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2화
진희가 후루룩 챱챱 아쉽게 접시를 핥으며 말했다.
“진짜 맛있다.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으면 집에서 요리 좀 하지.”
이희주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남자 요리사분들은 집에 돌아가면 요리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주영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차가 있지요. 서양 요리 쪽에서 그렇다고 듣기는 했는데, 페이스트리 쉐프는 또 다르지. 저는 주말에 요리합니다. 가정적인 남편이죠.”
당당하게 자신이 가정적이라고 주장하는 주영모였다. 이희주가 눈을 깜빡이더니 스텔라 위스커스에게 물었다.
『스텔라 쉐프. 가정에서 요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스텔라가 말했다.
『요리사가 하지요. 저희 집에는 전문 요리사가 따로 있지요.』
“…….”
주영모는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제과제빵 아카데미와 주영모 베이커리의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수백 개에 달하는 디저트 체인점을 소유하고 있는 CEO와 비교할 수는 없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웃으며 마저 말했다.
『하지만 그 요리사가 한 요리보다 이번에 임진혁 쉐프가 구워낸 미트 파이가 더 맛있네요. 놀라워요.』
“감사합니다.”
극찬이 오가는 가운데 진혁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기나긴 시간 동안 다양한 과제를 소화하고 실력을 선보여 이곳에 서 계신 세 분의 페이스트리 쉐프가 계십니다. 시청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세 분 중 두 분은 패자부활전을 하셔야 합니다.』
“유키코 쉐프가 만든 풀드 포크 밀크 번은 촉촉하고 부드러웠습니다. 제시 & 브라이언 롤은 농후한 카레의 풍미가 짙게 느껴지는 맛있는 빵이었죠. 하지만 임진혁 쉐프의 레이즈드 미트 파이는 폭탄이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그 전에 뭘 먹었는지, 앞으로 뭘 먹을지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물건이더군요.”
『임진혁 쉐프가 이번 라운드의 우승자라는 데에 저도 찬성합니다. 토네이도처럼 압도적인 맛이었죠.』
『토네이도라니 엄청난 표현인데 저도 동의해요.』
이희주가 손을 들었다.
스크린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화면 속에 보이던 자욱한 안개가 점차 옅어지며 가운데에 있던 음식이 드러났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시뻘건 국물이었다. 그릇 안이 찰랑할 만큼 가득 담긴 붉은 국물 위에 수줍게 구불구불한 면발을 내민 음식을 보고 유키코가 중얼거렸다.
“라멘…… 요?”
브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저희는 페이스트리 쉐프인데요? 라면을?”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는 당혹해했다. 등 쪽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한국어를 공부하며 본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한국인들이 라면을 즐겨 먹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라면을 실제로 끓이거나 먹어 본 적은 없었다. 황당해하는 브라이언과 대비되게 유키코가 신나서 말했다.
“저, 라멘 잘 끓여요.”
브라이언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저 라면도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가 직접 끓이신 겁니까?”
이희주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
양복을 입은 진행팀 요원 한 명이 무대에 카트를 끌고 올라왔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트 위에 있는 실버 돔 앞에 섰다. 은빛으로 빛나는 돔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매콤한 향기가 라면 그릇에서 솔솔 풍겼다.
“어머나.”
“진짜 라면이군요.”
심사위원 석 옆에 앉아있는 출연자의 가족들이 웅성거렸다.
“……!!”
브라이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시식용으로 준비한 라면입니다. 내가 끓인 건 아니고요.』
라면은 한 그릇뿐이다. 이희주가 옆에 서서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 옆에 준비된 그릇에 여섯 가닥 정도를 덜어주었다. 아기 손바닥만 한 국자로 라면 국물도 세 수저 덜어주자 간장 종지처럼 작은 그릇이 꽉 찼다.
『먼저 맛부터 보시죠.』
젓가락을 들어 라면을 후루룩 빨아들인 유키코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건 정말로 평범한 그냥 라면인데요? 인스턴트 라면?”
“그럼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아드레아노 존부 쉐프가 만드신…… 건 아니군요? 제가 더 맛있게 끓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닐 테고요. 저희는 페이스트리 쉐프니까요.”
“좋은 방향으로 가고 계십니다. 좀 더 생각해 보세요.”
이희주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자! 브라이언 쉐프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맵습니다. 매워요. 너무 매워요.”
브라이언이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을 들어 콧물을 훌쩍이며 대답했다. 황급히 물을 여러 잔 들이켜는 모습을 보며 방청객들이 와하하 웃었다. 무대 위에 앉아 있는 브라이언의 가족과 약혼녀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유키코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매워서 맛있는 거예요.”
“…….”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임진혁이 말했다.
“라면 맛 빵을 만들라고 시킬 셈입니까?”
유키코와 브라이언 모두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뒤돌아 진혁을 보았다. 진혁과 눈빛을 마주친 그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회자 이희주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임진혁 쉐프가 맞추셨군요! 맞습니다. 주영모 쉐프님, 설명해 주실까요?”
주영모가 크리스마스날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 쉐프님! 빵으로 라면을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방금 드신 라면 맛을 참고하시죠.”
‘라면을 만드는 게 아니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던 브라이언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빵이라면 자신 있어. 그런 맛을 내려면…… 이렇게 하면 되겠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그가 힘차게 조리대 앞으로 달려가는데 유키코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브라이언을 응시했다.
