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9화
“알지.”
“소망시에서 170cm 넘는 여자는 나랑 언니밖에 없는 것도 알죠?”
“…….”
“마스크 껴도 키만 보면 다 알 텐데? 겸업금지 조항 어기고 징계받으려고?”
“하아아. 도대체 남들은 다 어떻게 연애를 하는지 모르겠어.”
“게임으로 연애를 배우려는 것부터 잘못됐어요. 나도 너무 답답해.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요?”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
“몇 달 동안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진전되는 게 전혀 없잖아요. 나한테 얘기해도 해결되는 게 없고.”
서미란이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보통은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었거든.”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보고 따라 했더니 효과가 있었다고요?”
진희가 못 믿겠다는 듯 말하자 서미란이 설명했다.
“정확히는 따라 한 건 아니야. 매일 사무소에 출근하는데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거든? 특별히 내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필연적으로 만나기만 하는 거야. 직장이 같으니까.”
“그래서요?”
“하루에 한 번씩 만나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갑자기 고백을 해.”
“음…….”
“그런데 일봉 씨는 고백을 안 해.”
“…….”
진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이 개연성 없는 정황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지 깨달았다.
‘언니가 아름다워서 그래.’
확실히 서미란은 미인이다. 소망시에서 ‘미스 소망’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모델 대회를 했을 때도 3년 내내 1위를 차지했다.
공무원이라기보다는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니 그녀가 특별한 행동 없이 그냥 인사만 해도 호감이 쌓이고 친밀해지는 것이다.
자기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데 익숙해진 미란은 지금처럼 ‘자신이 앞에서 알짱거려도 상대방이 다가오지 않는 경우’를 처음 경험하는 중이다.
‘그래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뚱한 방법을 제안한 거구나.’
진희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미란 역시 소주잔을 부딪치자 찰랑 소리가 나며 소주 방울이 허공에 튀었다. 흘러내린 술을 닦아내며 진희가 천천히 말했다.
“일봉쌤은 목표가 있거든요. 진혁이랑 똑같은 속도로 진혁이 형만큼 맛있는 빵을 만드는 게 목표래요. 조금만 더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매일같이 잠을 줄여가면서 노력하고 있어서 주변이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미란이 고개를 숙였다.
“좋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너밖에 없다, 얘.”
그녀는 가득 찬 소주잔을 원샷하더니 비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목표 때문에 한결같이 노력을 계속한다고 해서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니야. 고등학교 3학년 애들도 고백하고 사귀고 할 건 다 한다고. 그냥 내가 취향이 아닌 것 같아.”
진희는 곱창을 한 점 집어 씹었다. 이름 모를 보랏빛 줄기 잎사귀와 함께 씹으니 아삭하면서 쫄깃한 것이 아주 일품이다.
“언니, 이거 좀 먹어봐요. 맛있다. 소주랑 진짜 잘 어울려.”
“크하!”
빈 초록색 유리병이 그득하게 쌓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희는 반쯤 인사불성이 된 미란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같은 산목아파트의 다른 동에 살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늘 너무 늦었다.’
가족들끼리 교대로 쉬기로 했기 때문에 내일은 진희가 쉬는 날이다. 쉬는 날이라고 해도 너무 늦었다.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울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야?”
<진희야. 나야.>
좀처럼 연락하지 않는 쌍둥이 남매다. 진희는 놀라 심장을 감싸며 물었다.
“야, 임진혁. 이 시간에 무슨 일인데? 어디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야. 너 연애 상담 잘 하냐?>
진희는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긴급한 일이야?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나 말고 다른 사람.>
“혹시 일봉쌤?”
전화기 너머에서 진혁이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겨울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스산한 침묵이 흘렀다.
<너 유일봉이 좋아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해.”
<그럼 됐어.>
“야! 무슨 일인지 사정을 설명해 줘야지. 그리고 나 내일 올라가서 너한테 할 말 있어!”
<맞다. 그게 벌써 내일이구나. …… 알았어. 나도 반차 냈으니까 오전에 봐.>
◈ ◈ ◈
다음날 숙취 없이 깨어난 진희는 미리 부모님과 의논한 대로 기차를 탔다. 서울역까지 마중 나온 진혁이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던 건 뭐야. 급한 거야? 부모님 어디 아프시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야. 집에 가서 얘기하자.”
별것 아닌 일이라면 전화로 사정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꼭 올라와서 얘기한다고 우기며 어떤 일인지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진혁은 사소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가 진희가 물었다.
“결승전 빵 준비는 잘 하고 있어?”
“내가 결승전에 나갈지 나가지 못할지는 비밀이라 말 못 해.”
“원래 오늘 그거 연습하려고 휴가 낸 거잖아. 내가 도와줄게.”
진혁이 피식 웃었다.
“고마워.”
결승전에 대비해 다양한 빵을 구상하고 만들어보려고 직장에 양해를 구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쉰다고는 밝히지 않았지만 다들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족이 더 중요하다.’
지하철을 타고 오피스텔에 도착해서야 진희는 자신이 왜 왔는지 이유를 밝혔다.
“나는 네 결승전 준비를 도와주러 왔어.”
그녀가 가방을 열어 미리 준비해온 파일을 건넸다.
“이것 좀 봐.”
두툼한 A4용지 바인더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뭐야?”
“일단 여기 앉아 봐. 내가 찬찬히 설명해 줄게.”
그녀는 들고 온 노트북에 전원 코드를 연결한 후 전원을 켰다.
