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1화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혁아.”
가슴이 벅찬 듯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아버지는 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헛기침을 했다. 이희주가 미소지으며 눈짓을 한 후에야 아버지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네게 촬영 제안이 왔을 때 나는 반대했었지. 너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출연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그 말을 들은 유키코가 눈을 크게 떴다.
‘진혁 쉐프 솜씨는 웬만한 경력자를 찜쪄먹을 정도인데. 아버지는 그 실력을 모르셨나 보구나.’
브라이언 역시 놀라 입을 떡 벌리고서 생각했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에게 쇼에 나오지 말라고 했었다고?’
아버지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너는 고집을 부려서 출연하겠다고 했지. 그리고 최선을 다했어.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다양한 음식들을 만들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어. 내가 그 나이 때에는 매일매일 놀기 바빴는데, 나하고 비교하면 괄목상대라고 할 수 있지.”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가 마저 말했다.
“사…… 사…….”
수염 자국이 있는 뺨이 천천히 붉게 달아오른다. 달아오른 얼굴을 한 아버지를 보고서 이희주가 손뼉을 쳤다.
“사랑해?”
“…… 사 …… 사 ……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는 네가, 아버지는 자랑스럽다.”
불에 달구어진 쇠처럼 시뻘게진 뺨은 아직도 원래 색깔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목덜미까지 시뻘게진 상태로 마이크를 이희주에게 돌려주었다.
“원래 그 말씀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아버님?”
“…….”
이희주는 다시 심사위원석으로 가서 진행을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버지는 한참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진혁은 아버지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무대 반대쪽에서 느끼며 혹여 건강상의 문제는 없나 심안으로 살펴보았다.
진혁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들리지 않을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랑한다, 아들아.”
아마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했을 말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진혁이 입꼬리를 저절로 추켜올렸다.
‘더 자랑스럽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여기까지 오신 보람은 있어야죠.’
◈ ◈ ◈
이희주가 진혁을 재촉했다.
“임진혁 쉐프님! 심사위원들에게 파이를 나눠주세요.”
진혁이 빵칼을 들어 파이를 잘랐다. 그는 절단면이 매끈하게 잘린 파이를 한 조각씩 접시에 담겨 심사위원의 앞에 놓았다.
다른 출연자들의 가족과 임 씨 가족 모두에게 하나씩 돌아가고도 여유가 있었다.
스텔라 위스커스는 자신의 앞에 놓인 파이 조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노르스름하고 바삭해 보이는 파이지는 투명한 만두피처럼 두께가 얇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고기는 한 가지 종류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에 맛본 브라이언의 스리랑카 차이니즈 롤처럼 향신료 향이 강한데 정확히 어떤 향신료인지 짚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짧게 감상을 이야기했다.
『레이즈드 파이군요.』
레이즈드 파이(Raised pie)란 키가 큰 파이를 말한다. 보통 파이는 2~3cm 정도의 두께로 납작한 편이지만 이 파이는 쉬폰 케이크처럼 두껍다. 진혁이 씩 웃었다.
“일부러 크게 만들었습니다. 맛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스텔라는 조금 전에 맛본 아주 맛있던 음식을 회상했다.
‘브라이언의 차이니즈 스리랑카 롤보다 맛있을까?’
촉촉하고 부드러운 크레페가 감싼, 향신료에 절여 비린내 따윈 없이 쫄깃하게 씹히던 돼지고기 요리다. 손가락만 한 크기라 한 입 먹고 나면 없어져 버린다는 점이 아쉬웠다. 반면 진혁이 만든 레이즈드 파이는 유난히 키가 크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솔솔 풍기는 파이 위에는 탐스럽게 익은 크랜베리가 소복하게 놓여 있다.
진혁은 모든 파이 조각 위에 생크림 위에 얹힌 크랜베리가 올라가도록 손을 썼다. 스텔라는 꼼꼼하게 파이 안쪽을 포크로 쿡 찍어보았다. 포크는 껍질만 뚫고 들어가 바로 막혔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포크가 왜 안 들어가지?’
