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4화
‘오늘 만들 케이크는-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바나나 크럼블 케이크.’
브라이언이 미소를 지었다.
서프라이즈 소프트 바나나 크럼블 케이크(Surprise Soft Banana Crumble Cake)는 3년 전, 호텔에서 일하며 만든 요리다.
쿠키처럼 바삭하면서도 촉촉한 질감에 큼직한 말린 바나나가 들어간 케이크다.
원래 메인 코스가 끝난 후 마지막에만 나오는 손가락만 한 크기의 미니 디저트였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손님들이 여러 차례 문의한 결과 독립적인 디저트로 내놓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가 브라이언 신이라는 이름을 걸고 내놓은 케이크였다.
서프라이즈 케이크 이후에도 종종 그가 개발한 케이크가 상을 타거나 매거진에 실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빵이 호텔의 고정 메뉴로 나가게 된다는 기쁨만큼 크지는 못했다.
’이 심사위원들은 단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복잡하고 섬세한 맛을 즐기는 미식가들이지. 스텔라 위스커스 쉐프는 기술을, 주영모 쉐프는 치즈를,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는 맛의 조화를 중시해.‘
그 역시 여기까지 올라온 실력자다. 그동안 본 심사위원들의 반응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충분히 알아냈다.
브라이언은 이 바나나 크럼블 케이크가 심사위원들이 원하는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크림치즈 8온스는 무염 버터와 설탕, 바닐라와 함께 노르스름한 소용돌이가 되었다. 그는 점차 희어져 가는 혼합물 속에 소량의 히말라얀 핑크 소금 가루를 뿌렸다.
희미한 연분홍빛 가루는 흔적 없이 소용돌이에 섞여 들어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소금의 은은한 짠맛은 치즈 고유의 맛을 더 돋보이게 도울 것이다.
일부러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기계를 돌려 뽑아낸 크림치즈 프로스팅은 브라이언이 원하는 만큼 보들보들하고 쫀득쫀득했다.
-삐이이이익.
알람 소리가 울렸다. 벌써 미리 세팅해둔 40분이 지났다. 그는 오븐 장갑을 끼고 걸음을 옮겼다.
투명한 창 너머로 보이는 케이크는 이미 충분히 부풀어 올랐다.
그는 가느다란 이쑤시개를 가운데에 꽂아보았다.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케이크가 완벽하게 익었다는 뜻이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케이크의 겉모습은 보통 케이크와는 결을 달리했다. 부드러운 황갈색 빵부스러기가 모래처럼 켜켜이 쌓여 벽돌 모양을 이룬다.
언뜻 보면 수수한 파운드 케이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일단 이 케이크를 입안에 넣으면 이것이 일반적인 파운드 케이크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촉촉하고 부드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케이크 속에는 따로 준비해둔 바나나 크럼블이 숨어있다.
바나나 크럼블(Banana Crumble)이란 설탕에 졸인 바나나 위에 밀가루와 버터, 설탕 등을 올리고 오븐에 구워낸 음식이다.
비단같이 부드럽기만 한 케이크에 두 가지의 씹는 맛을 더하기 위해서 넣은 장치다.
“맛은 코와 입만으로 느끼는 게 아니야. 씹는 맛이 진짜지.”
오븐에서 나온 케이크를 식히는 동안 그는 슬라이드 위에 화이트 초콜릿을 뿌렸다.
초콜릿 펜으로 그린 구불구불한 원들은 곧 우아하게 얼어붙었다.
짧은 알람이 울리고 케이크가 충분히 식은 것을 확인한 브라이언이 주걱을 들었다.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고 단순한 갈색 스퀘어 케이크였다.
주걱 위에 함빡 올라간 상앗빛 프로스팅 크림은 향기로운 버터와 치즈 향을 풍겼다.
꽤 많은 양의 크림은 남김없이 케이크 위에 올려졌다. 프로스팅이 아니라 레이어라고 할 만큼 많다.
