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7화
쿠키보다 초콜릿이 더 많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녀가 잠시 넋을 잃은 사이 빠르게 첫 번째 쿠키를 삼킨 백진영이 야심 차게 남은 쿠키를 노렸다.
“진혁아, 이거 진짜 맛있다. 뭔 놈의 쿠키가 두부처럼 녹아내려. 너 안 먹으면 내가 먹어도 돼?”
군침을 흘리며 탐욕스레 묻는 말에 진혁이 빙긋 웃으며 양보했다.
“여기 있어.”
남은 지붕 쿠키 한 조각을 받은 백진영이 힐긋 김가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막 감은 눈을 뜨고서 입을 벌리던 참이다.
가영의 시선이 임진혁을 향했다.
진혁의 앞에 있던 접시가 빈 것을 본 김가영의 얼굴에 일순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늦었다.’
백진영은 김가영을 보고 멈칫했다.
“가영 씨, 이거 먹을래?”
“진짜요?”
김가영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으로, 예의를 차리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
예은이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김가영과 백진영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하던 김은동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진혁 쉐프 쿠키를 백진영 바리스타님이 양보하시는 일이 다 있네요.”
“난 원래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야.”
이 중에서 제일 눈치가 빠른 편인 유키코와 리처드 베이커가 눈빛을 교환했다.
‘저 두 사람, 무슨 사이야?’
‘이제 진도 나가는 건가요?’
과연 이 크나큰 양보가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는 데에 큰 걸음이 되어줄 것인가?
쿠키를 입에 문 김가영이 눈을 번쩍 떴다.
“임진혁 쉐프님! 지금 지붕 기와 초콜릿 칩 쿠키 전부 맛이 다른 건가요?!”
조금 전에 느꼈던 쿠키는 진하고 차가우며 녹아내리는 다크 초콜릿 칩이 포인트였다. 하지만 백진영이 양보해 준 쿠키는 생크림 향이 진하게 풍기는 밀크 초콜릿 칩 쿠키였다.
진혁이 슬며시 웃었다.
“다 똑같은 맛이면 질리잖습니까.”
백진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괜히 양보했다.”
그 이야기를 똑똑히 들은 김가영이 눈을 깜빡이며 백진영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사장님. 그런데 너무 맛있네요.”
백진영이 머쓱해 하며 말했다.
“맛있다니 다행이다.”
“후훗.”
분명 계절은 겨울이나 두 사람 사이에는 봄이 흐른다. 나비가 꽃에 앉은 것처럼 살가워진 분위기 속에서 유키코가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아몬드 초콜릿 쿠키던데? 그런데 쿠키가 무슨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김은동 역시 자신이 무슨 맛을 느꼈는지 이야기했다.
“버터 쿠키 종류를 우유랑 같이 먹으면 입안에서 녹는 느낌이 들잖아요. 이건 음료를 따로 마시지 않아도 목구멍으로 주르륵 흘러가네요.”
『나는 이렇게 부드러운 쿠키보다 바삭바삭한 쿠키가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태풍처럼 맛있는 쿠키야. 다른 쿠키하고 비교할 수가 없군. 언제부터 판매할 생각인가?』
『판매는 하지 않는다는데요?』
『뭐? 그렇게 아까운 짓을 한다고? 집에서 혼자 구워 먹을 셈인가? 그건 쿠키 계의 손실이라고! 호날두가 축구를 하지 않는 것과 똑같아!』
“그렇다는데?”
백진영이 통역해 주자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한정판 잭 프로스트 케이크. 겨울마다 팔 수 있게 해주시면 쿠키 레시피 공유해 드리죠.”
『오! H&J 한정인가? 아니면 진혁 쉐프가 있는 가게라면 어디라도 가능하다는 조건으로?』
“쿠키를 만들어서 여기저기서 팔고 싶으시다면 후자로 해 주시죠.”
『오케이, 딜!』
백진영의 통역을 거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낸 리처드 베이커가 눈을 빛냈다.
