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4화
◈ ◈ ◈
“진혁아. 정말로 대단하구나.”
촬영이 끝나자마자 진혁에게 달려온 아버지가 말했다. 그는 기쁨에 찬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네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나를 한참 뛰어넘었어.”
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겸양의 예를 표했다. 그는 힐끗 옆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아버지는 나라를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유키코를 보고서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유쨩, 라면 모양 케이크. 나도 먹어봐도 돼?”
유키코의 앞,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은 재민이었다.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짓고 묻는 그 목소리에 유키코가 고개를 들었다.
“좋아.”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재민은 휠체어를 움직여 가까이 섰다. 그가 유키코의 손을 잡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난 괜찮아.”
그녀는 허리를 숙여 재민에게 속삭였다. 남녀상열지사에 관심 없는 진혁은 부러 외면하여 듣지 않았다.
“저도 먹어봐도 되나요?!”
뒤에 서 있던 임진희가 눈을 빛냈다.
“유키코 쉐프님 솜씨는 사람들한테 많이 들었어요.”
“사람들이요?”
유키코가 되물었다.
“진혁이하고 백진영 사장님, 그리고 은동 씨요.”
뜻밖의 이름에 임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은동이…… 아니 은동 쉐프하고 연락을 해?”
“저번에 가게 놀러 갔을 때 연락처 주시던데.”
진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다. 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산 출신의 김은동은 20대 후반으로, 우리꼬맹이밀 농장주인 김금관의 아들이다. 작은 대회에서 같은 조원이었으며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통닭 배달을 하다가 환영마라진에 미혹 당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진혁을 구하려고 하는 의기(意氣)를 보였다. 나쁜 놈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연락처를 주는 데 있어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인가?
더군다나 환골탈태를 거친 진희는 이목구비가 수려하며 피부가 옥처럼 깨끗할 뿐 아니라 눈동자가 맑아 뛰어난 미인이다. 진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꼬맹이밀 농장 아저씨 핸드폰이 고장 나서, 아빠가 은동 씨 연락처 좀 물어봐 달라고 했거든. 왜?”
“아무것도 아니야.”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뒤늦게 다가온 어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진혁아! 피곤하거나 힘들지는 않니?”
“괜찮습니다. 가게는 어떻게 하고 오셨어요?”
“하루 쉬기로 했어.”
어머니가 유키코와 재민을 보았다. 유키코가 진혁의 어머니, 장은효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진혁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것도 많고 성실하고 유능하시다고요.”
은효는 사근사근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두 사람 결혼 축하해요. 이렇게 함께 있으니 두 사람, 아주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진혁은 힐긋 무대 저쪽을 살폈다. 유키코의 부모가 막상 이쪽으로 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진희나 은효가 유키코에게 말을 거는 사이에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바로 내려가실 건가요?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뒤늦게 김선호 PD가 조심스럽게 뒤풀이를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브라이언의 가족들이나 유키코의 가족들도 그들끼리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진혁 역시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끼리 조용히 식사하기를 원했다.
방송국 앞의 고깃집에 자리 잡은 네 사람은 오랜만에 담소를 나누었다.
“큰이모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진혁이 오리고기를 불판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소금과 후추로 밑간이 된 붉은 생고기에는 오돌토돌하게 닭살이 돋은 하얀 껍질이 길게 붙어있다.
“아주 건강하셔. 다음 달 파리에 가신다고 아주 들떠 계시지.”
치이익 소리가 나며 고기가 익어갔다. 고기가 희게 익어가자 장은효가 썰려 있는 양파를 올렸다.
진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큰이모가 파리에요? 프랑스의 그 파리?”
큰이모는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다. 간혹 여동생 가족을 방문하러 소망시를 방문하거나 도시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러 오가는 외에는 도시를 떠나지 않으셨다. 어울리지 않는 두 조합에 진혁이 놀라자 진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종양이 오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말이야. 기력이 돌아온 큰이모가 꽹과리를 배우기 시작하셨다고 얘기했잖아? 기억 안 나?”