브라이언이 크림 위에 아까 만들어둔 화이트 초콜릿 문양들을 올렸다.
놀랍게도 회오리 모양의 화이트 초콜릿이 올라가자, 상앗빛 색깔의 크림으로 장식한 소박한 황갈색 케이크에 불과했던 케이크가 순식간에 변신했다.
한겨울의 설원에 겨울 여왕이 태풍을 보낸 것처럼 신비롭고 우아한 분위기가 되었다. 맛과 겉모습, 무엇을 보아도 결승전에 내놓아 마땅한 케이크다.
‘호오. 특별한 크림이군.’
진혁이 브라이언의 케이크를 본 것은 그때였다.
브라이언이 케이크를 거의 다 만들고 마지막 데코레이션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쫀득하고 빼곡한 하얀 크림을 보고서 진혁은 마음속 깊숙이 감탄했다.
‘저 크림을 만드는 레시피는 얻어도 괜찮겠어. 일반적인 치즈 크림과는 밀도부터 다른데?’
부드러운 케이크에 얼음처럼 사르륵 녹아내릴 크림을 올렸다.
케이크 안쪽에는 단단한 것이 씹힐 것이다. 진혁은 라이벌의 케이크를 꿰뚫어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미 초절정은 넘은 경지의 케이크다. 현경 정도는 되려나.’
쉽게 다른 사람의 케이크를 평한 임진혁이 잠시 고민했다.
‘내 케이크는 어느 정도 수준일까. 지금 전국 대회 결승전에 지출할 정도면 나도 현경 정도 되나? 이 쇼의 레벨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네.’
그때였다. 평화롭게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다른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셋! 둘! 하나!”
이희주가 망토를 펄럭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임진혁도 브라이언도 시간에 딱 맞추었다.
웅장한 북소리가 울리며 전자시계의 숫자가 0이 되었다.
아직 심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방청객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시간에는 무사히 맞추었어.’
브라이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진혁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눈앞을 바라보았다.
“두 분 중에 어떤 분이 더 먼저 마치셨나요?”
“임진혁 쉐프님이지.”
이희주의 질문에 주영모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임진혁 쉐프가 선인장 꽃에 암술과 수술을 올려놓고 난 다음에야 브라이언 쉐프가 화이트 초콜릿 토네이도를 케이크에 얹었지 뭔가. 기껏해야 30초 정도 차이 났으니까 큰 의미는 없다만.”
“그렇다면 임진혁 쉐프님, 먼저 케이크를 가지고 앞으로 나와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진혁은 한 손으로 사뿐히 화분을 들었다.
접시에서 화분이 된 도자기는 묵직하고 무거웠으나 그에게는 솜털보다도 가벼웠다. 심사위원들은 케이크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빵이 아니라 관상용 식물처럼 보이는데요? 우리 집에서 키워도 되겠네.』
선인장은 진짜 식물처럼 보였다.
“방금 전에 밀가루와 빵, 버터크림과 초콜릿을 얹었다는 것을 보지 못했으면 저도 그냥 화분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희주가 만듦새에 감탄하며 말했다. 주영모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진혁 쉐프는 ‘자연’을 즐기는구만. 파도를 크림으로 재현하더니 이번에는 선인장을 심었어.”
그는 활짝 핀 꽃을 면밀히 살폈다. 얇디얇은 크림을 겹겹이 짜내어 꽃 모양을 만들어냈다.
유려하고 섬세한 이 기술은 그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한국에 플라워 케이크를 처음 들여왔다고 자부하는 주영모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플라워 케이크의 파이핑 기법을 활용한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데. 어디서 배웠나?”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사실대로 말했다.
“유튜브에서요?”
주영모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걸 독학으로 배웠다고…….”
그는 일본에서 플라워 케이크를 배워 왔다. 케이크를 사 먹어 보면서 혼자서 따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워 케이크의 장인에게 피드백을 받으며 배웠더니 이른 시간 안에 요령을 익힐 수 있었다.
