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6화
수도꼭지는 저절로 열려 물을 뿜었고, 중력을 거스르며 솟구쳐올라 그릇에 맞부딪혔다.
그릇을 깨버릴 것처럼 강한 물살에 진혁이 다시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이건 안 되겠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을 통해 띄워 올린 그릇들은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을 이용한 수돗물 때문에 부서질 뻔했다.
진혁이 다시 손짓하자 수돗물은 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휘몰아쳐 작은 회오리가 되었다.
조금 전보다 더 약한 물살이었다. 세제 없이도 오물 하나 남겨놓지 않고 깔끔하게 씻겨진 그릇들이 차곡차곡 그릇 함에 가서 쌓였다. 누운 채로 설거지를 마친 진혁은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제안을 송신했다.
“…… 이 정도면 되겠지?”
◈ ◈ ◈
『알렉스, 한국에서 온 레시피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유나이티드 컴퍼니 인터내셔널(United Company International, UCI)의 본사에서 환자식 분야를 맡고 있는 책임자,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한글과 영문으로 쓰여 있는 이메일을 번역가에게 맡겨서 2차 대조를 마치고 구두 보고하러 온 사람은 안토니오 칼루치오였다.
이번 프로젝트의 보조자로 임시 스카우트되었는데 생각보다 일을 꽤 잘했다.
『닭고기에 토마토, 무 나트륨 베이크드 빈스에 콩이라.』
구하기 쉬운 흔한 재료를 사용했으며 겉으로 보기에 특별히 달라 보이는 점도 없다. 알렉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사흘 만에 보내다니 완성도가 의심스러워.』
『바로 끓인 수프 샘플도 가져왔습니다.』
안토니오가 자랑스레 웃었다.
『원래 치킨 수프는 오래 끓이라고 되어 있잖아? 어떻게 바로 가져왔지?』
『채소 육수(Veggie Base)는 골수에서 육수를 우려낼 필요가 없으니까 시간이 훨씬 적게 걸려요. 번역가에게 맡기면서 바로 실험 조리 주방을 빌렸죠.』
『크리스티나가 잘도 주방을 양보했네.』
자존심 강하고 자기 구역을 지키는 성격의 주방 책임자 이름을 말하며 알렉스가 코를 실룩였다.
‘냄새를 잘 모르겠는데.’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에는 채소가 다채롭게 담겨 있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수프다. 성분표를 보지 않는다면 환자식이라기보다 일반식의 에피타이저로 보인다. 하지만 건조하고 추운 나라로 출장을 갔다 온 알렉스는 고질병인 비염이 도져서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 지금 냄새를 전혀 못 맡는데 시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안토니오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게 더 좋습니다. 후두암이나 비강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도 어차피 냄새는 못 맡아요. 딱 좋네.』
레시피 목록과 수프를 비교하던 알렉스가 맛은 안 보고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거 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예 믹서기로 갈아버리는 버전도 해 봤어? 식감이 사라지면 맛없어질 것 같은 생김샌데.』
『일단 맛부터 보시죠.』
알렉스가 수저를 들어 수프를 한 스푼 떴다.
제일 먼저 입술에 느껴진 것은 다정하게 따뜻한 국물이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파프리카는 형태를 잃지 않고 아삭아삭하게 씹혀왔다.
팥죽색 베이크드 빈은 부드럽게 무너지며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렸고, 자잘하게 썰린 녹색 잎사귀는 코를 때려 깨우는 듯한 진한 향을 풍겨내며 존재감을 증명한다.
저절로 입안에 침이 고이며 다음 수저를 뜨지 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알렉스는 허겁지겁 수저로 뜨다가 숫제 그릇째 수프를 들이켰다. 여덟 살 때 이후로 하지 않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미친 듯이 맛있다!’
가라앉아 있던 무거운 채소들이 떠올라왔다.
보드랍게 입안을 감싸오는 푹 삶아진 감자에 단단함을 잃은 당근까지, 다종다양한 채소가 번갈아 무대에 등장해 맛을 뽐냈다.
어머니가 직접 끓여 온 치킨 수프처럼 가정적으로 생긴 주제에 멕시칸 스타일의 양념처럼 강렬하고 풍부한 맛이 난다.
이것은 특급 호텔의 에피타이저로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은 맛이었다.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수프 그릇을 기울여 바닥에 고여 있던 내용물까지 전부 마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드물게 먹어본 맛있는 음식의 뒷맛이 사라지는 동안 혀로 입안의 잇몸을 더듬거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핥으려 했다. 알렉스가 입안에서 혀가 이리저리 오가며 뺨을 불룩하게 솟게 하는 동안 안토니오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여기에 소금이 안 들어 있다고? 이렇게 농후하고 짙은 향이 나는데?』
환자식이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수프를 막연히 생각하던 알렉스가 감탄하며 물었다.
『온갖 허브와 채소를 우려서 국물을 진하게 뽑았습니다. 일단은 바로 만든 걸 가져와 봤는데, 크리스티나가 따로 식히고 있습니다. 이따 식힌 것을 데워 보고 맛이 얼마나 변하는지 확인할 겁니다.』
안토니오는 이 레시피를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아홉 종류를 제안했다고 했나? 이거 하나만 건져도 충분하겠군. 다른 수프들을 맛보는 순간이 기대되는데. 하나도 아니고 9개라, 이걸 사흘 만에 개발했을 리가 없어.』
『분명히 미리 생각해 두었을 겁니다.』
안토니오가 뿌듯하게 말했다.
