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3화
진혁은 버터를 바른 케이크 틀 네 개에 반죽을 부었다.
그는 케이크 틀을 미리 예열해둔 오븐에 넣은 후 느긋하게 레몬 커드 크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촉촉하고 향이 짙은 이 크림은 방금 새로 얻은 레시피로 만들었다.
‘방금 전에 본 아드레아노 존부의 시그니쳐 디쉬에 있던 크림을 개량할 거야.’
워낙 완성도가 높은 크림인지라 별달리 손을 댈 데는 없다.
“그리고 버터크림.”
그가 만든 것은 진녹색에 가까운 녹색 버터크림만이 아니다. 노란색과 분홍색 버터크림을 만들어 준비한 후, 길게 뽑아낸 화이트 초콜릿을 손톱 길이로 하나씩 하나씩 잘라냈다.
“임진혁 쉐프가 뭘 만들고 있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구형 케이크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발효 과정을 생략하는 걸 보면 데코레이션 쪽에 시간을 더 쓸 생각인가 보군.”
심사위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혁은 다른 이들이 자신을 보며 무어라고 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다음은 비스킷.’
진혁은 밀크커피 비스킷을 지퍼백에 넣은 후, 밀대로 눌러 가볍게 부수었다. 일반인이 한다면 여러 차례 두드렸어야 할 일이지만 한 번이면 충분하다.
침투경(浸透勁)의 묘리를 사용하자 비스킷이 안쪽부터 터져나가 산산조각이 났다. 마치 체로 친 것처럼 고운 가루가 되었다. 명인의 제자가 만든 매끈한 그릇 안에 비스킷 가루를 수북이 붓자 누가 보아도 사막의 모래로 만든 화분토(花盆土)처럼 보인다.
‘잘 어울리는군.’
진혁이 미리 준비해온 그릇은 김가영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녀가 성심성의껏 구워낸 도자기 그릇은 평평하고 넓적한 황토색으로 막 만든 화분처럼 생겼다.
그는 본디 두 종류의 그릇을 준비해 왔다. 테마가 웨딩 케이크였다면 따로 준비해온 하얀 도기 그릇을 썼을 것이다.
화분에 모래를 까는 작업을 마친 후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모래를 옮겼다. 가운데에 덩그러니 빈 곳을 만들기 위해서다.
‘여기가 빵을 둘 자리야.’
곧 향긋한 냄새가 풍기며 오븐이 알람 벨을 울렸다. 진혁은 벨이 울리기도 전에 오븐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손쉽게 빵틀에서 빵을 분리해냈다.
미리 버터를 충분히 발라놓은 덕분에 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버터를 바르지 않았어도 그는 얼마든지 빼낼 수 있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버터 향을 강하게 하기 위해 손을 썼다.
진혁은 빵칼을 들어 원통형 기둥 모양 케이크의 윗부분을 깎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아래쪽 부분도 조금 깎아내자 파운드 케이크는 커다란 몽둥이처럼 보였다. 그는 다른 케이크 역시 꺼내어 비슷한 모양으로 깎아냈다. 두 번째 빵은 첫 번째 것보다 크기가 작았다.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화분에 꽃을 피워 플라워 케이크라도 만들까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못생긴 몽둥이가 보이는군요?”
『몽둥이 케이크……? 대체 뭘 만드는 걸까요?』
“사랑의 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희주와 주영모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곧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연약한 꽃송이 따위가 아니지.’
진혁은 매난국죽(梅蘭菊竹)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상부가 불룩한 원기둥 모양의 파운드 케이크에 시럽을 꼼꼼히 발라준 후 화분 안으로 파운드 케이크를 옮겨 놓았다. 두 개의 기둥이 나란히 화분 위에 서 있다.
모래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2개의 케이크를 향해 진혁이 버터나이프를 들었다.
스윽스윽.