『이 쿠키는 마법이라고!』
『리처드 쉐프, 심지어 그런 쿠키가 하나가 아니에요. 이 지붕에 있는 기와 조각들, 다 다른 쿠키에요.』
『뭐?!』
유키코가 설명해 주자 리처드 베이커가 아쉬워했다.
『하나가 아니라니……!』
붉은 곱슬머리를 쥐어뜯으며 안타까워하는 그 모습에 진혁이 피식 웃으며 너그럽게 말했다.
“다른 쿠키 레시피들도 공유해주겠다고 얘기해줘. 잭 프로스트 케이크는 특별하니까.”
『오, 고마워! 그런데 우리 지붕만 먹고 마는 건 아니지? 이 건물 전체를 분해해서 지금 먹을 거지?』
“물론, 지금 잘라서 나눠 줄 거야.”
진혁은 쿠키 하우스를 마저 분해하였다. 다들 신나서 지붕 밑판과 벽, 그리고 창문과 빗장. 벽돌과 기둥, 밑판 주춧돌까지 전부 먹어치웠다.
“같은 반죽을 모양만 다르게 해서 기와랑 밑판, 기둥과 벽돌에 다 썼네요?”
“안에 집어넣는 부재료를 조금 다르게 했지. 어떤 쿠키가 무슨 모양일 때 제일 맛있는지 궁금했거든. 먹어보니까 어때?”
“다크 초콜릿 칩 쿠키는 기둥일 때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약간 두께가 있는 편이, 안쪽의 초콜릿 칩이 골고루 들어갈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유키코가 단상을 말하자 서창덕이 거들었다.
“전 빗장이 최고였습니다. 안에 들어있는 건포도도 새콤해서 잘 어울리고요.”
“나는 굴뚝 모양의 아몬드 쿠키! 좁고 빼곡한 쿠키는 부드러운데 아몬드가 착착 씹히는 게 입에 감기는 맛이었어.”
백진영이 말하자 김은동이 거들었다.
“저도 그 굴뚝이 맛있었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어요.”
예은이 심각하게 말했다.
“전 다 좋아서 뭐가 제일 맛있다고 말을 못 하겠어요. 다크 초콜릿 칩 쿠키는 길어도 맛있고 짧아도 맛있고……. 이건 미역국에 말아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아요.”
“예은아, 그건 아니다.”
김가영이 키득키득 웃었다.
“가영 씨는 아직 감상을 말씀해주지 않으셨는데, 어떤 점이 제일 좋았습니까?”
진혁이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이 쿠키는 식감이 실크처럼 부드럽잖아요? 그래서 함께 녹아들어가는 초콜릿 칩이 다크건 화이트건 밀크건 상관없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몬드나 마카다미아 넛을 넣은 조합도 또 씹히는 질감에서 단계가 생기며 차이가 두드러져서 좋더군요.”
가영은 방금 전에 먹었던 쿠키가 생각난다는 듯 아랫입술을 핥으며 아쉽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예은이 킬킬거렸다.
“언니도 결국 나처럼 다 맛있다는 거잖아요.”
“결론을 내리면 그런 뜻이긴 하지요.”
진혁이 웃었다.
“이 쿠키 하우스 시리즈는 앞으로 더 있어요.”
“다음에는 뭘 만드실 건가요?”
“손목을 긋고 욕조 안에 누워 있는 진저브레드 맨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탕 유리로 욕조를 만들 생각입니다.”
“설마 딸기잼으로 욕조를 채운다거나 하진 않겠죠? 너무 달잖아요.”
“단맛이 연한 딸기 주스를 채울까 싶기도 했는데, 그냥 아예 달지 않은 쉬폰 케이크를 깔아두고 위에 딸기 맛 초콜릿을 갈아서 뿌릴까도 생각했습니다. 장미 꽃잎을 띄운 욕조처럼 만들면 더 우아해 보일 겁니다.”
진혁이 진지하게 설명하는데 유키코가 미간을 좁혔다.