그녀는 파이의 뾰족한 쪽 끝을 포크로 조금 떼어 보았는데 이쪽은 괜찮았다.
‘레이즈드 파이는 키가 커서 날것을 넣으면 안쪽까지 익히기가 어려워. 그것 때문에 미리 양념해서 익힌 고기를 넣었겠지. 하지만 그럼 그냥 파이 껍질을 씌운 고기볶음일 뿐이야.’
도우 없이 피자 토핑만 있다고 해서 피자가 되지는 않는다.
심사위원들은 이곳에 고기볶음을 평가하러 온 것이 아니다. 스텔라는 아주 얇은 파이 껍질을 의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얇으면 당연히 육즙이 흘러나와 눅눅해져야 했는데 특이하네. 아직도 바삭바삭하잖아? 무슨 수를 쓴 거지.’
그녀는 파이를 접시째 들어 올리고서 끄트머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파삭하며 바스러진 빵 껍질 아래에 쫀득쫀득한 무언가가 있다.
구운 오징어 다리처럼 쫄깃한 그 맛 다음에는 부드럽고 농밀한 지방이 느껴졌다.
바삭하고 쫀득하고 녹아내리는 그 질감의 차이는 몇 초 안 되는 순간에 정신 못 차리게 파도처럼 번갈아 닥쳐왔다.
‘다른 종류의 돼지고기를 여러 층으로 쌓은 건가?! 아닌가?’
그녀는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레이즈드 미트 파이를 잘 만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먹으면서 질리기 때문이다.
진하게 양념한 2~3cm 두께의 돼지고기를 빵 사이에 끼워 먹으면 맛있다. 하지만 7~8cm 두께로 통 돼지고기 패티를 빵 사이에 끼운다면 어떨까? 고기의 맛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려, 아삭한 채소와 달콤새콤한 케첩 소스 등의 맛이 전부 죽어버린다.
하지만 진혁이 방금 제출한 프랑스식 레이즈드 미트 파이는 한 입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맛이 전부 달랐다.
‘서로 다른 부위를 교묘하게 모자이크처럼 섞어 넣었어. 여기에 준비된 돼지고기 부위는 빠뜨리지 않고 거의 다 쓴 게 분명해.’
파이를 한 입 한 입 먹다가 마침내 가장자리까지 남김없이 먹었을 무렵 그녀가 도달한 결론은 사실과 유사했다.
‘분명히 간 돼지고기만 가져갔던 것 같은데, 언제 특수부위를 비롯한 다양한 돼지고기들을 챙기고 손질했지? 유키코 쉐프나 브라이언 쉐프를 보는 동안 가져갔나?’
스텔라가 다음에 씹은 파이 조각은 얇고 퍽퍽했을 살이나 라드와 으깬 감자와 섞여 훨씬 부드럽게 꿰어진 부분이었다.
‘이건…… 달리 부를 이름이 없어. 돼지 한 마리 파이라고 불러야겠어.’
그녀는 파이를 거의 먹어갈 무렵에 깨달았는데, 아드레아노 존부는 그 결론까지 훨씬 먼저 닿았다.
입안에서 터져 나오는 육즙을 핥으며 고기를 하나씩 하나씩 씹어 먹어 본 결과다.
‘파이지 바로 아래에는 손질한 껍데기. 삼겹살. 목살에 등심. 갈매기살에 항정살, 그리고 가브리살. 온갖 부위를 전부 요리해 놓았군. 기름이 없어 질기고 뻑뻑한 부분에는 다진 양파와 감자를 섞어 넣어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어. 대단한 솜씨야.’
돼지고기 파이를 만들라고 했는데 파이 속에 돼지를 통으로 재현해 놓았다.
앞서 먹은 브라이언의 스리랑카 차이니즈 롤은 진하고 농후한 향신료에 고기를 절여 놓다시피 했는데, 진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센 불로 짧은 시간 정확하게 필요한 만큼만 고기를 익혀 질기지 않고 부드럽게 익힌 것만도 대단한데, 거기에 양념도 최소한으로 썼다.
