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2화
“그건 비밀입니다.”
진혁이 씩 웃었다.
특별한 전략은 없다. 각 심사위원의 입맛에 맞춘 맞춤형 케이크를 만들 생각도 아니다. 그저 과제에 충실하게 자신만의 대답을 내놓을 생각이다.
“기대하겠습니다, 임진혁 쉐프님.“무대에 오르는 순간 진혁은 평소와 다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여태까지 희고 깨끗하던 무대는 오늘따라 검은색과 남색의 인테리어로 바뀌어 있다. 심지어 조리대의 조리판까지 검은색이다.
조리대 위에 놓인 스테인리스 소재의 조리도구들만이 은빛으로 빛난다. 조명이 없어도 그는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진혁은 어둠 속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브라이언 쉐프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유쾌해져서 키들키들 웃었다.
‘평화로운 대결이야.’
오랜만에 만나는 1:1 라이벌이다. 날카로운 검이 아닌 빵칼과 반죽용 방망이를 들고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곧 무대 위에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화려하게 뿜어져 나오며 망토를 펄럭이는 사회자가 뛰쳐나왔다.
붉은색 나비넥타이에 검은 망토를 입은 이희주는 오페라용 눈 가면을 착용하고 있어 평소와 다르게 신비스러워 보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디저트 서바이벌 쇼, 드디어 그 마지막 날입니다. 여러분은 두 명의 뛰어난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뛰어난 솜씨로 최고의 기량을 펼치는 모습을 보게 되실 겁니다. 첫 번째 도전자를 소개하겠습니다!”
북소리가 둥둥 울리는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며 진혁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임진혁 쉐프는 처음 무대에 섰던 그 누구보다도 짧은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놀라운 솜씨로 흔들림 없이 결승까지 진출했죠! 임진혁 쉐프에게 박수를 보내주세요!”
방청객들이 진혁의 이름을 외치며 플랜카드를 흔들었다. 야광봉을 흔들던 사람들은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진혁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인사에 답례했다.
“브라이언 쉐프는 페이스트리 쉐프로 오래 일해왔죠. 미국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퓨전 디저트의 달인입니다! 그가 만든 현대적이고 우아한 음식들은 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섬세한 맛으로도 유명합니다. 브라이언 신 쉐프에게 박수를 보내주세요!”
브라이언의 팬 역시 적지 않았다. 열광적인 박수가 이어지고 이희주가 빙글 돌아섰다.
“그리고 이분들을 평가하실 심사위원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북소리가 더 거세어지며 거칠어졌다. 등 돌리고 서 있는 세 명의 그림자가 조명을 받아 죽 늘어선다.
“호주 베이킹 협회의 부회장이자, 컵케이크 체인의 CEO인 스텔라 위스커스! 그녀가 만든 컵케이크는 침대에 누워있는 노인도 벌떡 일으켜 세울 정도로 맛있다고 하죠.”
스텔라 위스커스가 등을 돌리며 방청객들에게 얼굴을 보였다.
우아한 쉐프복을 입은 그녀가 살며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 손에는 웨이트리스처럼 실버 돔을 든 채였다. 이희주가 박수를 권하지 않아도 모두가 기뻐하며 환영했다.
“한국 최초의 제과 제빵 명장이자 주영모 베이커리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계신 원장님, 주영모 쉐프님! 주영모의 제과제빵 백과사전을 비롯해 수십 권의 레시피북을 출간한 작가이시기도 합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주영모 역시 뒤를 돌아보며 얼굴을 보였다. 그는 주영모 베이커리 아카데미의 마크가 있는 쉐프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키가 작고 통통하니까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역시 오른손에 실버 돔을 들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디저트 킹이라 불리는 남자, 세계 정상급 페이스트리 쉐프. 디저트 팩토리의 경영자이자 개발자! 신의 손을 가졌다고 불리는 아드레아노 존부를 소개합니다!”
아드레아노 존부 역시 디저트 팩토리의 쉐프 제복을 입었다. 예외적으로 그는 거대한 실버 돔이 올라간 카트에 손을 짚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이 든 실버 돔보다 훨씬 커다란 크기가 눈에 띄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세 명의 정상급 쉐프들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광경을 보고서 이희주가 감탄했다.
“이 광경은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죠. 사실은 세 분이 쉐프복을 입고 주방에서 만날 일도 없고요.”
아드레아노 존부는 천천히 심사위원석으로 향했다.
심사위원 셋 모두 실버 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진혁은 이미 어떤 주제가 출제될지 짐작했다. 브라이언 역시 깨달은 듯싶었다.
“여러분! 지금부터 세계 최고의 페이스트리 쉐프 세 분의 시그니쳐 디쉬를 소개합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실버 돔을 열었다. 촉촉해 보이는 붉은색 스퀘어 컵케이크는 머리에 희고 쫀쫀한 크림을 둥글게 얹었다. 그 위에는 신선한 체리가 한 알 올라가 붉은 광택을 뽐냈다.
『바닐라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올린 레드벨벳 컵케이크입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컵케이크는 5년 연속 호주의 컵케이크 축제에서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가장 기본적이고 정직한 맛으로 손님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맛으로 유명하다.
그다음에는 주영모가 실버 돔을 열었다.
“바닐라 화이트 초콜릿 치즈 케이크입니다.”
