿이 검 같다니.』

“존부 쉐프. 뾰족하고 찌르는 것 같은 매운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검이라니 무슨 검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

『…… 이런 맛은 느껴본 적이 없어』

아드레아노 존부는 넋이 나간 것처럼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을 본 이희주가 웃으며 말했다.

”정상급 페이스트리 쉐프님들은 디저트가 완벽해지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몇 달, 오래 걸리면 몇 년이 걸리기 마련이죠. 하지만 여기 계신 두 분은 지금 세 시간 만에 자신을 드러내는 시그니처 디저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숨을 고르더니 진혁에게 물었다.

“임진혁 쉐프, 이 레몬 커드 초콜릿 브라우니 케이크를 시그니쳐 디쉬로 만드셨습니다. 이 케이크가 어떤 점에서 자신을 드러내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그건…….”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인장이 사막에 적응하듯 현대인인 내가 강호 무림의 냉혹한 세상에서 변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른 쉐프님들은 프랑스나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셨죠. 정보가 풍부하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는 국가들입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아직 빵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우연히 먹게 된 롤케이크에 반해서 빵 만들기를 평생 업으로 하고자 하셨죠. 무급으로 일을 도우며 어깨너머로 어렵게 일을 배우셨고 조그만 빵집을 열어 꾸준히 운영해오셨죠. 저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무대를 넘어 방청석까지 깊이 울렸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물었다.

『그건 아버지 이야기고, 진혁 쉐프의 정체성과는 무슨 상관이 있나요?』

진혁이 천천히 대답했다.

“선인장은 사막에서 홀로 자랍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빵을 굽는 방법을 배우셨죠. 그리고 저 역시 아버지에게 제과제빵을 배웠습니다. 오아시스 없이 메마른 평야에서 자라며 꽃을 피운 선인장과 제가 닮지 않았습니까?”

진지하게 말하고 있던 진혁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순간적으로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한 얼굴이었다.

“예쁜 꽃이죠?”

“하하하하! 자기가 꽃이라고 하는 남자 페이스트리 쉐프는 처음 본다.”

주영모가 낄낄거렸다. 스텔라 위스커스 역시 미소지었다.

『진혁 쉐프. 우리가 우승자에게 원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닙니다. 모험과 도전도 아닙니다. 제빵을 시작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온전히 표현하며 자신의 기량을 전부 발휘할 것,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걸어온 길만이 아니라 스승이 걸어온 길까지 표현했군요.』

“최선을 다한 임진혁 쉐프의 작품, 잘 보았습니다.”

이희주가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조명이 그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케이크를 살펴볼까요?”

기다리고 있던 브라이언 신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임진혁 쉐프의 케이크가 극찬을 받는 동안 그는 조금씩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고서 케이크 접시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심사위원 한 명 한 명 앞에 케이크를 썰어 주며 브라이언이 살짝 손을 떨었다.

『많이 긴장되나요?』

『아니요.』

브라이언이 여유 있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렇군.』

아드레아노 존부가 납득했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상황을 눈치챈 주영모 역시 수긍했다.

“지금 일부러 자른 단면이 거칠어지게 자르고 있는 거군.”

“맞습니다. 이쪽이 더 식감이 좋으실 겁니다.”

『고객의 앞에서 직접 서빙하는 쉐프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적절한 플레이팅을 할 수 있지요. 고마워요, 브라이언 쉐프.』

스텔라가 수긍했다. 브라이언은 방금 거칠게 잘라낸 단면에 크림을 듬뿍 묻혀주었다.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매끄럽게 크림을 바르는 손길이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감사합니다, 스텔라 쉐프.』

『이 케이크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곁들인 서프라이즈 소프트 바나나 크럼블 케이크입니다.』

메뉴에 올렸을 때는 약자로 SSBC(Surprise Soft Banana Crumble Cake)라고 불렀다. 기대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브라이언이 덧붙였다.

『크림치즈 프로스팅과 케이크를 한입에 드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단순한 것이 가장 멋지다고 하지요? 화이트 초콜릿 허리케인이 올라가서 평범한 스퀘어 케이크가 우아한 모던 아트로 탈바꿈했네요.』

그게 없었더라면 정말로 허전했을 것이다. 스텔라가 담담하게 말하자 주영모 역시 동의했다.

“그거 올리기 전에는 크림 올린 당근 케이크로밖에 안 보였으니까. 올리고 난 후에 보니까 예쁘군.”

『디자인이 좋아.』

아드레아노 존부 역시 수긍했다. 진혁 쉐프가 호평을 받는 동안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브라이언 신이 당당하게 허리를 꼿꼿이 폈다. 표정 역시 밝아졌다.

『맛보시면 더 좋으실 겁니다.』

“하하하!”

치즈를 좋아하는 만큼, 보들보들하고 꾸덕꾸덕한 치즈 크림을 보는 순간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던 참이다. 주영모는 브라이언이 말한 대로 크림과 케이크를 한꺼번에 입에 집어넣었다.

“으음!”

얼기설기 얽혀 있는 빵의 결 사이사이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움푹움푹 파였다. 그 안에 스며들어있는 것은 미리 녹여둔 버터였다.

‘치즈보다 버터 향이 더 강하군.’

버터는 빵을 만들 때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재료지만 그만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뜨거운 불로 타기 직전까지 녹진녹진하게 녹인 버터는 구멍 사이로 파고들어 자연스럽게 버무려졌다. 그리고 그 위에 솜털처럼 가벼운 치즈 크림이 고슬하니 얹혔는데, 이 맛 또한 혀에 짝짝 달라붙었다.

『흰자와 노른자를 따로 거품을 내서 빵을 더 부드럽게 만들었군요.』

『예. 가벼운 치즈 크림 프로스팅에 어울리게 공기가 많이 들어가고 결이 거친, 촉촉하고 부드러운 빵을 만들었습니다.』

스텔라가 자신의 의도를 눈치챈 것이 기쁜지 브라이언이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냈다.

“그래서 치즈 크림 프로스팅을 이렇게 듬뿍 올렸군. 조금 과하다 싶기도 했는데 이편이 더 잘 어울려.”

고소한 버터 향 다음에는 부드러운 치즈 크림이 느껴진다.

주영모는 죽죽 찢어지는 결이 거친 빵의 식감을 즐겼다. 겉으로 보기에 호밀빵처럼 거친 빵은 전혀 딱딱하지 않다.

아기의 뺨처럼 부드럽고 폭신한 그 속에는 촘촘히 부풀어 오른 사이에 달콤한 바나나 조각을 품었다.

“바나나 크럼블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데 안에 숨어있었군.”

『겉으로 봐서는 아무도 이 안에 크럼블이라는 걸 알 수 없으니까 서프라이즈라는 이름을 붙였군요.』

『예. 그런 의미도 있고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아드레아노 존부는 묵묵히 크림을 케이크에 묻혀 포크에 찍어서 입에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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