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1화
“대단한데.”
통찰이라고 할 것도 없이 진혁의 인간관계가 워낙 좁아서 짐작하기 쉽다며 진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유키코 씨는 연애 고민이랄 게 없이 한창 행복해하시니까 한 명밖에 없잖아.”
“유키코 씨하고 연락해?”
“응. 저번에 무대에서 만났을 때 전화번호 교환해서 메신저로 수다 떨다가 친해졌어. 좋은 분이시던데? 그리고 널 굉장히 높게 평가하더라.”
그는 부러진 초콜릿 목 안쪽에는 딸기가 아닌 살구 과육을 가득 담아 여동생에게 건넸다. 진혁이 하나씩 챙겨 주는 봉황은 어느 조각 하나 빠지지 않고 다 맛있다. 진희는 손가락 끝에 묻은 초콜릿을 핥느라 바빴다.
“진영이 형이 신경 쓰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도 진영이 형에게 관심이 있어.”
그 이야기를 들은 진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아무 문제 없잖아. 뭐가 문제인데? 기본적으로 너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이구만.”
“진영이 형은 그 여자가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어.”
“아니라고 말했어?”
“말했는데 소용이 없어.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겠대.”
진희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네가 그 여자분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진혁이 네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하지만 그 여자가 널 좋아하는지 아니면 백진영 바리스타님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 그 여자분이 직접 누굴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
“내 케이크하고 진영이 형의 커피가 좋대.”
“그건 사람을 좋아하는 거랑은 상관없지. 진영 바리스타님이 먼저 고백할 생각은 없대?”
“직장 상사가 고백을 하면 거절하기 힘들 거라고 말을 못 꺼내고 있더라. 후우, 난 괜히 중간에 끼어 있어서 불편해.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 버리고 싶다.”
정말로 사소한 문제다. 교주의 권한으로 각각 남녀를 소환해 혼인을 하고 싶은지 물어본 다음에 둘 다 좋다면 혼인령을 내려 전답을 주며 결혼시켜 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진혁이 속마음을 토로하자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진영 바리스타님은 솔직히 성격도 좋고 호감형에 금수저잖아. 옜다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자기는 다리가 불편해서 여자들이 안 좋아할 거래.”
“피곤할 때 조금 다리를 저시긴 하지. 그런데 정말 좋아하면 그게 큰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은데? 자기가 열등감이 있나 보다.”
“그런 것 같아.”
“그 다리, 재활의학과에서 치료받으면 좀 더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자신감도 도로 생길 거고.”
“어, 그러네. 다리가 나으면 알아서 고백하고 연애하겠다. 고민할 필요가 없군.”
진혁은 해결 방법을 깨달아 기뻐했다.
‘어디 다리가 나아도 고백하지 않나 두고 보자.’
어렸을 적에 교통사고 때문에 다쳤다고 들었다. 적당히 병원 치료를 권유한 이후에 중간중간 다리의 근육이 살아날 수 있도록 도우면 될 것이다.
“희망을 갖고 치료를 받아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다리가 낫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할 수도 있어.”
“나을 거야.”
진혁이 확신을 갖고 중얼거렸다. 진희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도 비슷한 고민 있어.”
“무슨 고민인데?”
“일봉 매니저님이 연애에 관심이 없어.”
“어차피 네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며.”
“하지만 나랑 제일 친한 언니란 말이야. 일봉 매니저님 이상형이 뭔지 알아?”
“모르지.”
“두 사람이 친하잖아. 좀 물어봐 줘.”
“내가 그런 걸 왜 물어봐야 하는데?”
진혁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진희가 한심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물어보면 오해할 수 있으니까! 내가 일봉 쌤을 좋아해서 물어보는 것 같잖아.”
“그럼 서미란 씨보고 직접 물어보라고 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 진혁을 보며 진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미란 언니인 줄 어떻게 알았어?!”
“일봉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시선을 떼질 못하잖아. 그걸 어떻게 모르냐? 바보가 아닌 이상.”
그쪽을 볼 때마다 심박 수가 급변동해서 처음엔 심장병으로 오해했을 정도였다. 진혁이 피식피식 웃으며 말하는데 진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봉 쌤은 모르잖아.”
“내가 얘기해 줬는데.”
“뭐?!”
진희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그럼 일봉 쌤은 지금 미란 언니가 자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잖아?! 알면서 그렇게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안 믿더라고.”
“엑.”
“미란 씨같이 미인이고 능력 좋은 사람이 자길 좋아할 리가 없다던데?”
“…… 백진영 바리스타님이랑 똑같은 상황이네.”
진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여튼 일봉 쌤이 눈이 없는 건 아니네. 미란 언니가 예쁘긴 예쁘지. 난 그것도 모르는 줄 알았어.”
“미란 씨한테 고백하라고 해.”
시계를 내려다본 진혁이 말했다.
“난 조금 있으면 출근해야 되는데, 지금 갈 거야? 서울역까지 데려다줄게.”
쌓여 있는 결승전 분석 서류의 양을 보면 그녀가 진혁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가게에서 일하는 진희가 시간을 쪼개서 영상을 보고 분석해서 정리해 왔다. 한두 시간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꼭 필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이 고맙다. 진혁은 진희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괜찮아. 알아서 갈 수 있어.”
“걱정되는데.”
“열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은 무슨.”
진희가 웃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브라이언 쉐프 결혼 케이크는 꼭 바꿔. 봉황이든 원앙이든 결혼식장에서 새 목 부러뜨리는 건 난 절대 반대야.”