베이스인 크림치즈 케이크에 바닐라빈을 갈아 넣어 제일 순수하고 향긋한 바닐라 향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검은 바닐라빈 가루가 희미한 검은 점이 되어 드문드문 찍힌 화이트 초콜릿 코팅 역시 주영모만의 특색이다.
이 케이크는 치즈 케이크 대회에서 우승한 이래 주영모의 시그니쳐 케이크로, 주영모 베이커리에서 꾸준히 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드레아노 존부가 실버 돔을 들어올렸다.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정말로 선물 상자처럼 보였다.
다른 케이크들보다 세 배는 되는 높이인 정육면체 초콜릿 상자에는 역시 초콜릿 리본이 묶였다.
화려하게 매듭진 리본 위에는 활짝 핀 국화가 꽃잎을 자랑하는데 곁에 늘어진 리본 가장자리는 바닥에 닿아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은색 초콜릿 상자에 핀 하얀 국화 역시 화이트 초콜릿을 일일이 만들어 정교하게 이어붙인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자는 다크 초콜릿이고 리본은 밀크 초콜릿이군.’
지나치게 단 것을 싫어하고 조화를 중시하는 아드레아노 존부의 특성상, 저 케이크 안이 어떻게 되어있을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진혁은 심안으로 ‘크리스마스 선물’ 케이크를 들여다보았다.
‘대단해!’
겉이 초콜릿이라고 해서 안쪽까지 초콜릿인 것은 아니다.
레몬 커드에 피스타치오, 패션푸르트에 코코넛, 딸기와 생크림, 체리와 라즈베리. 이탈리안 체리에 크림치즈, 바닐라에 오렌지 커드까지 12개의 레이어가 빼곡히 가득 차 있다.
일반적인 케이크들을 노래에 비교한다면 존부가 만들어낸 이 맛은 가히 오페라에서 울려 퍼질 교향곡 급이다.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저런 맛을 계산해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지금 아드레아노 존부가 차곡차곡 쌓아놓은 맛의 레이어는 지극히 섬세하고 정교하다.
레시피를 알고 있더라도 제작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틀리면 맛이 무너지고 엉켜 진흙탕만도 못하게 되어버린다.
진혁이 주로 하는 스타일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어떤 맛을 재현할지 생각한 다음에 그 맛이 나올 때까지 이것저것 섞어보는데.’
치킨 파이만 해도 그렇다. 진혁은 어떤 치킨의 맛이 나올지 결정하기 전에 비율을 조절했고 그 맛이 나오자 만족했다.
아드레아노 존부처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맛을 설계해 첫맛에는 담백하고 뒷맛은 농후하게끔 만들려 하지 않았다.
분명히 진혁은 초기에 아드레아노 존부의 케이크를 모방하면서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즐기는 맛부터 시작해서 맛을 기획하는 방법까지 모든 점에서 반대편에 서 있단 말이지.’
세 쉐프의 시그니쳐 디쉬를 눈으로 즐기고 나니, 마지막 승부 주제가 무엇인지는 이희주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늘 주제가 뭔지 알겠군.”
브라이언 역시 같은 것을 생각했는지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진혁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희주가 정답을 발표했다.
“재능있는 두 쉐프님께서 오늘 만드셔야 하는 것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시그니쳐 디쉬입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서 출연자석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임진혁 쉐프, 오늘의 각오는 어떻습니까?”
진혁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유학을 가서 해외의 최신 기술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시골의 빵집에서 아버지에게 배우고 혼자 이것저것 만들어 보면서 빵 만들기를 익혔습니다. 그래서 제 빵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지도 모르죠.”
“맞아요. 여태까지 보여주신 임진혁 쉐프의 빵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지요.”
“이번에도 저만의 스타일로 맛있는 케이크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데서 보신 적이 없는 모양일 겁니다.”
“호오, 그건 기대되는데요?”
“기대하시는 만큼 가치 있는 케이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브라이언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희주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브라이언 쉐프,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저는 여태까지 모던 아트적인 음식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컨템포러리 퀴진(Contemporary Cuisine)을 지향하고자 합니다.”
“컨템포러리 퀴진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컨템포러리 퀴진에서 다루는 음식은 우리나라 음식이 될 수도 있고, 미국의 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계절 이곳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해 요리해, 고객과 시간과 공간을 나누려고 하는 시도죠. 저는 한국에서만 나는 제철 계절 과일을 사용할 겁니다. 한국에서 태어났던 제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뿌리를 뻗어 나갔는지를 여러분께 보여드리겠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퓨전 디저트가 되겠군요?”
“퓨전은 혼합해서 합쳐버린다는 의미가 있지요. 하지만 컨템포러리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요. 제 케이크를 본다면 아시게 될 겁니다.”
“두 쉐프님의 말씀, 아주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요?”
거대한 전자시계가 카운트를 시작했다. 심사위원과 방청객이 목소리를 합치며 따라 외쳤다.
“3! 2! 1!”
숫자가 멈추자마자 브라이언이 재료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진혁은 천천히 걸어가 재료를 담았다.
브라이언은 재료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꼼꼼히 좋은 것을 골라내는데 진혁은 아무것이나 집어 바로바로 바구니에 담는다.
“진혁 쉐프가 재료를 다 골랐군요. 엄청난 속도인데요?”
“묘하게 저렇게 빨리 고르는데 좋은 걸 귀신같이 가져간단 말이지.”
이희주와 주영모가 진혁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진혁은 다른 이들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반죽을 시작했다.
그는 특별히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데도 신기하게 빠른 속도로 반죽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