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7화
바로 돼지고기다. 일월신교에서도 돼지를 길렀다. 고산지대에서 알아서 잡초를 뜯어 먹고 잘 자라는 염소에 비해 인간이 돌봐주며 추울 때는 우리에 넣어 주어야 하는 돼지는 손이 많이 가는 짐승이다. 귀하고 사치스러운 가축인 돼지는 전부 제사용으로 사용되었으나 교주의 탄신잔치에서는 식용으로 사용했다. 고기와 내장은 식용으로, 가죽은 겨울 의복이 된다. 기름은 굳혀 보관해 양초로도 만들고 추위에 피부가 얼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습용으로 사용하는 둥 남길 데 하나 없이 유용하고 귀한 짐승이다.
‘고기만 쭉 있으니 낯설군. 도축한 고기 말고 가죽은 버리진 않았으려나 모르겠어. 아깝게 말이야.’
소가죽이나 양가죽, 심지어 뱀 가죽까지 가방이나 구두, 벨트에 쓰이는 것을 보았지만 돼지가죽은 판매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돼지고기 빵 요리라, 뭘 만들지?’
생각나는 것이 너무 많다. 진혁은 돼지가죽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 ◈
선반에 차곡차곡 올라가 있는 냉장 돼지고기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유키코가 눈을 크게 떴다.
‘풀드 포크!’
유키코는 망설이지 않고 포장된 풀드 포크를 집어 들었다. 풀드 포크(Pulled Pork)는 그녀가 이전에 돼지고기를 넣은 빵을 개발할 때 자주 사용했던 재료다. 구운 돼지고기를 전기 찜솥에 넣고 나서 바비큐 소스와 사과 식초, 닭고기 육수를 붓는다. 거기에 갈색 설탕과 겨자, 칠리 가루, 양파와 마늘 등으로 양념한 돼지고기를 푹 익힌다. 포크만 닿아도 연하게 찢어질 때까지 고온으로 다섯 시간 이상 익히면 풀드 포크가 된다. 미국 남부의 요리사들이 갈고 닦은 바비큐 소스를 이용해 만들어낸 요리로, 주로 캐롤라이나주에서 많이 만든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아직 드문 방식이다.
‘이거라면 그걸 만들 수 있어.’
재민이 유키코의 자취방에 처음 놀러 왔던 날 만들어 주었던 추억의 요리다. 칠 년 전 봄, 우에노 공원에 매화가 가득 피어 흩날리는 바람에 꽃잎이 소복이 떨어져 바닥에 쌓이던 날. 유키코는 라멘을 좋아하는 재민과 함께 외식할 생각으로 아무것도 준비해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유키코에게 만들어 주고 싶은 요리가 있다며 집에서 요리 재료를 가져왔다. 그것이 미리 양념한 풀드 포크와 모닝 롤빵 반죽이었다. 재민은 푹 익은 돼지고기 어깨살에 한국식 불고기 양념을 해서 익힌 후 모닝 롤 안에 넣어 구워 주었다. 유키코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고심한 요리라고 했다.
모닝 롤 빵 안에 든 풀드 포크도 맛있었지만 유키코는 그 빵을 더 맛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닝 롤에 우유나 버터를 넣어 더 부드럽게, 실크처럼 쉽게 찢어지게 만들었고 재민은 유키코의 능력에 감탄했다. 재민이 특이한 요리를 발견해서 아이디어를 가져오면 유키코가 이것저것 실험하며 새로운 빵으로 재탄생시킨다. 두 사람은 아주 잘 맞는 커플이었다. 고민 없이 당연히 두 사람 앞에 빛나는 미래가 무지개색으로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던 그때를 떠올리니 코끝이 찡해왔다. 유키코는 옷소매로 코를 문지르고 조리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돼지고기를 고르는 동안 내놓은 우유는 손으로 만졌을 때 실온 정도의 온도가 되어 있었다.
“우유 온도는 괜찮고,”
원래 풀드 포크가 우스터 소스를 베이스로 후추와 겨자를 넣어 미국식으로 양념하는 요리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제과제빵 프랜차이즈 베이커리 회사의 한국 분사 개발실에서 일한 후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직 대답을 받지 못했어.’