“작년 결승전에서 이런 게 있었어.”
진희가 불러온 문서 제목을 보고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 시즌 1 결승전 분석? 이런 건 또 언제 만들었어. 내가 결승에 나갈 거라고 생각해서 만든 거야?”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진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는 마우스를 여러 번 클릭해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의 페이지를 넘겼다. 우승 트로피를 든 여자 사진이 보였다.
“너도 알다시피 작년 우승자는 메리사 리. R 호텔 페이스트리 키친에서 7년간 일했던 여자야. 지금은 디저트 팩토리에서 아드레아노 존부 직속으로 새로운 메뉴 개발을 하고 있어.”
“음.”
“작년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자신을 표현하시오.’가 주제였어. 아마 이건 아드레아노 존부가 선정한 주제로 보이는데, 메리사는 자신이 혼혈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준다며 화려한 중국 스타일 빵 안에 멕시코식 소스를 담았어. 살사 소스에 아보카도를 조금 섞었다고.”
진혁이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별로 중국 스타일 같지는 않은데.”
“중국은 넓으니까 네가 모르는 빵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시작부터 우승 후보였던 니콜라스 헤이스는 준결승까지 승승장구했는데 마지막에 삐끗한 거야. 뜬금없이 태국식 그린 커리풍 소스를 올린 케이크를 만들면서 자기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가 망했지.”
진혁이 눈을 껌뻑거리며 듣다가 물었다.
“그래서?”
“나는 원래 메리사 리가 너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 초반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않다가 세 번째 라운드에서부터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 그렇지만 지금 너의 모습은 니콜라스 헤이스하고 비슷해!”
“아니.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
“너는 빵으로 시체를 만드는 이상한 짓을 하면서 남들이 그걸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 그 점이 니콜라스랑 비슷하단 말이야.”
“죽은 자의 살코기로 빵을 만드는 게 이상한 짓이지. 빵으로 만든 시체 모양 빵은 그냥 빵이고.”
빵은 아니지만 실제로 ‘인육 만두’를 목격한 적이 있는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진혁이 아직 살수조의 일원으로서 누군가의 명령을 듣던 때의 일이다. 진가객잔의 주인이자 숙수였던 진 씨는 손님 중 일부를 도살해 인육 만두를 내놓았다. 그러다가 일월신교 교도를 죽이는 실수를 하게 되어 진혁을 만났다.
진혁은 진 씨에게 역지사지가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진 씨의 허벅지살을 베고 약초로 지혈해 생명을 유지하게 했다. 그리고 그 살점을 진 씨에게 도로 먹였다.
진희는 황당해하며 말했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누가 시체로 빵을 만들어. 호러 극장도 아니고.”
“…… 아니. 뭐, 그렇다는 이야기지.”
말실수를 했다. 진혁이 머쓱해 하며 웃자 그녀가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그래서 내가 준비해봤어. 결승전 전에 네가 꼭 해야 할 것들.”
새하얀 컴퓨터 화면에는 빈 커서만이 깜빡였다.
“…….”
“진혁아. 네가 생각하는 너 자신은 누구야?”
철학적이고 심오한 질문에 진혁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임진혁.”
“그래, 네가 임진혁인 건 나도 알고 너도 알지. 다 알아. 그런데 임진혁은 어떤 사람이냐고.”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한때 마교라고도 불리던 일월신교의 교주였다. 그 전에는 피에 물든 살수로 정파건 사파건 가리지 않고 명령을 따라 죽이고 다녔다.
교통사고 피해자이자 식물인간이기도 했으며, 평범하고 무난한 말년 병장일 때도 있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제빵사가 되고 싶었으나 막상 제빵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철없는 대학생이었고.’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며 진희의 쌍둥이 오빠다. 진혁은 그 점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예전에 귀환 따위는 포기하고 권력과 풍요를 누렸을 것이다.
“네 오빠 겸 부모님 아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케이크로 빚어내야 할까? 화목한 집을 만들고 그 안에 가족들 모두를 만들어 넣을까? 그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순한 생각이다.
진혁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아이디어를 바로 폐기했다.
‘쿠키 하우스는 밀실 살인 사건 배경으로는 좋아. 하지만 가족들을 그 살인 사건 시리즈 배경인 쿠키 하우스 안에 넣고 싶지는 않은데.’
“그걸 누가 모르냐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진혁이 네가 ‘너’를 어떤 케이크로 표현하냐는 것이냐야.”
진희가 툴툴거리며 마우스를 다시 클릭했다.
“음. 초콜릿 케이크?”
“왜?”
“속이 시꺼멓잖아.”
담담한 대답에 진희가 코웃음을 쳤다.
“속이 시꺼멓기는 무슨. 너 완전 호구잖아,”
“아니거든.”
“손 빠르다고 다른 사람 일 다 해주는 게 호구지, 호구.”
“…….”
“딴짓하지 말고 집중해 봐. 내가 스타 셰프 시즌 1, 2, 3도 분석해 왔어. 스텔라 쉐프는 거기서도 출연했으니까.”
진희가 웃으면서 마우스를 클릭하는데 진혁이 대답했다.
“스텔라 위스커스 쉐프는 정교하고 화려하면서 예쁜 걸 좋아하는데, 치밀한 질감에 새콤한 맛이 있는 걸 좋아해.”
“엑?”
놀란 진희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조사한 것보다 더 자세하잖아. 어떻게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