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99화 (199/656)

제 199화

‘아, 이제 나오나 보군.’

다른 출연자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커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던 진혁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자줏빛 벨벳 커튼을 젖히고 제일 먼저 나온 것은 휠체어에 앉은 남자였다. 유키코가 눈을 크게 떴다.

“민짱!”

“유짱.”

퀭한 얼굴을 한 남자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유키코에게 인사를 했다.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どうやってここに?たの?(여기엔 어떻게 왔어)?”

“驚かせたくてね(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ビックリしたよ!本?に驚いた!(놀랐어! 엄청나게 놀랐어)!”

어린애 같은 말투로 이야기하던 유키코가 허리를 숙여 남자를 포옹했다. 이희주가 웃으며 말했다.

“자, 자. 유키코 쉐프님! 반가운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유키코는 뺨을 붉히며 일어났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맥동했다.

‘그가 여기에 와 있어.’

병원의 재활치료실에 있어야 할 그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는 일목요연하다. 다친 후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게 된 이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거절을 하러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프러포즈를 승낙할 각오로 여기 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유키코가 그랬듯이 전 국민 앞에서 선언할 것이다.

“유키코 쉐프님! 출연자석으로 돌아가 주세요.”

유키코는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계속 뒤를 돌아보며 출연자석으로 돌아갔다. 방청객들이 와하하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항상 차분한 태도로 얼음 같은 미모를 자랑하던 그녀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붉히며 쩔쩔매는 것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남자는 심사위원석 옆, 테이블 앞으로 안내되었다. 의자 없이 비워 둔 자리에 앉고서 그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유키코는 차분히 심호흡하며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여러분! 특별 손님은 한 분뿐이 아닙니다!”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뒤에 나온 두 남녀를 보고 유키코가 눈을 크게 떴다.

“パパ、ママ(아빠! 엄마!)”

몇 년만에 보는 부모인지 모른다. 유키코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무남독녀 외동딸인 그녀는 제과제빵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유학을 왔다. 그리고 혼전에 아이를 뱄다. 당시 어머니는 낙태를 종용했지만, 유키코는 타국으로 떠나, 부모 모르게 아이를 낳아 길렀다. 연락 없는 남자를 맹목적으로 찾아 헤매느라 부모는 돌보지 못했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ゆきちゃん元?(유키. 건강하니)?”

“うんうん、元?だよ(응응. 건강해요).”

“なら良いよ。(그럼 됐다.)”

유키코의 아버지는 말없이 재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재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진혁은 재미있어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부모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 왔었군?’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헌신적인 어머니지만 효심 깊은 딸은 아니었다는 점은 어쩐지 아이러니하다. 이희주가 외쳤다.

“여러분! 이 특별한 손님들이 여기에 왜 와 계신지 궁금하신가요?”

방청객들이 일제히 외쳤다.

“예!!”

“준결승전까지 올라온 유키코 쉐프님에게 아주 특별한 응원을 해주려고 오셨습니다!”

“와아아!”

이희주가 마이크를 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분의 마이크를 건네받은 재민이 눈을 껌뻑거렸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긴장한 것이다. 유키코가 걱정스러워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진혁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두 푼의 진기로는 깨어나서 휠체어에 앉는 정도까지였나.’

진혁이 찾아갔을 때 사내의 몸은 목내이(木乃伊)와도 같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비쩍 말라 있었다. 생기라고는 없는 몸은 기계 장치에 연결되어 간신히 숨만 쉬었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다. 진혁은 사내를 더 회복시킬 수 있었으나 깨어나게 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몇 년간 식물인간이었다는 자가 갑자기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것이 수상쩍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유키코에게 진 빚이 남자를 완벽하게 회복시키는 것으로 갚아도 좋을지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였다.

‘저 남자가 믿을만한 놈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까.’

기루의 기둥서방 같은 놈이면 차라리 그대로 골골대다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혁이 아무리 생사경의 경지에 달한 고수라도 기절해 있는 놈의 심성을 살피는 재주는 없다. 다만 깨어있는 녀석이 얼마나 몸이 좋지 않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내가 진기를 조금이나마 나눠주었는데 감히 저렇게 골골대다니.’

진혁은 세밀하게 진기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주입한 두 푼의 진기는 양은 적으나 효과적으로 백회혈을 깨워 전신에 활력을 주었다. 척추가 부러진 삼류 무인이라면 벌떡 일어나 완치되었을 양이다. 하지만 저 비리비리하고 허약한 남자는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똥오줌은 가리나 양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를 써서 이동해야 한다.

‘걸어는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진기를 주입해 주지 않았으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진혁은 유키코를 힐끔 바라보았다. 열렬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한시도 재민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저런 걸 보고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고 하던가.

재민이 여기에 없는 유키코의 가족을 대표해 입을 열었다.

“유키코는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도쿄 제과 학교에서 유학할 당시 한국인 유학생에 대한 평가가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선입견 없이 저를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 몇 마디 말을 하는 동안 그는 몇 번이고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저는 유키코를 사랑합니다. 유키코와 결혼할 겁니다.”

이희주가 새빨간 장미가 가득 피어있는 장미꽃다발을 건넸다. 재민은 두 손으로 간신히 꽃다발을 받았다. 꽃다발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로 손힘이 약한 것이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꽃다발을 유키코 쪽으로 내밀었다. 이희주가 손짓했다.