특별히 손목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은데도 몽둥이 케이크는 둘 다 버터크림으로 완벽하게 뒤덮였다. 버터나이프 역시 칼의 일종이기에 그는 아주 손쉽게 다루었다. 진혁이 나이프의 무딘 면을 사용해 매끄럽게 크림을 다듬고 나자 초록빛 몽둥이 케이크가 나타났다.
‘아주 특별한 식물이야.’
매난국죽(梅蘭菊竹)이 절개가 굳고 지조가 있다 하나 선인장만큼이나 할까? 군자의 도리를 안다는 이 네 가지 식물이라고 해도 물이 없으면 순식간에 말라 죽을 것이다. 반면에 그가 만들고자 하는 이 식물은 다르다.
‘바로 사막의 선인장.’
선인장은 수분이 부족하고 메마른 사막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식물이다. 잎을 버리고 피부를 두껍게 하여 최대한 많은 수분을 담아내어 물이 없는 가혹한 환경에서도 몇 년 이상 버틸 수 있다. 가끔 생명력 질긴 것들은 조각조각 찢어놓아도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기도 한다.
강호 무림이라는 거칠고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변화해야만 했다. 현대인의 가치관을 버리고 무공을 익힌 그는 줄기와 잎을 버리고 두꺼운 표피와 가시를 길러낸 선인장과 다르지 않다.
‘가시를 잔뜩 세우고 강한 척하지만 안쪽은 부드럽기 그지없지.’
진혁은 자신이 선인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렸다. 진혁이 녹색 크림을 올리기 시작한 시점에 누구나 이 케이크가 무엇을 테마로 하는지 보자마자 파악할 수 있었다.
“선인장!”
“정말 선인장 같다. 아까 과자를 부숴서 모래로 만들었지? 흙 위에 있으니까 더 리얼해 보이네.”
“어째서 자기 아이덴티티를 선인장으로 하는 거지?”
“너무 귀엽다.”
“먹어보고 싶어.”
방청객들이 한마디씩 했다. 진혁은 짤주머니에 채도가 다른 녹색 버터크림을 채우고 끝을 잘라냈다. 선인장 케이크 위에 가시를 짜내기 위해서다.
‘최대한 솟은 모양으로 하고, 끝에는 화이트 초콜릿 꼭지를 올린다.’
초록빛 가시가 삐죽삐죽 돋은 선인장은 가운데와 옆쪽이 조금 비어 있었다. 진혁은 노란색 버터크림을 짤주머니에 담아 그곳에 짜내기 시작했다. 선명하고 화사한 크림 꽃잎이 한 겹 한 겹 만들어졌다.
크림을 짜내 얹으며 진혁은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무공이 있으니 일상생활이 편해졌지. 요리하면서 깨달음을 얻기도 했고.’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버린 그는 현대에 돌아와서 적응해나가는데 전전긍긍했다.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맛’부터 시작해서 ‘평범하게 멋있고 아름다운 케이크’까지 이전에는 당연하게 알던 것들이 지금은 새롭다. 좋아하던 탄산음료는 따갑고 불쾌한 맛이고 꿈에서도 기대하던 프라이드치킨은 항생제 범벅이라 괴상한 맛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꿈을 꾸지 않는다. 시체가 산처럼 드높이 쌓이며 피가 바다처럼 흐르는 붉은 꿈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그가 만들어낸 케이크들은 아름답고 맛있다며 평이 자자하다.
또한, 미국의 회사에서 환자용으로 제조 중인 밀 키트나 한국의 공장에서 만들어 판매할 유기농 샌드위치도 평판이 좋다.
그는 성공적으로 적응해나가고 있다. 강호의 고난과 천마로서의 경험으로 담금질 되어 한 자루의 검으로 완성되었다고나 할까.
처음에 시그니처 디쉬를 만들라고 했을 때 진혁이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한 자루의 검’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은 길고 가늘며 날카롭고, 오븐에 굽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소도를 만드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대신 진혁은 가장 메마른 곳에서 백여 년에 단 한 번, 수 시간 동안 피어나는 꽃을 찾아냈다.