대신 대가는 충분히 지불했다. 아직 한국에서 플라워 케이크 과정은 개설되지 않았다.
해외에서 배워 온 이들만이 알음알음 주문받아 만들어 팔고 있을 뿐이다.
주영모는 진혁이 공식적으로 출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진혁이 독학했다는 말을 의심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플라워 케이크를 가르칠만한 사람은 자신과 친우 한 명밖에 없는데, 친우 놈은 자기 사업차 해외에 나가 있으니 말이다.
“…… 정말로 대단하군.”
보석 원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미 다 다듬어진, 당장이라도 세팅할 수 있는 보석이었다. 완성된 보석과 원석의 가치 차이는 무시무시하다.
『이 화분의 흙모래도 자연스러워요. 분명히 비스킷을 부수는 걸 봤는데 말이에요. 아주 고운 흙이라고 해도 누구나 다 믿겠어요.』
『빵가루 같은 걸 뿌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 하여튼 대단해.』
아드레아노 존부가 아랫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외양은 아주 훌륭해. 정교하게 재현한 식물 위에 아름다운 꽃까지 피어 있지. 사막에도 희망은 온다는 느낌이라 좋아.』
이희주가 씩 웃었다. 아까부터 케이크에서 풍기는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에 코를 벌렁거리던 참이다. 그가 즐겁게 물었다.
“그럼 맛을 볼 수 있게 케이크를 잘라주시겠습니까, 임진혁 쉐프?”
“물론입니다.”
진혁이 빵칼을 들어 올렸다. 그는 천천히 칼을 내리눌렀다.
진녹색 크림이 갈라지며 케이크의 내부가 선연히 드러났다.
진한 흙처럼 새까맣고 촉촉해 보이는 안쪽에는 혈관처럼 노란 무언가가 이곳저곳 뿌리내려 있었다.
“이건 뭐지?”
주영모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혁은 그것이 질문이라 생각해 대답했다.
“레몬 커드 크림이 흐르는 선인장 초콜릿 브라우니 케이크입니다.”
“브라우니 안에 어떻게 레몬 커드 크림을 넣었지?!”
“미리 길을 터놓고 구웠죠.”
“반죽 상태에서 어떻게……. 아, 빨대라도 심었나?!”
“비슷합니다.”
진혁은 더 이상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그는 레몬 커드 크림과 버터 크림 프로스팅이 골고루 들어갈 수 있게 케이크를 잘라 접시 위에 올렸다. 접시 위에 비스킷 모래가루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케이크를 먹을 사람 앞에서 접시에 예쁘게 플레이팅을 하다니. 전통문화를 살려서 빵을 만들라고 했더니 무덤을 만들던 그때보다는 훨씬 낫네요. 데코레이션 부분에서 임진혁 쉐프는 많이 늘었어요. 성장한 모습이 보여 보기 좋군요.』
스텔라가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중요한 건 맛이지.』
아드레아노 존부가 짧게 대답했다.
두 심사위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주영모는 이미 케이크에 포크를 찔러 넣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케이크가 아니라 두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포크가 푹 들어갔다.
“초콜릿 브라우니와 레몬, 거기에 계피라.”
미각과 촉각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시각과 후각이다.
주영모는 이 케이크를 시각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고 평가했다.
‘트릭 선물로 좋지. 병원에 병문안을 갈 때 이 선인장 케이크를 화분에 담아서 가지고 가서 상자를 열면 얼마나 놀라고 즐거워하겠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아이디어야.’
화분 안의 선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케이크, 라는 컨셉이 마음에 든다.
초콜릿 브라우니에서 풍기는 피처럼 진한 초콜릿 향기 역시 최고다.
임진혁 쉐프의 센스는 신뢰할 수 없지만, 맛은 기대할 수 있다.
‘허참, 이렇게 유능한 사람을 내가 심사도 못 보게 떨어뜨리려고 했다니. 한참 잘못 생각했지. 그때 피디가 우기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했냐, 주영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