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8화
“들어보니까 재미있네요. 쉐프님이 만드시는 케이크나 빵들이 전부 자신을 투영해요. 은동이는 시골 청년답게 건강에 좋고 시골 느낌 나는 거친 빵을 만들고 싶고. 유키코 쉐프님은 섬세한 성격답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걸 좋아하시고, 아드님이 좋아하시는 원색의 케이크나 빵을 만드시고요.”
가영이마저 말을 이었다.
“임진혁 쉐프님은 가족들을 아끼시는 나머지 여동생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개성 있는 케이크를 만드시잖아요? 재능도 있으시지만 철저하게 노력하시는 타입이고.”
“아니, 전혀 아닌데.”
“아니긴요!”
진혁은 할 말이 없어 커피를 마셨다. 진하면서도 과일 향이 은근히 풍기는 에스프레소 위에는 산봉우리처럼 도톰하게 크림이 올라와 있다.
희디흰 크림은 촉촉하면서도 쫀쫀하다. 납작한 빨대로 휘젓자 하얀 크림이 시커먼 커피에 섞이며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그윽한 커피 향을 들이마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그린 워터 샌드위치를 포함해 그린 워터 농장을 총괄하고 있는 민병철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난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
“네!”
진혁이 통화하는 동안 직원들은 수다를 떨었다.
“예은이 너도 연습하다 보면 너만의 개성이 있는 케이크를 만들게 될 거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가영 언니?”
“응. 나도 처음에 도자기를 만들 때는 스승님이 만드신 걸 따라 하기 급급했거든. 그러다가 어느 정도 만들 수 있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내 스타일이라는 게 생기더라.”
“언니 도자기 진짜 멋있잖아요. 화려한 장식은 없는데 단순하고 질박한 느낌. 옛날 조선 시대 달항아리같이 부드러운 곡선이 너무 좋아요.”
“호호호.”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진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영 씨 도자기는 저도 좋아합니다.”
김가영은 뺨을 붉혔다. 도자기가 좋다 한 것이지 사람이 좋다 하지 않았으나 그 한 마디가 설탕보다 달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다가 다시 다물었는데, 백진영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진영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직원들과 리처드 베이커까지 돌아간 후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백진영이 진혁에게 물었다.
“아까 무슨 전화였어? 별일은 없지?”
“좋은 전화. 샌드위치 공장이 순조롭게 영업하고 있다더라.”
“계속 신경 쓰더니 잘됐네! 축하한다.”
“샌드위치 공장이라니요?”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유키코가 질문했다.
“그린 워터 샌드위치 공장에 기계를 들여놓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어제부터 정식 생산이 시작됐다고 하는군요. 전국적으로 급식 위주로 조금씩 꾸준히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전달을 받았습니다.”
진혁이 성과에 대해 설명하며 흐뭇해하자 유키코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진혁 쉐프는 정말로 양파 같은 분이세요.”
“양파보다 할라피뇨에 가깝지 않아요? 얘가 좀 사람 눈물 나게 맵고 예리한 면이 있어서.”
백진영이 킥킥 웃으며 말하자 유키코가 정정했다.
“아니, 까도 까도 새로운 모습이 보여서요. 쇼 촬영할 때 보여주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성장하셨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보여주신 모습을 보니 더…….”
쿠키 하우스를 보고서도 한 번 더 놀라고, 그 다종다양한 쿠키들의 맛과 질감에서 감탄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업적인 재간까지 있으니 더 놀랍다.
‘생각해보면 진혁 쉐프님은 은동 씨보다도 나이가 한참 어린데도 오히려 더 연륜이 있어 보여. 실력에서 나오는 자신감 때문인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김은동은 평범하다. 반죽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 서너 번 연습해서 간신히 익힌다. 새로운 것을 스스로 생각해내는 것은 어려워하지만 여러 번 몸에 익힌 것은 능숙하게 해낸다. 성실하고 효심이 깊다.
‘그 정도면 괜찮은 쉐프지.’
지각하지 않고 성실하며 제빵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만으로도 쓸만한 꼬미 쉐프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런 은동을 보다가 진혁을 보면 무시무시한 격차를 느낀다.
‘분명히 꼬미 쉐프의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엄청난 재능과 노력으로 나와 비슷한 자리까지 올라왔어. 어쩌면 나보다 더 위일지도 몰라.’
유키코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백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진혁이가 좀 대단하죠.”
마치 자기 일처럼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형, 왜 그래.”
사이 좋은 두 사람을 본 유키코 역시 미소를 지었다.
“진혁 쉐프님. 이제 다음 라운드는 결승인데, 거기서는 어떤 케이크를 만드실 생각이세요?”
“별생각 없는데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지었다.
“브라이언 쉐프의 웨딩 케이크를 맡아 주신다고 들었어요. 만일 웨딩 케이크가 테마로 등장한다면, 제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글쎄요. 심사위원들이 어떤 주제를 낼지 짐작도 안 가는데요. 그런 테마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허락을 받은 유키코가 희색이 만연하여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결혼식 때에도 또 잘 부탁해요.”
“초대해 주신다면요?”
“물론이죠! 정말이지 진혁 쉐프님을 만난 후에는 좋은 일들만 잔뜩 생겨요.”
“정말요?”
유키코가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탈락한 것이 바로 어제다. 그건 좋은 일이라곤 하기 어렵다. 진혁이 진중하게 묻자 그녀가 차분히 대답했다.
“어제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재민 씨가 일어나서 걷기라도 했나요?”
“앗! 어떻게 아셨어요?!”
유키코가 정말로 화들짝 놀라 말했다.
