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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210화 (210/656)

제 210화

진희가 따지듯이 코를 벌렁거리며 말했다.

“나는 27편을 전부 보면서 스텔라 쉐프가 말한 걸 다 정리했단 말이야. 예쁜 걸 좋아한다는 것밖에 못 찾았는데.”

여태까지 심사받았던 경험이 있으니 그 정도는 안다. 케이크를 먹을 때 입꼬리가 올라가는 정도, 눈이 가늘어지며 미소를 짓는 표정, 유난히 빨리 먹는 순간을 살피면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내 빵을 먹인 게 몇 번인데. 주영모 쉐프님은 치즈를 좋아해. 폭신폭신하고 촉촉한 계열을 즐기지.”

진희는 자신이 조사해온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맞아. 그분은 온갖 치즈 케이크 대회하고 치즈 대회를 쫓아다니면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는 취미가 있어. 직접 농장에서 치즈를 만들기도 해서 치즈 매니아라고 불린댔어.”

“재밌어 보이는 취미네. 나도 치즈 케이크 좋아하는데.”

“프로마쥬 케이크를 우리나라에 들여와서 처음 보급한 사람도 주영모 쉐프님이라고 하더라.”

“그건 몰랐네.”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님은 어떤 걸 좋아하셔?”

“존부 쉐프는 뭔가 취향이 없달까? 단맛, 매운맛, 상큼한 맛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긴 하는데 특정한 맛을 즐긴다기보다 이 맛 저 맛이 조화를 이루는 걸 좋아해. 지나치게 단 것도 싫어하고 너무 쓴 것도 싫고 과일 그대로의 상큼한 맛을 살려놓은 것도 싫어해서, 그걸 맞추는 게 까다롭지.”

“과일 맛을 왜 싫어해?”

“과일 맛 케이크를 먹을 바에는 그냥 과일을 먹지 왜 케이크로 만드냐는 느낌인데.”

“내가 조사해온 걸 보면 존부 쉐프가 온갖 혹평을 늘어놓은 동영상이 있는데, 이건 달아서 싫다고 하는 얘기가 절반 이상이야. 그래서 단맛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은은하게 단맛을 즐겨서 그래.”

“흐음. 입맛이 까다롭고 특별한 취향이 없어서 공략이라 말할만한 게 아예 없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RPG 게임으로 치면 최종 보스 같은 사람이라고 유명하던데. 진혁이 너는 아예 다 알고 있네.”

“넌 게임 별로 안 하잖아? 왜 갑자기 게임을 예시로 들지.”

진혁이 달라진 점을 발견해 묻자 진희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배웠어.”

진혁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김은동 씨? 유일봉?”

진혁이 마음속 깊숙이 뻗쳐나오는 살기를 감추었다. 진희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엥? 김은동 씨가 거기서 왜 나와? 도을이하고 미란 언니한테 배웠어.”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음 주제로 유력한 걸 네 개 뽑아왔어. ‘자아 찾기’ 그리고 스타 쉐프 시즌 1, 2, 3에서 결승전 주제였던 것들 세 개야.”

진희가 띄워놓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진혁이 소리 내 읽었다.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 사랑을 깨달은 순간. 겨울의 한 자락. 이거 뭘 하면 될지 알겠다.”

“어?”

“화이트 초콜릿 웨딩 케이크를 만들면 되지. 셋 다 해당되잖아. 하얀색으로 깔고 서리와 눈사람을 놓으면 충분히 겨울 느낌 날 거고.”

진희가 풀 죽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가 조사해 올 필요가 없네. 프로그램 전부 보면서 분석해왔는데…… 다 알고 있잖아.”

진혁이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니야, 고마워. 덕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냥 웨딩 케이크 준비한다며?”

“<자아 찾기> 질문이 나왔을 때 웨딩 케이크를 준비할 수는 없지.”

진혁이 등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부엌으로 다가가 냉장고를 열었다. 그는 냉동실 안에 들어 있던 하얀 상자를 꺼냈다.

“뭐야? 또 뭐 만들었어?”

“브라이언 쉐프의 웨딩 케이크 샘플. 조금 작게 만들었어.”

“나! 나 먹을래!”

진희가 어린아이처럼 보챘다. 아직 겉모습도 보지 못했는데 벌써 입안에 침이 고이는 듯 입맛을 다신다.