“뭐 하세요? 달려와서 받아야죠!”

“!”

유키코는 조리대를 급하게 돌아서느라 모서리에 허벅지를 정통으로 부딪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앓는 소리 하나 없이 길고 죽 뻗은 다리가 사슴처럼 낭창하게 달린다. 꽃다발을 사냥하듯이 낚아챈 그녀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저희 결혼합니다!”

방청객과 심사위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말없이 앉아 있던 유키코의 부모 역시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유키코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대로 껴안았다.

“ありがとう、ママ。ありがとう、パパ。ごめんね、パパ、ママ。(고마워요, 엄마. 고마워요, 아빠. 미안해요, 아빠. 엄마.)”

누군가가 방청석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축하해요!”

진혁은 짧은 결심을 했다.

‘저 남자가 걸어 다닐 수 있게는 만들어줘야겠다.’

신랑이 결혼식장에 휠체어를 탄 채로 들어가는 건 보기 좋지 않다. 그는 피식 웃었다.

◈          ◈          ◈

응원이 끝나자 바로 심사로 이어졌다.

“풀드 포크 밀크 번(Pulled pork milk bun)입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둥그스름한 빵이다.

가장자리는 흰색이지만 가운데로 갈수록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보기 좋은 주홍빛이다. 동글동글한 빵들은 톡 치면 굴러갈 것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일본식 우유 모닝빵(Japanese Milk Bun)을 개량해 안에 풀드 포크를 넣었군요?』

모닝 빵이란 동그랗고 작은 식사용 빵이다. 본디 영미권에서 점심이나 저녁 식사 때에 곁들여 먹는 디너 롤(Dinner Roll)을 일본에서 개량해 달고 부드럽게 만들었다.

파삭파삭하고 단맛이 부족한 식사용 디너 롤과 비교해 울트라 플러피 밀크 브레드 롤(Ultra Pluffy Milk Bread Roll)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 일본에서 개량한 빵을 받아들여 모닝 롤 또는 모닝 빵이라고 부른다.

“네. 기존 모닝 빵 레시피에 제가 크림 비율을 높여 빵을 더 부드럽게 했어요. 부드럽고 촉촉한 우유 맛 빵에 진한 돼지고기 맛이 아주 잘 어울릴 겁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말하자 유키코가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은 봐야 알지.』

아드레아노 존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주영모가 킥킥 웃었다.

“그럼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겠어요?”

유키코가 빵 접시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은 내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심사위원 앞에 도착한 그녀가 불쑥 물었다.

“남은 빵을 다른 분들에게 나눠드려도 될까요?”

어딜 봐도 재민을 의식한 발언이다. 그녀의 눈길은 지금도 심사위원이 아니라 재민 쪽을 향해 있다. 그 모습을 유쾌하게 보아넘기며 이희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심사위원에게 하나씩 돌아가고 난 후라면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중하게 걷고 있던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심사위원석에 빵을 가져다준 후 바로 큼지막한 접시에 빵을 담아 무대에 설치된 좌석으로 가져간다.

제일 먼저 재민의 앞에 빵을 놓고서 좋다고 웃었다. 헤헤하며 웃는 얼굴이 신나 보인다. 재민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ゆちゃん(유짱)?”

“結婚してくれてありがとう。(승낙한다고 해줘서 고마워).”

조그맣게 속삭이고 바로 발걸음을 옮기는 유키코의 얼굴은 봄날의 벚꽃잎처럼 연분홍빛이다.

봄날의 꽃처럼 사랑스러운 커플을 보며 다른 이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제시카는 빵을 받고 고맙다며 인사했고, 임 씨 가족들 역시 가볍게 묵례했다. 자리로 돌아온 유키코는 심판의 말을 기다렸다.

스텔라 위스커스는 빵을 바로 먹지 않았다. 그녀는 빵을 절반으로 잘라 잘 찢어지는지 살폈다.

여러 겹으로 겹쳐진 희고 고운 빵이 결대로 주욱주욱 찢어졌다. 스텔라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을 그대로 따른 모닝 빵이군요. 잘 만들어졌어요.』

절반이 갈라진 모닝 롤 안에는 장조림용 돼지고기처럼 겹겹이 쌓인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 있다.

주영모는 조그만 빵을 잘라보지 않고 바로 입안에 던져넣었다.

“으으으음.”

한입 물자 농후한 돼지고기의 향이 입안에 확 퍼졌다.

짭조름하고 쫄깃쫄깃한 돼지고기는 소스가 섞인 육수를 흘렸고 부드러운 우유 빵의 가운데 부분은 흠뻑 젖어있다.

“이건 빵으로 만든 만두 같은데?”

아드레아노 존부는 말없이 빵을 씹었다.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벌써 독설을 했을 테니까, 이건 괜찮은 거야.’

유키코는 희망을 안고서 서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노트에 무어라 메모를 했다.

◈          ◈          ◈

이희주가 팔을 벌리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가 두 번째 특별한 손님을 모셔 볼까요?”

그가 벨벳 커튼을 가리켰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묵직한 커튼을 얇은 삼베처럼 가볍게 제치는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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