“거기까진 알지. 그런데 왜 갑자기 파리가 나와?”
“너의 큰이모께서 하시는 노인정 사물놀이패가 이번에 도 대회에서 우승했어. 도 대회 우승팀은 파리에 공연을 간다고 하더라.”
양파가 점차 연해질 무렵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부추를 넣어 볶아주었다.
“부추는 바로 익으니까 곧 드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모랑 프랑스라니 신기하지? 엄마도 듣고 깜짝 놀랐어.”
“신기하네요.”
진혁이 담담하게 이야기하자 진희가 자기 일처럼 흥분해서 말했다.
“너무 부럽지? 나도 남의 돈으로 해외여행 가고 싶어.”
“이번에 비슷한 건 한 번 했잖니, 호호.”
“비슷한 거요?”
어머니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방송국 돈으로 서울에 왔잖아!”
“그러게요. 진혁이 덕분에 서울 여행했네.”
어머니가 익은 고기에서 살코기와 껍질을 분리했다. 그녀는 오돌토돌한 돌기가 빽빽이 솟은 두꺼운 껍질을 젓가락으로 집어 따로 진혁의 밥공기 위에 올려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껍질이야, 얘.”
“…… 고맙습니다.”
진혁이 오리 로스의 껍질 부분을 좋아했던 것도 벌써 옛날 일이다.
‘이거 뭔가 약이 오르는데….’
원하신다면 오리구이 백 마리라도 드릴 수 있는데, 눈앞에서 계속 껍질만 받으니 기분이 묘하다. 여기에 있는 세 사람 모두 진혁을 좋아하고 배려하지만, 진혁의 눈치를 보지는 않는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것을 집어 입에 넣었다. 옆에서 진희가 살코기에서 떼어낸 껍질만 모아서 진혁의 앞접시 위에 올렸다. 그녀가 씨익 웃었다.
“맞다. 너 이거에 환장했지? 나 다이어트하는데 잘됐다.”
아버지 역시 살코기에서 껍질을 떼어내고 있었다. 진혁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버지가 그런 진혁을 쳐다보고 흠칫했다.
“이거 이제 별로 안 좋아하냐?”
아버지가 물었다. 세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아준 닭 껍질은 이미 접시 위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건 아니고…….”
“사양할 필요 없다. 아비는 전에 건강 진단받은 이후에 콜레스테롤 관리를 하려고 있어.”
진혁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오리 껍데기만 먹으면 또 어때.’
그라면 충분히 지방을 소화시켜 근육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
“아빠, 공장은 잘 되어가고 있어요?”
“얼마 전에 민병철 사장하고 같이 보러 갔지. 잘 되어가고 있다.”
“빨리 잘 됐으면 좋겠다.”
“건물 인수는 예전에 끝났지. 지금은 짜놓은 설계에 따라 설비를 설치하는 데까지 마쳤다고 하더라. 유통망도 다 알아보았고 지금은 사람을 고용하는 중이라고 하니 슬슬 결과를 볼 수 있을 거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진희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진짜 대단해. 야, 네가 기획한 샌드위치가 공장에서 팔려서 전국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니까 설레지 않니? 신기하잖아.”
진혁이 웃었다.
“신기할 것까지야.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 어머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진영이 형하고는 이미 이야기했는데, 계약이 끝나면 제 가게를 열 생각입니다.”
“지금 하는 곳은 그만두고?”
놀란 가족들을 바라보며 진혁이 아무렇지 않게 밝혔다.
“일 년 계약이잖아요. 계약이 끝날 때 그만두고 나올 생각입니다.”
“어디에? 아니, 그럴 돈은 있니? 엄마가 투자할까?”
“돈은 충분합니다. 환자용 밀 키트 때문에 받은 돈이 꽤 되거든요.”
“환자용 밀 키트?”
