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8화
돼지고기를 사용한 빵이라고 하니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이걸 보면 웃을 거야.’
지금 이 순간이 그녀에게 미소를 불러일으킨다면 좋겠다.
그녀가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비록 자신은 그 미소를 볼 수 없더라도 상관없다. 제시카의 하루가 즐거워질 테니까 충분하다.
브라이언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속을 채울 내용물을 익히기 시작했다. 중불에 올린 라드가 투명하게 녹아서 지글거리며 낯익은 향을 토해냈다. 양파를 넣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은 후에 커리 가루와 마늘, 녹색 칠리와 칠리 가루, 그리고 칠리 후레이크까지 넣어 익힌다. 양념이 충분히 섞여 농후한 향이 흐르기 시작하자 씹기 좋게 작게 썰어낸 돼지고기를 부어 넣었다.
지글지글 타오르는 고기는 순식간에 붉은색에서 연회색으로 변하며 형태를 바꾸었다. 돼지고기 파편을 프라이팬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 양념을 듬뿍 묻혔다.
“앞으로 10분.”
브라이언이 후우, 하고 이마에 돋은 땀을 닦았다. 잘 익은 돼지고기를 덜어내 그릇에 옮겨 담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두 사람은 뭘 하고 있지?’
아까 임진혁이 간 돼지고기를 가져가는 것까지 보았다. 브라이언은 숨을 돌리며 지금 진혁이 무엇을 하는지 살폈다.
◈ ◈ ◈
임진혁이 선택한 돼지고기는 유키코의 풀드 포크보다 더 잘게 간 고기였다. 순두부찌개에 넣을만한 민찌 수준이다. 그는 한 눈으로 보고 생기가 제일 많이 남아있는 고기를 고를 수 있기에 고기를 고르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재료 준비를 마친 진혁은 거대한 프라이팬 위에 간 돼지고기를 쏟아 넣었다. 계피와 소금, 셀러리와 정향, 양파까지 잘 다져진 상태로 투하하고 바로 센 불에 익히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월계수 잎만 형태를 유지한 채 그대로 넣었다. 중화요리를 하듯 솟아오른 파란 불꽃 위에서 거대한 프라이팬을 돌리는 진혁은 눈에 확 띄었다. 카메라맨들이 진혁을 주목했다.
더울 텐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춤추듯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진혁을 보고서 이전에 중화요리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스태프 한 명이 중얼거렸다.
“임진혁 쉐프는 중국집에서 일해본 적이 없을 텐데, 센 불을 엄청나게 잘 다루네.”
“하여튼 대단해.”
조심스레 하얀 밀기울 같은 것을 익히는 유키코보다 치솟아 오른 불길을 능숙하게 다루는 진혁이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수려한 외모의 임진혁이 물결치는 불꽃 앞에 서 있는 장면은 극장용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장면 같다.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가 마음대로 화력을 조절하는 것처럼 그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불꽃 때문에 생긴 긴 그림자에 높은 콧대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 돋보이고, 진중한 표정은 나이보다 더 성숙하고 어른스럽다.
메인 PD 김선호는 내심 생각했다.
‘이거, 주인공을 다시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국장 선에서 내려온 지시를 자신이 뒤엎기는 어렵다. 그는 힐끗 책임 프로듀서와 메인 작가를 바라보았다. 그 두 사람 역시 시선이 임진혁에게 고정되어 있다. 메인 작가가 입을 열었다.
“남들이 요리 예능 찍는 사이에 혼자 CF 찍는 사람이 있네.”
책임 프로듀서가 손짓했다.
“저기 카메라 두 명 더 투입해.”
주연이 누구건 놓칠 수 없는 아까운 그림이다.
‘뭐, 책임 프로듀서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메인 PD는 다시 무대 다른 쪽으로 뛰어갔다.