『그는 아주 마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반려동물 대상의 수제 간식을 판매하는 집이 아닌데도 간절히 원하는 사람과 개를 배려해서 몰래 선행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죠. 세상의 아픈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민하며 연구하며 치열하게 만들어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이 사람은 놓치지 말아야겠군.』
◈ ◈ ◈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
2주 만에 방문하는 쿠킹 스튜디오는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밝디밝은 조명이 뜨겁게 내리쬐는 아래, 사전 인터뷰를 마치고 무대에 선 진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스무 명이 넘는 이들이 온갖 언어로 떠들어댔는데 지금은 간데없다. 뒤쪽에 유키코 김과 브라이언 신이 그 뒤를 따라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 많던 색목인들은 다 사라지고 이 셋이 남았군.’
수없이 늘어서 있던 조리대도 전부 해체하고 세 개만 남았다. 넓어진 무대 위 조리대 앞에 선 임진혁은 쉐프 모자를 바르게 고쳐 쓰고 똑바로 섰다. 그는 어떤 주제가 나올지 생각해 보았다.
‘가족들인가?’
무대 너머에 유난히 사람이 많다. 본래 스태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복작복작하게 오가고 있다. 평소와 다른 주제라고 해도 사람이 많을 이유는 없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있던 진혁은 낯익은 기운을 눈치챘다. 환골탈태한 이들은 기운이 정순하고 깨끗하여 다른 이들보다 느끼기 쉽다. 무대 저편에 부모님과 진희가 있는 것을 깨달은 진혁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오늘인가 보군.’
밤마다 방문해서 잠든 동안에 추궁과혈을 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깨어 있는 상태로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진혁은 설레는 마음으로 가족들의 기운을 느꼈다.
‘아버지. 처음에 대회에 참석한다고 했을 때 말리셨지요? 떨어져도 너무 맘 상해하지 말라고. 하지만 저는 지금 준결승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우승을 노리고 있어요.’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 결승에 진출해서 행동으로 보여주리라, 진혁은 가족들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여기 와 있는 걸 보면 진혁이가 깜짝 놀라겠지?”
장난스레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 서려 있다. 제과제빵 대학에 입학했을 때 들었던 벅찬 목소리 그대로, 아들을 한껏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진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곧이어 어머니가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잖아도 긴장하고 있을 애를 놀래서 뭐 하려고 그래요? 아무리 촬영팀이 비밀로 하라고 했다곤 해도 미리 말을 할 걸 그랬나 봐요. 그 착하고 순한 애를 놀라게 해서 뭐 어쩌려구요.”
진혁은 순간 ‘그 착하고 순한 애’가 누군지 고민했다. 세상천지에 그를 ‘착하고 순한 애’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머니 단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곧이어 높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신나서 말했다.
“엄마! 내가 진혁이 놀래는 걸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요. 걔, 요즘은 제가 뒤에서 왁 하고 나타나도 전혀 안 놀란단 말이에요.”
기대감에 가득 찬 진희 역시 텔레비전 출연에 들떴는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았다. 진혁은 가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기감을 퍼트려 주변 기물을 확인했다. 부모님과 진희가 있는 이 무대는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는 진희가 있는 곳 근처에 있는 바퀴벌레 두 마리를 확인했다.
‘죽어라.’
풍부한 음식을 향해 달리던 바퀴벌레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감각이 신경계에 전달되어 조그마한 뇌까지 전달되기 전, 삼매진화가 몸을 전부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뒤에 있던 바퀴벌레 역시 같은 운명에 처했다. 바퀴벌레 두 마리가 재도 남기지 않고 불타 없어졌으나 아무도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짧은 학살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PD가 촬영 사인을 보냈다.
◈ ◈ ◈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참가해주신 여러분! 처음 시작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무대 왼쪽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에 임진혁의 얼굴이 떴다. 그가 초반에 만들었던 봉분과 비석 케이크가 스쳐 지나갔다.
“개성적이고 강렬한 토종 제과제빵사, 임진혁 쉐프입니다. 이중 최연소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실력을 뽐내고 있지요.”
마법사처럼 망토를 펄럭이며 이희주가 신나게 소개했다.
방청객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진혁이 지금까지 만들었던 모든 케이크와 디저트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가며 관객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음은 유키코의 차례였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작품을 주로 만드는 일본계 페이스트리 쉐프, 유키코 김입니다! 세기의 로맨스로 유명하시죠? 제과 회사의 개발팀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쌓은 경험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빵을 창조적으로 개량하는 데 능숙합니다.”
그녀의 작품들도 빠르게 화면 위를 지났다.
마지막에 만든 20종의 케이크 위치까지 꼼꼼히 보여준 후에 브라이언의 케이크들이 순서대로 등장했다.
화려하고 우아한 케이크들은 앞선 두 사람과는 성향부터 달라 보였다.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미국 출신의 페이스트리 쉐프, 브라이언 신입니다. 호텔 경력을 통해서 빵만이 아닌, 모던하고 우아한 디저트를 만드는 데 능숙하죠.”
이제까지 그들이 만들어왔던 케이크를 분석하며 각자의 성향을 해설한 이희주가 웃으며 한 손을 들었다.
“그럼 오늘의 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출연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임진혁은 태연하게 서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저쪽 창고를 가득 채운 특징적인 ‘그 재료’에서는 아주 익숙한 냄새가 났다.
옛 중원에서는 귀하여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흔하디흔한 재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