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0화
마디마디 굵고 털이 무성한 손끝 손톱에는 어울리지 않게 새빨간 매니큐어가 꼼꼼하게 발라져 있다. 그 손을 바라본 브라이언이 큰소리로 외쳤다.
“제시!”
미식축구 선수처럼 거대한 그림자가 커튼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마침내 등장한 이는 놀랄 만큼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여자였다.
스트라이프 네이비 비즈니스 정장 재킷에 A라인 펜슬스커트를 걸쳤는데, 근육이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어 스트라이프 무늬가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보였다.
2m는 될 법한 체격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얼굴에는 시선이 가지 않는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아름다운 푸른 눈을 가졌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브라이언이 그 옆에 선다면 벤티 사이즈 텀블러 옆에 선 톨 사이즈 일회용 컵처럼 보일 것이다.
‘광안마 녀석이 보면 엄청나게 좋아했을 텐데.’
심안으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보자마자 알 수 있다.
외공을 익히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될 법한, 외공에 최적화된 체질이다.
외공만으로도 충분히 금강불괴의 단계까지 닿을 수 있는 인재다.
광안마 녀석이 보았다면 바로 납치하고 세뇌해 흑천대에 투입했을 것이다.
‘이 여자는 현대에 태어나서 정말로 다행이군.’
현대적인 가치관으로 생각해 보면 광안마 놈은 정말로 나쁜 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옳다고 생각해서 저질렀던 많은 일은 애써 돌이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진혁은 여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살펴보았다. 손끝에 있는 굳은살을 보면 사무직인 모양이다. 발달한 근육 역시 자연스러운 노동으로 인해 발전했다기보다 보여주기 위한 근력 운동을 통해 커진 근육으로 보인다.
‘저런 물 근육은 관리하기 어려울 텐데.’
하지만 진혁이 여자의 근육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남의 밭에서 자랄 것인데 키울 이유는 없다.
그 뒤로는 브라이언과 닮은 중년 남자와 여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브라이언과 유사한 눈썹을 가졌고 여자는 브라이언의 코와 입매를 가졌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나 봐요. 아주 똑 닮으셨군요.”
두 사람을 맞이한 이희주가 웃으며 말했다. 여자와 부모를 본 브라이언이 반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앞서 유키코가 가족들을 만나는 광경을 봤기에 누가 들어올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는데도 다시 커튼이 흔들렸다.브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친부모가 이미 들어왔는데도 또다시 커튼이 흔들린다. 진혁의 가족들은 조금 후에 들어올 테니 브라이언의 가족이 분명하다. 한때는 붉었으나 지금은 희끗희끗한 머리를 곱게 묶어올린 여자가 밝게 웃어 보였다.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 백인 남자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종부터 다른 부부는 이목구비가 브라이언과 전혀 다르나 평온해 보이는 미소만은 묘하게 닮았다.
『캐시!』
여기에 있을 리 없는 사람들이다.
『닐!』
텍사스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야 할 양부모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이 여기에 오려면 가게를 닫았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가게를 봐준다면 그만큼 인건비가 든다. 닐과 캐서린 부부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들인 시간과 비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브라이언이 감동해 말했다.
『맙소사, 닐! 무슨 일이에요? 비행기를 타는 거 싫어하잖아요!』
닐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싫어하기는 무슨. 필요하다면 타야지.』
『여기까지 와주다니 고마워요.』
『당연한 일이란다, 우리 아가.』
네 사람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부모가 두 쌍이나 있는 남자는 씩씩한 표정으로 서서 두 부모를 바라보았다. 이희주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가족이 아주 많으시군요, 브라이언 쉐프.”
“저를 위한 하느님의 축복이죠.”
“하하! 브라이언 쉐프의 가족 여러분! 브라이언 쉐프를 응원해 주시겠습니까?”
『제시가 해야지.』
“약혼녀가 하는 게 좋겠어요.”
부모 두 쌍이 모두 뜻을 모았다. 이희주가 웃으며 말했다.
“제시카 린든 씨, 브라이언 신 쉐프를 응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시카는 통역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식 동물처럼 강건한 근육이 움직임에 따라 수트 안에서 출렁였다. 브라이언이 침을 꿀꺽 삼켰다.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윙크한 제시카는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유키코 쉐프를 바라보며 똑바로 말했다.
『두 분의 아름다운 사랑을 축하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세요. 결혼은 저희가 두 분보다 먼저 합니다.』
『맙소사, 제시!』
『저도 아주 오래 기다렸거든요.』
응원이라기보다 협박에 가까운 말에 브라이언이 눈가를 꿈틀하며 대답했다.
『…… 무, 물론이지. 기다려 줘서 고마워.』
두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시선을 교환했다. 이희주 사회자가 흠흠, 헛기침했다.
“독특한 응원 아주 잘 들었습니다. 브라이언 쉐프, 빵을 가져다 주시죠.”
“예!”
헤벌쭉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브라이언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심사위원의 앞에 접시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리고 넉넉히 가져온 음식을 유키코의 가족과 자신의 가족 앞에도 가져다주었다. 브라이언이 자신의 앞에 놓은 접시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확인한 제시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스리랑카 차이니즈 롤이 엄청나게 변신했잖아! 이제는 브라이언 롤이라고 불러야겠네.』
『네가 허락한다면 제시 롤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
다정하게 대화가 오가는 두 사람을 보고서 주영모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검지만 한 크기의 롤을 면밀히 살폈다. 두 개씩 접시 위에 올라간 롤은 한 입 거리 에피타이저 핑거 푸드(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작은 크기의 음식)로 보였다.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노르스름하고 얇은 껍질과 그 안에 언뜻 비치는 존재감 강한 고기 경단이다. 나란히 놓인 롤 곁에 진한 적포도주 빛깔의 소스로 부드러운 원을 그리고 방점을 찍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을 보고 주영모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면 중국식 춘권이나 베트남식 스프링 롤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고기 경단을 감싼 겉의 재질이 튀김옷이나 얇은 쌀가루 피가 아니라 얇디얇은 크레페라는 점이 다르다.