스태프들이 의논하는 사이에도 진혁은 계속해서 요리를 하였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주영모가 집필한 ‘주영모의 제과 대백과 100선’에서 소개했던 미트 파이, 투어 티에르(Tourtiere)다. 주영모가 임진혁이 하는 요리를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말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마 투어 티에르인가 싶은데……? 정향과 셀러리, 그리고 소금과 후추를 사용하는 게 딱인데.”
『캐나다에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먹는 프랑스식 미트 파이 말이군요.』
『투어 티에르면 투어 티에르지, 왜 그럴 리가 없는데?』
“그야 저건 물이 완전히 수증기가 되어 증발해 버릴 때까지 중불에서 세 시간 정도는 익혀야 하니까. 지금 주어진 요리 시간이 세 시간인데, 오븐에서 굽는 데에도 45분은 걸린다고. 아무리 해도 시간이 안 나와.”
『그럼 투어 티에르가 아닌가 보지.』
임진혁은 심사위원들이 하는 이야기를 무시했다. 그 역시 모르지 않는다.
‘처음부터 물을 덜 넣었지.’
원래 레시피에서는 세 시간 정도 천천히, 익힌다기보다는 찌는 것에 가까운 감각으로 돼지고기가 완전히 분해되어 녹아내릴 때까지 요리해야 한다. 하지만 진혁은 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처음부터 물을 절반밖에 넣지 않았다. 대신 고기가 타지 않도록 하얗게 굳은 돼지비계를 듬뿍 흘려 넣어 팬 바닥에 깔았고, 기름이 골고루 섞이며 고기가 부드러워지도록 수를 썼다.
아까 화씨 475도로 예열해둔 오븐은 천천히 온도가 올라가는 중이다. 고기를 요리하기 전에 미리 만들어둔 파이 반죽은 냉각기 안에서 식어가고 있다. 진혁은 새빨갛고 싱싱한 크랜베리를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씻어냈다.
‘나중에 장식용으로 올려야지.’
원래 투어 티에르에는 고기 파이로 끝이고 그 위에 과일 장식 따위는 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진혁은 이전 직원이 이야기해준 것을 떠올려 써먹을 생각을 했다. 새콤한 것을 즐기는 서창덕이 베이컨 파이 위에 과일을 종류별로 전부 얹어서 내놓은 적이 한 차례 있었다. 진혁은 그때 크랜베리가 제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반면 치킨 파이는 과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양강지기를 받은 프라이팬 위에서 부드럽게 삶아 으깬 감자가 걸쭉하게 잦아들며 거품이 끓어올랐다. 진혁은 지글거리는 감자의 조직이 산산이 분해되어 녹는 것까지 심안으로 확인하고 바로 감자 팬을 들어 올렸다. 매쉬드 포테이토 수준이 아니다. 황금빛 수프처럼 녹아내린 감자가 따끈따끈한 양념 돼지고기 팬에 되직하게 흘러내렸다. 짙던 감자 향이 향신료 사이에 묻히며 바닥에 가라앉는다. 돼지고기와 감자가 한데 섞이며 강렬한 향신료의 향이 더 풍부해진다.
“역시 돼지고기에는 감자가 잘 어울려.”
맛을 볼 필요도 없이 향만 보아도 얼마나 잘 양념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진혁은 9인치 파이 팬에 파이 껍질 반죽을 깔았다. 하나, 둘, 셋. 총 세 개의 9인치 파이가 만들어질 것이다. 심사위원뿐 아니라 무대 뒤편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넉넉히 만들었다.
“후우.”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팬 손잡이를 잡는다. 그는 파이 팬틀 소스 팬에 담겨 있던 고기와 감자를 단숨에 부어내렸다.
“저거, 저거 저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자칫해서 쏟거나 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보조 스태프들이 수군거렸다. 놀랍게도 걸쭉한 돼지고기와 감자 덩어리는 틀 안, 파이지의 2/3 되는 높이까지만 고였다.
“저걸 얼마나 연습했으면 감으로 저렇게 양을 딱딱 맞춰?”
『나이가 어리다고 경험이 부족한 건 아니군요. 수천 번 이상 저 요리를 연습했겠죠.』
스텔라 위스커스가 군침을 삼켰다. 이희주가 물었다.