‘그만큼 진기를 불어넣었으면 당연히 일어나야지.’
어제 촬영을 마친 후, 재민이 등에 걸치고 있던 담요가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진혁은 자연스럽게 담요를 주워 어깨에 다시 덮어주면서 소량의 진기를 흘려주었다.
신경은 깨어나고 근육은 탄탄해져서, 몇 초라도 벽을 짚고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 주기 위함이었다. 통증이 없지는 않겠지만 근성이 있다면 다섯 발짝 정도는 뗄 수 있을 정도로 맞추었다.
바람 없는 무대 위에서 어찌하여 담요가 떨어졌는지 의문을 갖는 자도 없었다. 허공섭물은 참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유용한 기술이다.
“선호가 처음 아장아장 뒤뚱거리며 걸으며 저한테 다가왔을 때 진짜 감동했거든요. 그런데 그이가 일어나서 다가와서 더이상 제가 내려다보지 않고 눈높이가 같아져서…….”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꾹꾹 눌렀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니까 좋은 일들만 생기나 봐요. 두 분을 만나서 정말로 기뻐요.”
유키코가 여러 번 감사의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가게 문이 닫히고 전기와 난방을 끄고 나서 백진영이 물었다.
“진혁아. 내가 할 말이 있다.”
“음?”
“너 혹시…….”
백진영의 심장이 두 배는 빠르게 뛰고 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낀 임진혁이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삼촌한테 무슨 말을 들었나? 갑자기 빚이라도 졌나?’
진혁이 침착하게 묻자 백진영이 심호흡을 했다.
“후, 아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하고 양손은 꽉 쥐고 있는 꼴이 아무리 봐도 무슨 사달이 난 것이 분명하다.
“무슨 일인데? 말을 해.”
백진영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진혁은 손을 뻗어 백진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진기를 미미하게 흘려 넣어 주기도 했다.
“아니, 그게. 별일은 아닌데.”
“별일도 아닌데 왜 말을 못 해?”
진혁의 진기를 일부 전해 받아 안온하고 따뜻함을 느끼며 안심하게 된 백진영은 내심을 털어놓았다.
“너 혹시 김가영 씨 좋아하냐?”
“?”
그것은 진혁이 생각하던 사업적인 일이나 인간관계 고민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임진혁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자 진영이 심각하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너도 가영 씨한테 관심이 있지?”
“아니, 없는데.”
“아까 도자기를 칭찬하는 척하면서 관심을 보였잖아.”
“아니야.”
“사실대로 말해도 좋아. 나도 비겁하게 굴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행동할 테니까, 그녀가 누구를 선택하든지 우리 우정은 변치 않게…….”
백진영이 허공에 삽질하는 가운데 진혁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정말로 진짜 전혀 관심 없어.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가영 씨가 형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진혁에게 있어 괜찮은 도자기를 만드는 풋내기 장인의 새싹 같은 존재였다.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 줘서 고맙지만 그뿐이다. 정색하며 말하는 진혁에게서 진심을 느꼈는지 백진영이 숨을 내쉬었다.
“…… 그래?”
“응.”
“너는 그렇지만 가영 씨가.”
그녀는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백진영은 침묵했다. 슬퍼 보이는 그 안색을 본 진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왜.”
찌질하게 군다. 진혁은 팔짱을 꼈다.
‘진영이 형이 아니면 벌써 한 대 쳤다.’
계속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그냥 한 대 때려서 기절시키고 집에 갖다 놓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한숨 잘 자고 일어나면 더이상 쓸데없는 헛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백진영이 터무니없이 약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진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백진영은 우울하게 말했다.
“가영 씨가 네가 만드는 빵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오늘 쿠키도 그렇고.”
진혁이 코웃음 쳤다.
“세상 사람들은 다 내 빵을 좋아해. 형도 좋아하잖아. 그리고 가영 씨는 형 커피도 좋아해.”
“그건 그래. 하지만…….”
“뭐가 문제야?”
백진영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 하지만 나는 절름발이잖아.”
◈ ◈ ◈
소망시 산목아파트 앞 유비 포차.
민병철의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다. 서미란과 임진희는 곱창을 가운데에 놓고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 있었다. 진희가 따르는 술을 양손으로 곱게 받으며 미란이 말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크리스마스 때 일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거야.”
“잠깐. 우리 가게에서요? 왜?”
“빵집은 크리스마스 때 제일 바쁘다며. 고생을 같이하면 금방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터무니없는 소리다. 진희는 서미란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 거절했다.
“언니는 공무원이잖아요. 투잡하면 안 되잖아. 크리스마스 때는 바쁘니까 단기 아르바이트를 한두 명 정도 뽑긴 할 거예요. 언니 말고 다른 사람으로.”
“공무원이라고 차별하는 거야?”
“몰래는 무슨…… 마스크에 선글라스 끼고 케이크 팔 일 있어요? 그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디서 얻은 거야?”
“…… 여기서.”
미란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용 게임기를 내밀었다. 한때는 새것이었지만 나온 지 여러 해 지난 1000번대다. 게임 화면을 본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제발 좀!”
“이게 지금 내 상황이랑 비슷한 게임이야. 이 주인공이 카페에서 일하는 제빵사하고 연애하는데, 크리스마스 때 판매를 같이하면서 손이 스치는데 그때 짜릿한 느낌이 들거든? 그게 서로를 이성으로 의식하기 시작하는 첫 계기가 돼.”
“일단 언니, 시장님부터 부서장님, 그리고 언니의 직속 상사인 김 과장님까지 전부 저희 가게 손님인 거 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