그는 포크로 롤을 찍어 들었다. 크레페는 순식간에 세 개의 날카로운 포크 날에 찍혀 갈라졌으나 안에 있는 고기 경단은 탱탱하고 쫄깃하게 포크를 튕겨내려 했다. 주영모는 좀 더 힘을 들여 고기를 찍어눌렀다. 포크 날이 고기 경단 사이를 파고들어가자 고기에서 육즙이 질질 흘러나왔다. 주영모는 그대로 ‘제시 롤’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크레페를 절반만 익혀서 아주 부드럽게 만들었군? 양념은 가람 마살라에 마늘, 그리고 온갖 허브까지 다 썼고.”
곁에 있던 스텔라 위스커스는 롤을 바로 입에 넣지 않았다. 그녀는 아예 처음부터 나이프로 롤 가운데를 갈랐다.
『호오.』
겉을 두 겹으로 감싼 얇고 부드러운 크레페는 순순히 잘렸지만, 안에 담긴 돼지고기 경단은 쉽게 잘리지 않았다. 스텔라 역시 나이프로 힘껏 눌러 고기를 잘랐다. 반으로 잘린 고기들은 육즙을 토해내며 뭉개져 쓰러졌다. 꽉 차 있고 탄력 있는 돼지고기의 향을 맡은 스텔라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오물오물 짭조름한 살점을 씹으며 한껏 맛과 향, 질감을 즐겼다.
『맛있네요.』
주영모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향이 대단히 이국적이야. 사프란에 가람 마살라까지, 이 크레페는 프랑스식이고 양념은 인도식인데, 원래 요리는 중국 영향을 받아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지다가 미국에서 개량했네. 다국적인 음식이야.”
『으으음.』
아드레아노 존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롤을 씹었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제시카 린든과 닐, 캐시 부부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신 씨 부부는 어색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브라이언은 아드레아노 존부를 힐긋힐긋 아쉽게 바라보며 뒤로 물러났다.
◈ ◈ ◈
마침내 진혁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임 씨 가족이 들어올 차례다.
“들어오세요!”
이희주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벨벳 커튼을 젖히며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그 뒤에는 어머니, 그리고 진희의 순서다. 무대 위를 비추는 강렬한 조명 때문에 아버지는 잠시 멈추어 눈을 깜빡였다. 몇 차례 눈을 깜빡이다가 진혁을 찾아내고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아버지만이 아니다. 어머니 역시 진혁을 보고 환히 미소를 지었다.
진혁은 미소지은 부모님을 보고서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진희는 실눈을 가늘게 뜨면서 진혁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녀가 의심쩍어하며 말했다.
“엄마. 미리 얘기한 거 아니에요? 진혁이 쟤, 전혀 안 놀랐는데요?”
“어머. 엄마는 얘기한 적 없다, 얘.”
환골탈태를 거친 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외모가 수려해진 이들이다. 방청객들은 임 씨 가족을 보고 수군거렸다.
“연예인 가족인 줄 알았어.”
“아버지하고 진혁 쉐프님이 진짜 닮았네, 닮았어. 여동생인가? 저 여자분도 엄청나게 예쁜데. 미스 코리아 같아.”
“엄마랑 딸이랑 자매 같아.”
“진혁 쉐프가 피부 좋은 건 그냥 유전이었구나…….”
진혁은 가족들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벌모세수를 통해 환골탈태를 시키길 잘했다.
‘다들 건강하고 튼튼해. 오래 살겠어.’
아들이 부모를 보고 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들이 정신적으로 아비보다 나이를 한참 먹었으니 어쩔 수 없이 어리게 보는 순간이 있다.
마음고생을 오래 해서 그런지 유키코의 부모는 나이보다 더 늙어있고 기가 쇠해 있으며 브라이언의 두 부모 역시 그리 건강하지는 않았다.
‘내가 부모를 돌보는 능력이 셋 중 제일 좋은 거지.’
디저트 서바이벌 쇼가 아닌 효도 대회가 있다면 진혁이 우승했을 것이다. 진혁이 흐뭇해하며 가족을 어린애 보듯 하는 시선을 보내자, 그 눈빛을 민감하게 느낀 진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쟤가 뭘 잘못 먹었나 봐요.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진혁이가 반가워서 그런가 본데.”
“아닌 것 같은데…….”
가끔 진희는 촉이 좋아 진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는 것처럼 굴 때가 있다. 진혁은 시선을 슬쩍 피했다.
임 씨 가족 전원이 좌석에 앉자 이희주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임진혁 쉐프님이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나 했는데, 유전자부터 좋았나 봅니다. 가족분들이 하나같이 헌헌장부에 뛰어난 미인이십니다.”
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해했다. 어머니는 뺨을 조금 붉혔으며 진희는 멀뚱거리며 앉아 있었다.
“어떻게, 아버지께서 응원하실까요? 아니면 다른 가족분께서?”
아버지는 이희주가 내민 마이크를 받았다.
어머니와 진희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