“한 번에 따르는 게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그렇게까지 대단합니까?”
『베이킹은 과학이에요. 재료를 정확하게 계량하는 게 중요하죠. 처음부터 같은 양의 재료를 넣었다고 해도 요리할 때마다 재료의 상태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날 온도에 따라서, 습도에 따라서, 불이 얼마나 센지에 따라 달라지죠. 그 와중에 자신이 매일같이 다루던 화구가 아닌 다른 장소의 화구에서 최종적인 결과물까지 순식간에 가늠해내다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알 수 있군요.』
“그렇게 들으니 대단하네요.”
심사위원과 사회자가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실은 단순히 가늠을 제대로 했을 뿐이다. 사물의 원리를 꿰뚫어 보는 심안을 사용하면 계량 정도는 우습다.
‘그나저나 가족들은 언제 나오는 거야?’
심사위원석 옆, 지난 라운드에서는 일반 방청객들이 나왔던 기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두 개의 기둥 사이에 쳐진 무거운 벨벳 커튼까지 그대로다.
금방이라도 부모님과 진희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들은 나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 요리가 마무리되어가는 동안에도 대기실에서 스크린을 보며 보조 PD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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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이 저러다가 화상 입는 거 아니야? 고기 익히는데 저렇게 센 불을 쓰는 애가 어디에 있어.”
화면을 본 어머니가 걱정스레 말하지 진희가 웃으며 안심시킨다.
“엄만. 쟤가 충분히 자신 있으니까 저렇게 하는 거지. 매니저님이 그러시는데 진혁이가 불을 진짜 잘 쓴대. 똑같은 오븐이랑 가스레인지를 써도 불 다루는 스킬이 남다르다고 하시더라고.”
화면 속의 진혁이 손목을 흔들자 팬 아래의 불길이 다시 한 번 화르륵 치솟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노려보며 물었다.
“여보. 당신이 저렇게 가르쳤어요? 센 불로 빨랑빨랑 고기 익히라고?”
“내가 가르친 게 얼마나 있어. 알아서 배웠지.”
보조 사회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까?”
현재까지 남아있는 출연자 중 유일하게 온전히 한국에서만 경력을 쌓아온 제빵사 임진혁이다.
지금은 강남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새로운 빵집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전 경력은 아버지의 빵집에서 일을 도운 것밖에 없다.
이희주와 주영모를 비롯해 모든 이들은 임운정이 그 모든 것을 아들에게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르쳐준 건 아주 기본적인 것밖에 없어요. 오히려 저 녀석이 직접 개발한 케이크를 어떻게 만드는지 나에게 알려 줬지. 미각만이 아니라 창의력도 대단한 녀석입니다. 나같이 동네 빵집에서 단팥빵 만드는 노인네하고 달리 진정한 아티스트라고나 할까. 청출어람이라고, 나보다 더 실력이 뛰어나요.”
자신이 노인네라고 말하는 진혁의 아버지, 임운정은 20대 중반의 아들을 두고 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피부는 깨끗하고 주름은 얕되 온화한 표정에 점잖은 행동거지가 성숙해 어른으로 보인다. 보조 사회자가 웃으며 말했다.
“노인네라뇨, 엄청 젊어 보이시는데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어머니가 외쳤다.
“여보! 진혁이 좀 봐요. 지금 다 만들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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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다 만들었습니다. 어머니.’
부모님 앞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신경 쓰게 된다. 긴장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야. 부모님은 내가 뭘 하더라도 괜찮다고 하실 거야.’
똥오줌도 못 가리고 누워 있던 진혁이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감사하다고 하던 분들이시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내쉬어 마음을 평온히 하였다. 잘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의식할 필요는 없다.
그가 그냥 머랭을 치기만 해도 아버지는 잘한다 잘한다 하고 좋아하실 것이다.
세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리고, 세 출연자는 모두 조리대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이희주가 외쳤다.
“지금부터 심사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심사위원분들을 모셨습니다. 환영의 박수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