“네 케이크 먹어본 지 너무 오래됐단 말이야.”

하얀 상자를 열자 한 쌍의 봉황(鳳凰)이 드러났다. 닭의 머리에 돋아난 오색빛깔 뱀의 비늘을 보고 진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엠씨엠 초콜릿이야? 절반씩 잘라서 비늘로 삼았네. 어떻게 에나멜 껍질에 금이 가지 않게 절반을 잘랐어?”

“다 하는 방법이 있지.”

“웨딩 케이크라기보다 조금 특이한 원앙 조각상처럼 보여. 둘이 목을 비비듯이 감고 있는 게 사이좋아 보여서 좋다.”

“기다려 봐. 잘라줄게.”

진혁이 하얀 접시를 바닥에 깔고 칼을 들었다. 그가 초콜릿 봉황의 목을 내리치자 머리가 부러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텅 빈 목에서 피처럼 붉고 끈적한 것이 꿀렁꿀렁 쏟아졌다. 딸기 주스라고 하기에는 끈적하고 잼이라고 하기엔 묽다. 순간적으로 피인 줄 알고 진희는 크게 놀랐다.

“야아아! 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진혁은 떨어진 머리 안에 붉은 액체를 담아 진희에게 내밀었다.

“어때. 결혼식답고 좋지? 이 머리에 딸기 주스를 담아서 두 사람이 나누어 마시며 천지신명 앞에 혼인식을 올렸다고 고해 올리는 거야.”

“아-니야. 절대로 아아아아니야. 수상쩍어!”

“뭐가 수상쩍어? 원래 전통적으로 결혼할 때는 꿩 잡잖아. 일부러 평화롭게 살아있는 꿩 대신 초콜릿 봉황으로 대체한 건데.”

진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는 진혁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코를 매만졌다.

“진심이야?”

“…… 어어?”

“진짜 브라이언 쉐프한테 이 케이크 줄 거야?”

“음. 네가 먹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초콜릿 비율이 너무 높아서 지나치게 달지 않나 싶거든.”

“아직 안 먹어봤지만 반대야.”

“먹어보고 얘기해야 할 거 아냐.”

“먹으면 찬성할 것 같아서 안 돼! 요즘 세상에 누가 결혼식에 피를 흘려. 그리고 전통혼례에서 닭 안 잡아.”

진희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내가 미리 와서 봤으니까 다행이지. 아까 말했던 화이트 웨딩 케이크, 그런 거로 만들란 말이야. 전에 감호철 어르신과 금천복 할머니 케이크는 잘 만들어줬잖아.”

“한 번 한 걸 또 할 수는 없잖아. 전통결혼식하고도 어울려야 하고.”

진희가 백지에 선을 그었다.

“이렇게 3층 웨딩 케이크로 하고 전통적인 장식을 올리면 어때?”

“전통적인 장식?”

그녀가 그린 스케치를 보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꽃잎이 많고 예쁜 꽃이네. 모란 같지는 않고. 언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게 됐어?”

“무슨 소리야? 난 원래 그림 잘 그렸어. 그리고 이건 엘더플라워야.”

엘더플라워는 딱총나무의 꽃으로, 장미처럼 두꺼운 꽃잎이 모란처럼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화려하게 피어난다. 흰색이 많으나 희미한 분홍빛이나 노란색을 띠고 있는 경우도 있다. 다려 마시거나 술로 만들기도 하고, 빵을 구울 때 쓰기도 한다. 진혁은 흐린 기억을 되살렸다.

“…… 엘더플라워가 왜 전통적인 장식이야?”

“결혼에는 부케. 부케에는 꽃.”

진혁은 봉조(鳳鳥)의 초콜릿 머리를 집었다. 붉고 끈적끈적한 딸기 과육이 가득 담긴 채로 입안에 넣어 깨물어 삼켰다.

“맛있는데 안 먹을 거야?”

진희는 애써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괴상한 웨딩 케이크는…….”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상큼한 딸기 향과 섞여 풍겨오는 초콜릿의 향이 달콤하다.

‘진혁이가 만들었던 케이크는 전부 다 맛있었지.’

처음 만들었던 갤럭시 치즈 케이크와 크림슨 치즈 케이크. 바삭하고 달콤한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 지금 이 향은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부드럽다. 상큼한 것 같기도 하다.