그녀는 방송을 통해 프러포즈했다. 아예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은 행동이었다. 재민이 방송을 보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이 2주가 지났다. 그녀는 꾸준히 병문안을 갔고 재활을 도왔지만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살아만 있어 달라고 했던 마음은 이제 없다. 이제 돌아왔으니 곁에 머물러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이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답답한 마음은 돌처럼 굳어간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후우.’
빵가루와 설탕, 소금과 인스턴트 이스트. 무염 버터도 적당히 녹아있고, 달걀과 카놀라유까지 모두 준비되었다.
조리 도중에 갑자기 부족한 재료를 가지러 간다면 동선이 꼬인다. 유키코는 재료 중 빠진 것이 없는지 점검했다.
여분의 달걀을 가져오고 나서야 그녀는 조리를 시작했다.
가스레인지의 화구에 손톱만 한 작은 불씨들이 총총히 피어올랐다. 저온 위에 올라간 자그마한 냄비에 적은 양의 물을 붓는다.
물이 익는 것처럼 팬 위에서 굴러다니며 공기 방울을 토해내는 그 위에는 우유를 420mL 부었다. 우유는 순식간에 물을 빨아들이며 더 큰 공기 방울을 뿜으며 보글거렸다. 이때가 중요하다.
“그리고 밀가루.”
미리 체쳐둔 제빵용 밀가루를 천천히 붓는다. 밀가루가 우유, 물과 한 몸이 되며 걸쭉해지도록 느릿하게 스크래퍼로 팬을 저었다.
하얗고 걸쭉한 반죽이 몽글한 덩어리 하나 없이 매끈하게 완성될 때까지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파란 스크래퍼에 더 이상 덩어리가 묻어나지 않을 무렵, 유키코는 드디어 완성된 믹스를 그릇에 옮겼다. 표면에 바로 닿게끔 랩을 씌운 그릇은 그대로 냉각기로 들어갔다.
‘빨리 식어야 하는데.’
보통 냉장고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니 냉각기에서는 시간이 더 덜 걸릴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표면적이 넓어지도록 낮은 접시에 담아 최대한 펴 발랐다. 믹스가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녀는 쉬지 않았다.
풀드 포크의 비닐을 벗겨 꺼내서 맛을 보고, 마늘과 우스터 소스를 추가한 특제 소스에 다시 넣어 졸이기 시작했다. 달콤한 바비큐 소스 향기가 주변에 퍼져나갔다. PD와 카메라맨들도 코를 벌렁거렸다.
‘좋은 냄새다.’
무대 뒤편, 대기실에서는 출연자들의 가족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보조 작가가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스크린 속에서는 이미 출연자들이 각자의 자리에 서서 열심히 요리하고 있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 저기 저분이 우시는데요.”
임진희가 보조 작가에게 속삭였다.
작은 스크린을 통해 유키코를 지켜보던 남자, 재민이다.
그는 휠체어에 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 시간 햇빛을 받지 못한 피부는 소녀처럼 곱다.
오랜 시간 누워있던 탓에 근육이 부족해진 팔과 다리는 가늘고 창백하다.
‘유키코가 그걸 만들고 있어.’
그녀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굵은 눈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남자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려던 보조 작가는 손수건을 도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재민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스크린은 다른 사람을 비추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의 순해 보이는 동양인이 쉐프 모자를 쓰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브라이언.”
붉은 곱슬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제시카 린든이 약혼자를 보고 반갑게 중얼거렸다.
촬영이 계속되어 몇 주 만에 만나는 연인이다.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서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보던 진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브라이언 신 쉐프님도, 유키코 김 쉐프님도 전부 애인이 와 있는데 진혁이 놈만 없잖아? 미란 언니랑 일봉쌤을 이어줄 때가 아니야.’
◈ ◈ ◈
브라이언 신은 전혀 다른 종류의 요리를 하고 있었다.
‘스리랑카식 롤을 해야겠어.’
그는 질이 좋은 돼지고기 등심을 골라내며 라드를 준비했다.
