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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205화 (205/656)

제 205화

새벽, H&J 베이커리 앤 카페다. 직원들이 출근하기도 전, 가게 안에는 오로지 임진혁과 백진영 두 사람만이 있었다.

“어제 가족들하고 이런 이야기를 했어.”

진혁이 이야기를 마치자 백진영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물었다.

“그건 나도 궁금했어.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삼촌한테서 독립할 꿈을 품고 있었어. 하지만 넌 올해 아버지에게서 독립해서 이제 막 자리를 잡고 있잖아. 인센티브 비율도 높아서 여기서 벌어들이는 돈도 만만치 않고. 사실 네 입장에서는 여기서 몇 년 더 기반을 쌓고 가도 좋은데, 나랑 같이 새로 가게를 내는데 동의한 이유가 뭐야?”

백진영은 막 로스팅을 마친 커피 원두 콩을 골라내고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콩이나 정상적으로 열매 맺지 못한 죽은 콩,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져 있는 콩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어 텅 빈 콩 등이 섞이면 커피의 맛이 변질된다.

콩 자체가 형성되다 만 것을 골라 따로 분리하는 중이다. 숙성된 빵 반죽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오븐에 넣고 온도를 맞추고 온 진혁이 손을 뻗었다.

“이거, 이거. 이거. 벌레 먹었다. 속이 비어 있잖아.”

“햐. 이승주 스승님처럼 귀신같이 골라내네.”

백진영이 감탄했다. 그는 거의 8년째 커피를 만들어 오며 수없이 많은 콩을 봐왔다. 하지만 진혁은 타고난 눈썰미와 빠른 손놀림으로 번개같이 콩을 골라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때는 돈이 없었지만, 지금은 돈이 있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아서 나가는 것이다. 서울의 가게에 스카웃당해서 올 때, 자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고려했다.

하지만 유키코를 고용하려고 했던 시점에 백정흠이 불쾌해하며 거절했을 때 충분히 실망했다.

임진혁은 굳이 본심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

‘유키코 같은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절정급 고수라고 평가할 수 있지. 절정급 고수가 들어오는데 아이 돌보미 같은 혜택을 주는 걸 아까워하다니 사람 쓸 줄을 몰라.’

절정급 고수는 한 성에 서너 명을 넘지 못한다. 명문가라 할지라도 천금을 주어도 붙잡아두어야 할 인재다.

재능있고 경험이 풍부한 자를 쓸데없는 이유를 붙여 거절하다니 남의 위에 있기에 부끄러운 자다.

‘백정흠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진혁이 본심을 숨기고 대강 대답하자 백진영이 수긍했다.

“그래, 돈은 중요하지.”

“굳이 남의 가게에 돈을 벌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남’이라는 단어에 백진영이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이 나하고 지환이 형, 소영이 누나를 다르게 대하는 것처럼.’

“그렇지. 남은 남이지.”

백진영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진혁이 커피콩을 마저 골라내주고서 그릇을 내밀었다.

“유키코 쉐프하고 서창덕이 남으면 가게는 그럭저럭 꾸려 나갈만할걸? 백정흠 사장님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진혁은 유키코 쉐프의 빵을 찾아오는 팬들도 적지 않다고 판단했다.

가게를 완전히 비우는 것도 아니며 자신보다 더 경험이 풍부한 쉐프를 직원으로 묶어놓고 적당한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니 모두에게 합당하다 여겼다. 자신은 계약이 끝나는 대로 떠나는 것뿐이다.

백진영은 골라낸 커피콩들을 흐뭇하게 분쇄기에 올리고 천천히 갈기 시작했다. 달콤쌉쌀한 향이 그윽하게 가게 내부에 흘러나갔다.

오행진의 영향을 받아 좀 더 깊어진 향이 손님들이 머물 자리에도 희미하게 남는다.

“그나저나 저기 있는 저, 박스에 넣어 놓은 건 뭐야?”

“재미있겠다 싶어서 만들어 본 시험작이야.”

“오! 봐도 돼?”