우물거리며 고기를 먹고 있던 진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희 네가 조언해줬잖아. 그 상품 개발이 끝나서 미국에 보냈지. 회사 공장에서 밀 키트로 병원에 공급하면서 로열티도 따로 주기로 했어.”
그가 손가락을 펼쳐 보여 이번에 얻게 된 금액의 단위를 대략 보여주었다.
“그게 얼마야?! 내가 조언해준 건 그냥 질환별로 필요한 영양소가 다르다는 것뿐인데? 그것만 듣고서 미국의 건강식품 회사에서 바로 상품화가 가능한 레시피를 개발해냈다고?”
그녀가 놀라 말했다.
“허…….”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젓가락을 멈추고 놀랐다.
“전에 그 개가 먹던 거에서 조금 고쳤을 뿐이야.”
“봉칠이 말이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골손님 김도형은 우연히 동물병원에서 마주쳤던 진혁에게 열 살배기 포메라니안 봉칠이를 위한 특별한 생일 케이크를 부탁했다. 계속 토하고 식욕이 없던 봉칠이는 진혁이 만든 생일 케이크를 먹고 기력을 일부 되찾았다. 그 사실을 알아낸 김도형이 특별히 요청하여, 꾸준히 적지 않은 돈을 내고 특별 요리를 사 갔다. 진혁은 매번 같은 걸 만들기도 귀찮아, 그날그날 남는 재료로 적당히 맛있어 보이는 것을 만들었다. 소금과 설탕 따위로 양념하지 않고 밀가루도 쓰지 않는다는 제한이 있으니 뭔가를 생각해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아버지는 그 개 이름도 기억하네요.”
“우리 집 단골손님이잖냐.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은 꼬박꼬박 오는데. 요즘은 꽤 기운을 되찾아서 우리 집까지 올 때 걸어오더라.”
“많이 좋아졌네.”
‘오행진의 효력인가?’
전에는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안겨 있었다. 진혁은 다른 인간 손님들의 건강이 궁금해졌다.
“감호철 어르신하고 금천복 어르신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마을 소식에 훤한 진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감 씨 어르신은 육십을 넘으셨다고 완전 뿌듯해하고 계셔. 평생 이래 본 적이 없대.”
“예순은 이미 한참 전에 넘었잖아.”
“아니, 체중. 집에 금 씨 할머니가 계셔서 매일 세 끼를 같이 먹으니까 60kg을 넘겼대. 전에는 55kg을 넘어본 적이 없으시다고 하더라.”
“그분이 이쑤시개같이 마르긴 했지.”
“어허.”
아버지가 점잖게 말하자 진혁이 말을 고쳤다.
“고목나무처럼 마르시긴 했는데 살찌셨다니 다행입니다.”
“…… 그게 아니잖냐.”
아버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정말로 화난 것은 아니다. 진혁이 고개를 가볍게 숙여 죄송하다는 뜻을 전했다.
“흠흠.”
아버지는 조용히 진혁의 밥그릇 위에 살점을 하나 더 얹어 주었다.
“어른의 외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지.”
“예. 조심하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80대 꼬맹이, 그것도 그 나이에 간신히 첫사랑과 결혼하는 데 성공한 풋내기 중의 풋내기를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려워….’
진혁은 마음을 추슬렀다. 아버지가 어른으로 모시고 공경하는 이에게 자신이 막 대해서는 안 될 노릇이다. 막상 앞에서 보던 때에는 신경 써서 나이를 배려해 주었지만, 서울에 머물면서 잊고 지내다 보니 가볍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여보, 이제 겨우 강남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나온다니, 너무 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당신도 소망시의 그 자리에서 자리 잡는 데 오 년은 걸렸는데.”
“진혁이는 괜찮을 거예요. 지금 TV에서 완전 핫하기도 하고…… 진혁이 빵은 솔직히 누가 먹어도 맛있으니까요.”
“일 년만에 독립이라면 내 생각보다는 훨씬 빠르기는 해. 네가 결정한 거라면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왜 독립을 하려는 건지 이유가 궁금하구나.”
아버지의 물음에 진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