비누처럼 희게 굳은 라드는 돼지의 지방인데 이번에는 오일 대신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메밀가루.’
일부러 밀가루가 아닌 메밀가루를 골랐다. 미리 깨서 풀어 놓은 달걀 물에 우유를 넣으며 반죽이 너무 질어지지 않도록 젓는다.
안에 넣을 돼지고기와 더 맛이 어울리게 하기 위해 뜨겁게 끓여 녹인 라드를 한 스푼 첨가했다. 밀가루였다면 글루텐이 지나치게 많이 형성되어 고무처럼 딱딱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지만 메밀가루는 괜찮다.
브라이언은 블렌더에 메밀가루와 믹스를 넣고 순식간에 볶아냈다. 몇 초 만에 곱게 섞인 반죽을 그릇에 넣고 그대로 냉각기에 집어넣는다.
브라이언이 지금 만들고 있는 이 롤은 우유와 달걀, 밀가루로 만든 부드럽고 얇은 크레페로 양념한 고기를 감싸 굽는 요리다.
양념을 조절하면 에피타이저로도 훌륭하며 여러 개 먹으면 충분히 한 끼 식사가 된다.
브라이언은 이 요리의 기본이 되는 차이니즈 롤을 약혼녀인 제시카 린든에게서 배웠다.
‘외할머니가 가르쳐 주셨다고 했지.’
스리랑카 출신인 외할머니가 알려준 ‘차이니즈 롤’은 본디 중국식 춘권을 개량한 음식이었다.
원래 춘권은 얇게 튀겨 바삭바삭한 밀가루 피 안에 이것저것 채소와 고기를 집어넣는 음식이다.
양념은 거의 없이 잘게 썬 돼지고기에 마늘과 양파로 양념해 돼지고기 비린내를 잡는 정도다.
하지만 스리랑카식 차이니즈 롤은 양고기나 소고기에 스리랑카식 커리 가루를 듬뿍 넣어 간을 해서 훨씬 더 맛이 강하다.
브라이언은 메밀가루를 이용해 굽는 프랑스식 엑스트라 소프트 크레페로 겉껍질을 대체하고, 안에는 돼지고기에 인도에서 제일 흔히 쓰는 가람 마살라 커리 가루 양념을 할 생각이었다.
‘보고 싶다.’
벌써 몇 달 이상 제시카를 만나지 못했다.
시차 때문에 영상 통화를 하기도 쉽지 않아 주로 대화하는 것은 이메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받은 이메일은 사흘 전, 제시카는 이 프로그램을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다고 했다. 친절하게 영어 자막을 달아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고도 말했다.
‘그때 쓴다던 페이퍼는 다 썼으려나.’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제시카와 브라이언은 호텔에서 만났다.
당시 페이스트리 수쉐프였던 브라이언이 맡았던 사내 베이킹 클래스에 제시카가 참석했던 것이 첫 만남이다.
브라이언에게 불만이 있었는지 ‘지금 바나나가 제빵을 가르치는 거냐’며 인종 차별적인 말을 중얼거리던 건방진 구매부 인턴이 있었다.
브라이언은 인턴을 수업에서 내보낼 생각에 입을 열려는 순간 제시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턴에게 부끄러운 짓 하지 말라며 강하게 쏘아붙였다. 브라이언은 그 모습에 한눈에 반했다.
제시카는 당시 호텔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베이킹 클래스에서 놀라운 요리 솜씨를 뽐내는 제시카에게 페이스트리 키친으로 오지 않겠냐고 제안까지 했다.
제시카는 자신이 로스쿨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중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데이트하자고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가을 사과처럼 달고 봄의 장미처럼 향기로웠다.
두 사람은 오랜 연애를 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브라이언이 자신은 입양아로 나의 뿌리를 모른다며 고백하던 날, 제시카는 할머니에게서 배운 비밀 레시피 요리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이제 한 가족이 되자고, 자신의 뿌리를 나눠주겠다고 했다.
제시카가 브라이언에게 가르쳐 준 그 요리가 바로 이 ‘스리랑카식 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