‘때로는 사막에도 꽃이 피지.’
진혁이 손을 움직였다. 노란 크림 꽃잎 위에 연분홍빛 꽃잎이 한 겹씩 올라간다.
선인장 케이크 위에 연분홍빛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났다.
과거의 그 모든 고난이 세 송이의 꽃으로 다시 태어나며 승화한다. 선인장에 만개한 꽃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훗.”
그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째서 선인장을 골랐는지 사람들에게 본심을 전부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 꽃에 화려한 꽃술을 장식하며 진혁은 맞은편에 있는 조리대를 흘깃 바라보았다.
브라이언 신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 ◈ ◈
브라이언은 진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그는 지금 만들 레시피 초안에 대해 스케치한 후 만족한 표정으로 자신이 골라온 재료를 바라보았다.
“좋아, 아주 좋은 바나나야.”
그는 신선한 바나나를 집어 들었다. 길고 구부러진 모양의 이 열매는 두껍고 단단한 껍질 안에 부드러우며 달콤한 속살이 들어있는 열대 과일이다.
꼭지가 없는 부분부터 벗기면 검은색 가루가 묻어나지 않고 깔끔하게 껍질이 벗겨진다.
사과나 귤 따위는 가지에 연결되는 꼭지 부분이 위에 존재하지만, 바나나는 그렇지 않다.
바나나는 다른 열매와 달리 단단한 꼭지 부분이 바나나의 무게를 지탱한다. 가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에서 솟은 것처럼 열린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주방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아.’
원래 그는 바나나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애들이 브라이언을 보고 ‘이 바나나야!’하고 놀렸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얗다. 그렇기에 ‘바나나’는 백인 사회에서 백인처럼 행동하는 동양인을 욕하는 속어 표현이다.
내내 바나나라고 놀림당하던 브라이언은 그 과일을 일부러 피했다. 호텔 페이스트리 키친에서 일하게 되면서도 바나나는 먹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제과제빵 스쿨의 교사가 만들어준 바나나 크럼블 케이크를 맛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처음 느껴본 달콤한 맛이었다.
케이크에 홀딱 반한 브라이언은 교사에게 레시피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는데, 재료에 바나나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나나 같은 건 안 먹는다고요!”
“한 번만 먹어 봐.”
그리고 그는 바나나와 사랑에 빠졌다.
‘인종차별을 하는 무례한 녀석들이 멋대로 이름을 붙여 부른다고 해서 맛있는 걸 먹지 않을 이유는 없어.’
그가 철없는 마음에 십여 년간 거부해온 열대 과일은 다양한 맛을 품고 있는 매력적인 과일이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맛이다. 부드러운 상앗빛 속살을 도막 내 믹서기에 갈면서 그는 피식 웃음 지었다.
‘나도 많이 컸지.’
시그니쳐 디쉬란 페이스트리 쉐프의 정체다. 요리로 내미는 명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 바나나라는 재료를 사용한다는 건 그 자신이 이제 어떤 사람인지 완벽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뜻한다. 브라이언은 자신이 있었다.
‘버터밀크에 레몬주스, 그리고 식초.“
그는 제일 먼저 오븐을 350°로 예열한 다음 13인치 팬 위에 버터를 칠했다. 으깬 바나나를 그릇에 옮겨 담아놓고 밀어둔 후 반죽을 만든다.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 베이킹소다와 계피, 소금을 섞었다.
브라이언은 스탠딩 믹서에 방금 섞은 예비 반죽을 투하한 후 소금과 설탕을 뿌렸다.
중간 속도로 돌아가는 믹서에 날달걀을 넣고 낮은 속도로 조정한 다음, 바닐라를 넣었다. 씨를 빼서 손질한 바닐라빈에서 짙은 향기가 풍겼다.
”좋아, 잘 되고 있어.“
그는 기운차게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탠드 믹서기에 크림치즈와 버터를 넣고 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