“…… 알았어, 참고할게.”
◈ ◈ ◈
이것저것 실험해 보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난 며칠간 자아 찾기 케이크부터 삼종 웨딩 케이크까지 다양한 케이크를 만들며 놀았던 진혁은 상쾌한 기분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대비는 충분히 했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방송국에 도착했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여기 올 일도 없겠군.’
그는 태평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걸었다. 지나가던 보이그룹 아이돌 멤버들이 일제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들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딴따라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춰 행동해야 하니, 쯧쯧.’
지나다니는 배우나 직원들은 본체만체 스쳐 지나가는데 오직 아이돌 그룹만이 방송국에 오가는 모든 사람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한다. 진혁은 그 점이 신기했다.
“오셨습니까! 임진혁 쉐프님.”
“안녕하세요.”
“메이크업 먼저 하시고, 사전 인터뷰 진행하겠습니다. 아시죠?”
“알죠.”
하루 이틀 해보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해져 있다. 살기라곤 없는 여자가 태연한 태도로 눈썹 깎는 칼을 들어 얼굴에 대도 움찔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칼 든 여인들이 살기가 없다는 점이 더 신경 쓰였지. 엄청난 살수일 수도 있으니까. 처음에는 같잖은 짓을 한다면 바로 목부터 날릴 수 있도록 준비를 했지만, 지금은 손목 정도를 자르는 선으로 봐줄 수 있도록 지켜보고 있지.’
보드라운 담비 털 붓은 피부를 간지럽히며 살굿빛 가루를 발라준다.
“오늘은 임진혁 쉐프님을 만나는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빛나게 해드릴 거예요.”
기합이 들어간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신나서 말했다.
“눈썹은 일부러 가볍게 올려서 더 밝은 인상으로 보이게 해드렸어요. 원래 피부가 좋으시지만, 카메라에서 모공이 보이지 않게 프레스드 파우더로 꼭꼭 눌러 드렸고요. 손으로 얼굴 만지시면 절대 안 되세요!”
“알겠습니다.”
간지럽고 불편하기만 한 메이크업 과정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즐겁다.
헤어 스타일리스트는 머리카락을 하나씩 하나씩 다듬어 올리며 아쉬워했다.
“그 하얀 모자 꼭 쓰셔야 해요? 이렇게 잘생긴 머리를 모자로 가려야 하다니 너무 아까워요.”
“조리모는 꼭 써야죠.”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까지 마치고 나서 이희주가 왔다.
사전 인터뷰를 위한 질문들은 진혁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일 적은 경력을 갖고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지금 최종 우승 직전, 결승전까지 도달하셨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혁은 진희가 미리 가르쳐준 대로 겸손하고 예의 바른 대답을 했다.
“부족한 저에게 과분한 명예일 따름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평소 성격과 다른 재미없는 대답에 이희주가 질문을 계속했다.
“우승을 위한 특별한 전략이 있으십니까?”
“여동생과 함께 지난 시즌 영상을 보았습니다. 유사한 주제가 나온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했죠.”
“지난 시즌 마지막 화에서는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케이크’를 주제로 했지요? 질문은 쉽지만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죠.”
“진혁 쉐프님이 자신을 주제로 케이크를 만든다면 어떤 것을 만들지 궁금해지는데요?”
“원래 제가 생각했던 것은 초콜릿 케이크였습니다.”
“초콜릿과 임진혁 쉐프님이 닮은 점은 무엇이 있습니까?”
“치명적이고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아하하하! 웬일로 농담을 다 하시네요.”
‘진담이었는데.’
조금 시무룩해진 진혁이 역시 진희가 조언해준 두 번째 이유를 댔다.
“흰색은 모든 빛을 반사해서 하얗게 보이고 검은색은 모든 빛을 흡수해서 까맣게 보인다고 합니다. 초콜릿의 검은색은 모든 빛깔을 포함한 색깔이며 진하고 달콤한 단맛은 모든 디저트를 포괄하는 맛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디저트에 제일 가까운 형태죠.”
“그게 왜 진혁 쉐프만의 시그니쳐 디쉬인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것만은 아니에요. 제가 검은색을 좋아합니다. 쉐프복이나 조리복이 새하얗다 보니 흰옷을 입고 나타나는데 예전에는 흑의를 주로 입었죠.”
이희주가 표정을 찡그렸다.
“제가 도움을 좀 드려야겠는데요. 진혁 쉐프가 살아온 삶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무엇입니까?”
“어…… 투쟁(鬪爭), 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쟁이요? 투쟁이라면…… 무엇과 싸워오셨습니까?”
“모든 것이요.”
정파와 사파, 그리고 일월신교 내의 교도들.
지금은 자신의 살의와 무감과 싸우고 있다. 짧은 대답에 이희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과 초콜릿이 관계가 있나요?”
“만일 주제가 이전과 같다면 다른 맛과 싸우고 이겨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보시게 될 겁니다.”
“하하! 우문현답이네요. 이번 주제가 무엇인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심사위원님들께 전달받지 않았거든요.”
진혁은 말없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이희주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우승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부모님께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출근해야죠.”
“예?”
“촬영과 결승전 준비 때문에 가게를 오래 비웠습니다. 기다려주신 손님들을 위해서 특별한 메뉴를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 우승 기념 메뉴죠.”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그럼 준우승 기념 메뉴도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