“지지 않겠어요. 재민 씨가 보고 계시거든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브라이언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를 보는 눈이 더 많아요.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유키코를 바라보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해냈는지 펜과 종이를 붙잡고 눈을 깜빡거리며 전자시계를 노려보았다. 아직 카운트가 시작되지 않아 <00:00>에 멈춰 있는 전자시계다. 그는 초조하게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자, 자. 브라이언 쉐프님! 진정하세요. 아시다시피 제작 시간은 3시간입니다. 카운트는 조금 후에 시작됩니다!”
허겁지겁 달려간 브라이언과 달리 유키코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낮은 굽 소리가 무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이미 승리한 것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조리대로 돌아갔다. 그녀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걸 만들면 되겠어요.”
“그럼 지금부터 결승전 진출을 위한 패자부활전을 시작합니다!”
이희주가 외쳤다. 폭죽이 퍼지고 종소리가 울리며 바로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브라이언은 종이에 펜으로 휘갈겨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글씨를 쓰고 있던 그는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흘려 쓴 필기체 문장들은 의사가 카르테에 휘갈겨 쓰는 라틴어 의학용어처럼 읽기 어려웠다. 그가 무엇을 만들지 그 구조를 종이에 쓰고 있는 사이에 유키코는 행동부터 시작했다.
먼저 오븐을 화씨 325도로 예열한 후 바로 필요한 도구와 재료들을 챙겼다. 라면이 담길 커다란 스테인리스제 볼과 젓가락, 케이크 터너와 작은 붓에 두 종류의 파이핑 팁. 케이크 반죽과 프로스팅을 위한 재료와 색색별 퐁당을 만들 재료들.
“베이지색, 흰색에 녹색, 분홍색과 붉은색. 그리고 검은색까지.”
반죽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백 번, 수천 번 해왔던 일이다. 단지 이번에 달라질 점은 만들어질 케이크의 모양이 흔한 스퀘어나 홀케익 모양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녀는 스테인리스 볼에 유산지를 깔고 그 위에 반죽을 부었다.
즉 반구 모양의 케이크가 되도록 틀을 잡아놓았다.
‘이대로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첫 번째로 발생 가능한 문제는 반죽의 깊이가 깊어 익는데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속까지 익히려다가 겉은 태우고 안은 덜 익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녀는 그런 점을 신경 써 일부러 반죽을 두 개로 나누었다.
‘나중에 자르는 편이 더 편하긴 하겠지만, 일단 빨리 익는 게 중요해.’
두 개의 스테인리스 보울에 유산지를 깔고, 스프레이를 뿌렸다. 한쪽은 바닥에 반죽을 조금 부었다. 조금이라고는 해도 2~3cm는 되는 깊이다. 다른 한쪽은 찜기용으로 흔히 쓰는 스테인리스 다리 받침을 깔고 그 위에 원형 무스 링을 올려놓았다. 파이 틀처럼 단단하게 여러 겹 접어 모양을 만든 유산지를 깔고 역시 스프레이를 뿌렸다. 이후에 익은 빵이 쉽게 분리되기 위해서 하는 필수적인 작업이다.
두께를 얇게 한 덕분에 빵이 익는 데에는 30분가량이 소요되었다. 그녀는 그동안에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제일 자신 있는 버터크림 프로스팅을 만들고, 퐁당으로 모양을 만들었다. 흰색 퐁당을 잘라내 두툼하게 만들고 그 위를 꾹꾹 눌러 주어 일부를 잘라냈다. 둥글고 납작하게 빚어낸 노란 퐁당을 그 위에 심고 나서 그녀는 흐뭇해하며 자신이 만든 것을 보았다.
“좋아. 삶은 달걀 같아.”
사실 욕심대로라면 정말로 라면에 넣는 간장에 절인 달걀처럼 약간은 거무스름한 색을 띠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노란 퐁당에 거무스름한 색을 섞으면 먹음직스럽다기보다 썩은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었다. 그녀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나루토마키(鳴門?き).”
조그맣고 동그란, 하얗고 얇은 퐁당 조각들이 접시 위에 나란히 늘어놓아져 있다. 그녀는 그 위에 음각하듯이 굵은 선을 파냈다. 연분홍빛 줄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파내진 부분을 채우자, 예쁜 장식용 소용돌이 어묵이 만들어졌다.
“역시 라면에는 차슈(チャ?シュ?)가 필수야.”
차슈는 돼지의 넓적다리나 등의 살코기를 간장 등에 졸여 요리한 음식으로, 일본식 라멘 위에 올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녀는 평소 집에서 한국식 라면을 끓일 때도 간간이 차슈를 올렸다.
하지만 지금 실제로 돼지고기를 올릴 수는 없다.
버터크림 위에 삼겹살 따위가 올라간다면 그대로 맛의 균형이 전부 무너질 것이다.
그녀는 아주 적은 양의 갈색 퐁당에 많은 양의 흰색 퐁당을 섞었다. 결이 살아있고 비계까지 붙은 차슈 모양을 만드는데 한참 동안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에 흘깃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 아직 괜찮아.’
잘게 썬 부추 조각까지 퐁당으로 만들자 바로 오븐의 벨이 울렸다.
-삐이이이이!
그녀는 오븐에서 나온 케이크의 가운데를 찔러 확인한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븐에서 갓 나와 뜨거운 케이크를 프로스팅하기 전에 식히는 동안에도 그녀는 쉴 수 없었다.
이 케이크에서 제일 화려하고 장식적인 부분을 만들기 위해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고, 받침용 심을 준비했다.
그때 옆에서 치이이이익 하는 소리가 나며 하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