“응.”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유키코 쉐프가 들어왔다. 겨울 날씨에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두 분은 벌써 와 계시네요!”

그녀는 50cm 높이에 달하는 직사각형 상자 두 개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이건 뭐에요? 진혁 쉐프가 또 신기한 걸 만들었나요?”

“나도 이제 막 보려던 참이에요.”

“우와! 보고 싶다!”

진혁이 상자를 열기 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건 정말로 재미있어 보여서 만든 겁니다.”

유키코가 흠칫 놀라며 진혁을 보았다.

“할로윈 기념 인체 모형 같은 건 아니죠?”

“오. 인체 모형은 아닌데 비슷해요.”

“…….”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백진영이 재미있어하며 물었다.

“인체 모형이랑 비슷한 게 대체 뭔데?”

“밀실 살인사건.”

“…… 시체를 만든 거야?!”

진혁은 대답 없이 상자 뚜껑을 분리해 옆으로 벌려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크리스마스 때에 흔히 팔리는 과자로 만든 집과도 유사했다.

크림이 발라진 비스킷 지붕은 비스킷 벽과 기둥으로 견고하게 올려져 있다.

삼면이 막혀있으나 한 면이 뚫려 있어 비스킷 벽 안에 설치된 비스킷 책장과 설탕 창문이 선명하게 보였다. 오른쪽에 있는 파운드 케이크 침대 위에는 생강 쿠키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이전의 발목처럼 무시무시하게 디테일한 시체 모형이 나올 줄 알았던 유키코가 안도하며 말했다.

“이건 비교적 귀엽네요.”

초콜릿으로 눈코입이 그려진 진저브레드 맨 쿠키(Gingerbread Men Cookie)였다.

보통 큰 대(大)자 모양으로 팔을 뻗고 있는데 이 녀석은 팔과 다리를 구부려서 옆으로 누워 있는 것 같은 모양인 걸 보니 진혁이 따로 구워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로테스크한 것 같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것 같기도 하고….”

“저 생강 쿠키는 직접 구운 거죠? 이런 형태의 쿠키 커터가 있나요?”

유키코가 쿠키에 관심을 보이자 진혁이 따로 종이봉투에 담겨 있던 쿠키를 내밀었다.

“이겁니다.”

“호오.”

진저브레드 맨 쿠키는 크리스마스트리 모양 쿠키와 함께 성탄절에 흔히들 구워 먹는 과자로, 보통 생강가루를 넣은 반죽을 구워내 쿠키 커터로 잘라 만든다.

하지만 진혁이 만들어낸 이 쿠키들은 유키코가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쿠키 커터는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쿠키 모양이 전부 다 달랐다.

어떤 것은 팔짱을 끼고 있고 어떤 것은 옆으로 누워 있고 어떤 것은 무릎을 꿇은 형상이다.

유키코가 놀라 말했다.

“이거 설마 일일이 다 조형해서 만드신 거예요?”

진혁이 씩 웃었다. 유키코는 다시 한 번 쿠키를 살피며 물었다.

진혁이 만든 이 특별한 쿠키의 가슴에는 뻥 하니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안에는 선명한 붉은색 잼이 끈적하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진저브레드맨 쿠키에 엄지 지문 쿠키를 합쳤어요?”

엄지 지문 쿠키는 바삭하게 갈색으로 구워내는 일반적인 진저브레드맨 쿠키와 반죽부터 다르다. 엄지 지문 쿠키(Thumbprint Cookie)는 동글동글한 쿠키 가운데를 파서 잼 따위를 넣은 쿠키다.

반죽을 만들 때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패인 자국을 만들고 거기에 잼이나 초콜릿 등을 넣기 때문에 엄지 지문 쿠키라고 불린다.

보통 반죽에 버터나 크림을 다량 포함해 구워지면서 갈라지기 쉽기 때문에 동글동글하게 만드는데, 진혁은 진저브레드맨 쿠키 모양으로 이 쿠키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아니, 어떻게 안 갈라지게 한 거예요?”