‘우유나 생크림을 섞었을까? 거기에 딸기까지?’

그렇다면 조금 더 연한 맛이 날지도 모른다. 진희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진혁이 눈치를 보았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릇에 덜어 줄게.”

그는 진희가 피 묻은 머리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지, 편평한 등을 칼로 갈랐다. 거북의 형상을 한 등이 절반으로 갈라지자 애플파이가 드러났다. 꿀과 레몬즙, 버터에 졸인 사과 과육이 먹음직스러운 황금색 속살을 함빡 보였다. 저절로 군침이 흐르는 광경이다. 진희가 입맛을 다시자 진혁이 그 파이를 잘라내 한 조각 내밀었다.

“딸기가 아니라 사과였구나.”

그녀는 애플파이를 물었다. 바삭한 겉껍질 안에서 꿀렁하고 흘러나온 사과 잼이 혀 위에 쏟아졌다. 그 다음에 씹힌 것은 치아에 닿아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사과 과육이었다.

‘아니야. 이 부분은 사과 조각이 아닌데? 뭔데 이렇게 부드럽지?’

진희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파이 바닥이었다.

보통 파이의 바닥은 딱딱하기 마련인데 놀랍게도 이 파이는 바닥마저 얇고 바삭바삭하다. 바닥 도우를 무엇으로 썼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겉은 바삭하며 속은 보들보들한 것이 천상의 맛이다.

진희는 손가락에 묻은 사과 잼을 핥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사실은 딸기 잼 같은 것이 든 초콜릿 머리도 먹고 싶어.”

“여기 있어.”

진혁은 어른스럽게 웃으며 황조(凰鳥)의 머리에 딸기 조각들과 잼을 담아주었다. 진희는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바로 입에 넣었다. 보기보다 큰 초콜릿 머리는 입안에 들어가며 쪼개졌다. 안에 들었던 딸기 과육이 폭발하듯 입천장과 혀 위와 치아의 뒤에 달라붙었다. 조금 전에 맛본 사과는 솜사탕처럼 보드랍게 뭉개졌던 것과 다르다.

‘여기에는 아삭한 맛이 남아있어.’

진희는 눈을 감았다. 폭발적인 딸기향 뒤에는 진한 다크 초콜릿 맛이 느껴졌다. 단 딸기 맛 다음이기에 달콤함보다 씁쓸함이 더 강하다. 혀에 사무치게 단 딸기잼이 다시 드럼을 두드리듯 존재감을 드러내고 다시 한 번 다크 초콜릿의 쌉쌀한 맛이 베이스처럼 나지막하게 깔린다. 밴드의 음악처럼 조화롭고 섬세한 맛에 감동한 진희가 입을 열었다.

“나, 네가 아까 말했던 말 뭔지 알 것 같아.”

“무슨 말?”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의 취향. 너무 달지도 않고 너무 쓰지도 않고 두 맛이 조화를 이루는 것.”

“그렇지? 존부 쉐프, 취향 나쁘지 않아. 내가 맨 처음에 만들었던 치즈 케이크도 아드레아노 쉐프의 레시피를 개량한 거였지. 정식으로 사부로 모시면 배울만한 게 많긴 할 거야.”

진혁이 진희를 바라보며 웃었다. 진희는 그 여유 있어 보이는 웃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노인네처럼 웃어?”

“뭐?”

“네 시선 말이야. 내가 어린애인 것처럼 보고 있잖아.”

진희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리며 따졌다.

“어린애 맞잖아.”

“너랑 나랑 동갑이거든?”

진혁이 피식 웃었다.

“나도 어린애 할게.”

네가 그렇게 유치하게 나온다면 해준다는 투다. 진희는 입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건 진심으로 웨딩 케이크라고 하면 안 돼. 부정 탈 것 같다고.”

진혁이 피식 웃으며 티슈를 내밀었다.

“입가에 딸기잼 묻었다.”

“아, 아무튼! 연애 고민을 상담하고 싶다며. 그거나 얘기해 봐. 백진영 바리스타님이지?”

“어떻게 알았어?”

“네가 친한 사람은 유키코 쉐프랑 백진영 바리스타님 둘밖에 없잖아. 유키코 쉐프는 연애 고민을 남한테 털어놓는 타입이 아니니까 백진영 바리스타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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