‘향신료는 최소한으로 썼어. 마늘과 양파, 정향은 돼지고기의 비린내를 잡기 위해 꼭 필요한 양만 썼어. 월계수 잎은 향을 입히기 위해 조금만 썼다가 바로 뺀 게 분명하고. 돼지고기가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소금과 후추로 가볍게 간을 했군.’
본디 질 좋고 신선한 고기는 소금만 뿌려 먹어도 맛있다. 오래되거나 맛이 좋지 않은 고기를 진한 양념에 절여 고기 맛을 감추기도 한다.
‘그 많은 고기 중에서 용케 제일 신선한 고기들만 골라냈군. 부위별로 제일 신선한 고기는 하나씩만 있었을 텐데.’
초반에 재료를 고를 당시에 다른 이들이 고기를 고르는 동안 진혁은 적당히 아무것이나 집어 나온 것처럼 보였다.
유키코와 브라이언이 세심하게 고기의 결과 지방의 양, 색깔과 냄새 등을 살피는 동안 진혁은 바로 집어 든 고기를 바구니에 넣어 가지고 나왔다.
그때 아드레아노는 진혁이 고기를 양념할 생각이기 때문에 신선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저놈은 어떤 고기가 신선한 고기인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나?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건가?’
아드레아노는 파이의 가장자리 부분을 한입 물었다.
물자마자 이와 혀 사이에서 꿀렁거리며 결이 갈라진 고기는 부드럽고 말캉했다.
설로인이라고도 하는 돼지고기 허벅지살이다.
결과 결 사이로 육즙과 함께 극소량의 소금이 함께 배어 나와 혀를 즐겁게 했다.
‘…… 이건 프랑스식 미트 파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물건이야. 완전히 새로운 파이라고. 새 이름을 붙여야겠어.’
아드레아노 존부가 마음속으로 감탄하는 동안 주영모는 실제로 소리를 내어 칭찬의 말을 했다.
“와. 내가 살다 살다 돼지껍데기를 파이에 집어넣을 생각을 한 놈은 처음 보네.”
손질한 껍데기만을 파이 속에서 따로 뽑아내 씹으며 주영모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게 맛있어.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한 퓨전 요리는 대부분 맛이 없는데 특이해. 비린내를 빼고 난 다음에 쫄깃함을 조금 남기고 부드러울 때까지 푹 삶은 게 분명해.”
그는 진혁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알아낸 것을 신나서 말할 뿐이다.
“돼지 간을 갈아서 으깬 감자랑 같이? 그것도 많이 넣으면 맛이 진해질 테니까 아주 조금만, 가니쉬처럼 넣었고. 햐. 내가 간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넣었대?”
껍데기만 쏘옥 빼먹고 가운데부터 한 숟갈 한 숟갈씩 떠먹던 주영모는 코끝부터 벌게져 코를 킁킁거렸다.
“소주 한 잔 곁들이면 따악 좋을 맛인데 아쉽다, 아쉬워. 촬영 중이라 아쉬워.”
주영모가 보이는 격렬한 반응을 지켜보던 이희주가 마이크를 들었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진혁 쉐프, 저도 한 조각 먹어볼 수 있을까요.”
청유형이 아니라 명령형이다.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진혁이 남아 있던 조각을 잘라 내밀었다.
“미리 챙겨 드릴 걸 그랬군요.”
이희주 역시 순식간에 파이를 먹어치웠다. 그는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순식간에 파이를 마시듯이 후루룩 씹어 삼켰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파이를 먹어버린 그가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정말로 소주 한 잔이 땡기는 맛입니다. 왜 빵을 드시면서 소주가 땡긴다 하셨나 했는데 이걸 먹어보니 알겠습니다.”
이제 막 파이를 다 먹은 임운정 역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삶은 수육 같죠?”
“그것도 부위별로요. 겉에는 얇은 빵 가죽으로 감쌌고 여러 부위를 넣었긴 했는데…… 갈색으로 뭔가 양념도 됐는데. 엄청나게 맛있는 수육 맛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