“진저브레드맨 쿠키가 욕조 안에 들어 있고 초콜릿 꽃잎이 뿌려져 있다면 그냥 목욕하는 쿠키 하우스라고 해도 되잖아요? 예쁘고 좋은걸요.”
“하지만 화장실 문이 안쪽에서 잠겨 있어서 밀실이라는 점에 포인트를 두려고 했는데요. 8건의 밀실 살인 사건 시리즈를 쿠키 하우스로 재현하는 게 목적이거든요. 여동생이 8채의 집 모두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전에 유키코 김 쉐프는 진혁에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소재를 사용해 대중이 즐길만한 테마를 만들어라’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이후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원하는 소재를 사람들이 즐기는 방식, 즉 단순하고 귀여워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를 귀엽다고 느끼는지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은 진희가 예쁘다거나 귀엽다고 하는 모양을 추천받아서 그대로 만들고 있지.’
“역시 여동생분 취향이군요.”
“동생분 저랑 취향이 잘 맞을지도 몰라요. 저도 CSI 같은 수사, 범죄극 드라마 좋아하거든요. 나중에 소개시켜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특별히 그런 걸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괜찮아요, 동생분이 좋아하시는 걸 만들어주려고 하시는 진혁 쉐프님 모습이 멋져요!”
예은이 신나서 말했다. 진혁은 눈을 껌뻑였다. 도안을 작성하면서 진희의 도움을 받은 부분이 크다고 생각해 그녀의 역할을 축소하지 않으려고 말했을 뿐인데 오해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아니, 정말로 아닌데.’
『진혁 쉐프도 훌륭하게 궤도에 올랐군. 디저트 서바이벌 쇼를 통해서 성장하면서 드디어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알아냈다는 느낌이야.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똑같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가 되었어. 자신을 관철하면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아티스트가 되었지. 진혁 자네는 진정한 요리의 예술가야.』
리처드 베이커가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유키코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과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셨죠. 저도 제가 진정 원하던 디저트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제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무엇으로 어떤 것을 만들지 계속 고민했거든요.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시장을 조사하며 타깃을 찾아 거기에 맞는 새로운 제품 개발 업무를 반복적으로 하면서 조금 지쳐 있었나 봐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느라 내가 정말로 어떤 것을 만들고 싶었는지 잊어버리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유키코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했다. 김은동이 물었다.
“사실 다 알고 계시지만 저는 우리꼬맹이밀로 만든 발효 빵을 더 맛있게 만드는 게 목표인데. 여기 와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우리꼬맹이밀로 만든 빵이 다른 형태가 되도록 효모를 더 키워내고 보급하고 싶다는 목표입니다. 다른 분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았거든요. 진혁 쉐프님의 경우에는 유기농 천연 재료를 사용해서 가족들에게도 먹일 수 있는 좋은 빵을, 살인이나 시체 같은 공포스러운 소재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게 목적이신 거 같고. 리처드 베이커 쉐프님은 베이커리 오너답게 미국 손님들이 원하는 스타일 있는 식사 빵을 만드시는데. 유키코 쉐프님이 진정 만들고 싶은 빵은 어떤 빵이세요?”
유키코가 제자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진혁 쉐프하고 비슷해요. 내 남편과 아들, 내 부모님이 먹어서 좋아할 만한 빵을 만들고 싶어요. 제 아들은 저를 닮아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알록달록한 색깔이 들어가거나 모양이 화려하면서, 좋은 재료를 쓴 빵을 생각하고 있어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는 시골에서 직접 만든 것 같은 거친 재질에 건강한 빵을 만들고 싶습니다.”
가영이 웃으며 물었다.
“예은이는 어때?”
“저는 웨딩 케이크같이 멋있고 화려하면서 예쁜 걸 만들고 싶었어요. 누가 봐도 진짜 와 멋있다, 우아하다고 할만한 그런 작품을 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 실력은 바닥이고 마카롱도 제대로 못 만들고 그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