놀란 유키코가 따지듯이 물어보자 진혁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나 드셔보시죠.”

유키코는 옆을 돌아보았다.

“하아아아아아.”

백진영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쿠키를 먹고 있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어깨를 쭉 펴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조금 전에 이미 먹은 쿠키 가루가 조금 붙어 있었다.

“이거 바삭바삭하다기보다 몰캉몰캉한데? 쿠키 조각이 잼에 젖으면서 촉촉해지는 게 또 다른 맛이야.”

혀로 입술을 핥으며 진영이 감탄하자 유키코가 조심스레 쿠키를 입에 넣었다.

그녀는 붕어빵을 먹어도 머리부터 먹는 타입으로, 이 쿠키 역시 머리부터 입에 넣었다. 쿠키는 입안에 들어오자마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녹아서 사라졌다.

“하아아아.”

의식하지 않았는데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조금 전에 백진영이 왜 저런 괴상한 소리를 냈는지 100%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느껴지는 맛은 초콜릿 시럽이 발라진 바삭한 조각이었다. 버터가 충분히 섞여 부드러우며 은은하게 달콤하다.

머리를 전부 먹어치우고 혀와 이가 가슴께까지 닿자, 탱글탱글한 젤리처럼 진하고 투명한 딸기잼이 혀끝에 닿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설탕에 다량의 딸기를 조려 향이 더 짙다. 새콤달콤한 잼에 젖어 녹진한 쿠키는 조금 전에 맛본 머리 부분과 또 다른 맛이 났다.

‘반죽이 다르지는 않을 텐데 머리와 사지, 몸통이 다 다른 맛이 나. 어떻게 한 거지?’

먹어보니 진저브레드맨 쿠키가 맞긴 하다.

손끝에 만져지는 쿠키를 유키코가 엄지와 검지로 세게 짓눌러 보았다. 쿠키는 부서지기보다 문드러졌다.

그것을 본 백진영이 질색했다.

“유키코 쉐프님! 먹는 걸 가지고 장난치시면 안 됩니다.”

“장난치는 건 아니고요. 테스트를 좀 해보려고 했어요.”

만져보면 대강 무엇과 무엇을 섞었는지는 알 수 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하자 백진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 드실 거면 저 주셔도 되고요.”

“아뇨. 이건 제가 먹을 건데요.”

겨우 한 입, 맛만 본 것 같은데 어느샌가 상자 가득하던 쿠키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아쉬워하던 유키코와 백진영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진혁을 바라보았다.

“너, 이 쿠키 팔 거지?”

“언제부터 판매할 예정이세요?”

당장이라도 맛보고 싶어 하는 탐욕에 가득 찬 얼굴이다. 심지어 다른 직원들이 맛볼 쿠키도 남지 않았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판매용이 아닌데요.”

“엑?”

놀라는 두 사람에게 그가 사정을 설명했다.

“이거 내가 일일이 조형해서 빚은 거야.”

“그럼 무리겠네요.”

유키코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그는 흔쾌히 메뉴에 추가하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다며 남아서 쿠키 반죽을 만들어놓고 퇴근했을 터다. 그런 식으로 진혁이 떠맡았던 수많은 일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진혁이 이 녀석, 드디어 열정페이에서 졸업했군.’

백진영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일을 맡지 않을 것이다.

반년 후에 새로운 가게로 갈 것을 고려하면 기존에 하던 일도 나누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쿠키는 새로운 베이커리 카페에서 팔려고 H&J에 내놓지 않는가 보군.’

직원들이 도착했는지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첫 번째로 들어온 사람은 김가영이었다.

그녀는 가게 문을 들어서면서 찰랑찰랑한 생머리를 묶어올려 늘어뜨렸다. 나름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기 위한 습관이다. 그녀가 유쾌하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쉐프님들 먼저 오셨네요!”

그녀는 밑도끝도없이 외쳤다.

“두 분 쉐프님! 어제 촬영은 어떠셨어요? 결승에 진출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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