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4화
‘어디선가 동작만 따라서 배웠나? 그렇게 보기에는 호흡이 너무나 매끄러운데.’
케이 요가원의 원장인 케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쇼팽의 초절기교 곡을 치는 피아니스트가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의 이름을 모르는 것처럼 괴상한 상황이다.
그녀는 이렇게 흐르는 듯한 선으로 모든 동작을 해내는 남자가 가장 기본적인 동작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 은둔하고 있는 요기(Yogi: 요가 수행자)에게 말은 모르는 채 동작만 배워서 달인이 된 걸까? 젊은 남자니까 혼자 인도 여행을 갔다가 길을 잃고 산속에서 말 못 하는 구루(Guru: 스승)를 만나서 동작을 배운 거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케이는 남자의 질문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예.”
“태양을 산스크리트어로 수리야라고 해요. 태양을 경배하는 자세에요. 여기 있는 이 포스터를 보세요.”
그녀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수리야 나마스카라인지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혁이 짐작했던 대로 시작할 때 다섯 번 반복한 자세였다.
“태양 경배 자세를 밤에 해도 됩니까?”
진혁이 궁금해하자 케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새벽에 해가 떠오를 때 하는 게 제일 좋지만, 바쁜 사람들이 매일 일출 시각을 챙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녁 시간에도 계속하고 있지요. 저희 요가원은 하루 일곱 타임, 새벽과 오전, 오후와 저녁, 밤마다 수련하실 수 있습니다.”
케이가 은근슬쩍 요가원의 수련 시간과 비용, 할인 혜택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진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슴을 열고 천지와 합일하는 것, 그리고 결가부좌. 두 가지만 유사하고 다른 자세들은 완전히 달랐어. 그 자세들은 우연히 비슷한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같은 가지에서 갈라져 나온 걸까.’
사실은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현재 한국에 일월신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울 한복판에 있는 수련원에 일월신교의 교리가 이어지고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아주 가느다란 실이라도 실마리를 따라 끝까지 가고 싶었다. 그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공유하는 누군가를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헛될 희망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하아…….’
어리석은 짓이다. 이곳에서는 가족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현재의 일에 충실하면 된다. 진혁은 이곳보다 중국 신강, 저 먼 대륙을 방문해 자신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장소를 탐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내리눌렀다. 일월신교의 명맥이 그곳에 이어지고 있건 이미 사라졌건 상관없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다. 그는 꿈틀하는 호기심과 미미한 희망을 짓눌러 마음속 깊숙이 파묻었다. 케이가 웃으며 말했다.
“요가원 오늘 체험해보시니 어떠셨어요?”
“나쁘지 않았습니다.”
너무 쉬워서 운동이 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기, 혹시…….”
일월신(日月神)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볼까, 하고 고민하던 차 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올해 서울 요가의 날에 저희 요가원에서도 대표를 내보내 시범 동작을 할 예정인데, 혹시 대표를 맡아 주실 의향은 없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케이가 전단지를 한 장 내밀었다.
“저희 요가원의 특별 회원으로 모시고 싶어서요.”
“그건 어렵겠습니다.”
진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건 일월신교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군.’
“참여하시면 즐거우실 거예요.”
“제가 좀 바빠서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막 매트를 정리하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끼어들어 말했다.
“원장님, 여기 이 분 모르세요?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출연하시는 임진혁 쉐프님이시잖아요. 전에 원장님이 드시고 맛있었다고 하신 샌드위치도 이분 가게에서 파는 거예요. 사거리역 앞의 카페요. 진~짜 정신없이 바쁘실걸요?”
“그럼 여유 생기시면 언제라도 들러 주세요.”
케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쉐프 일을 하시다 보면 손목과 허리에 통증, 하지 부종 등 문제가 생기실 수 있어요. 요가를 함께 하시면 건강에 아주 좋답니다.”
“알겠습니다.”
케이는 진혁에게 작은 책자와 요가 무료 체험권을 떠맡기듯이 쥐여 주었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태양 자세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는 작은 책자라고 해서 냉큼 받았다.
“다음에 꼭 또 오세요!”
“네에, 네에.”
‘양도가 가능한 쿠폰이니 다른 사람에게 주면 좋겠군.’
진혁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제일 운동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퇴근하고 오피스텔에 들어온 백진영이 막 잠옷으로 갈아입은 직후였다. 문 앞에서 단호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노크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진혁이야?”
“응.”
목소리를 확인한 백진영이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임진혁은 그릇들을 층층이 쌓아서 안고 있었다. 양손에 나눠 든 그릇은 세어보니 아홉 개나 됐다. 빈 그릇도 아니고 수프가 찰랑찰랑하게 담긴 그릇을 어떻게 저렇게 균형 잡고 들고 오는지 신기한 노릇이다.
“뭐야, 그건?!”
백진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서 진혁은 식탁 위에 그릇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형. 이거 시식 좀 해 줄 수 있어?”
“시식은 언제나 환영인데.”
솔솔 풍기는 냄새가 고소하고 따뜻하다. 기쁘면서도 조금은 걱정스럽다. 분명히 함께 걸어서 퇴근한 참인데 바로 또 뭘 만들어 온 걸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지만 이러다가 몸이 상할까 걱정된다. 백진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 너 나랑 같이 퇴근하지 않았냐? 그건 또 언제 다 만든 거야?“
진혁은 차례차례 밥공기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보니 밥공기 네 개에 국그릇이 네 개, 반찬 그릇이 하나다. 백진영은 은은한 토마토 향이 풍기는 국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여덟 개의 그릇에 담긴 수프는 언뜻 보기에는 비슷비슷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 다른 향기를 냈다.
“설마 8개가 다 다른 거야?”
“당연하지. 같은 거면 왜 그릇을 여덟 개 가져와?”
“그러니까 이걸 도대체 언제 만들었냐고.”
백진영은 제일 왼쪽에 있는 수프를 한 수저 떴다.
살짝 붉은 기가 도는 수프는 중국식 게살 수프처럼 끈적하게 수저에 담겨 올라왔다. 이전에 진혁이 한번 요리해준 적이 있었던 베이란과는 향부터 달랐다.
“으음.”
처음에 느껴진 것은 온도였다. 다정하게 따뜻한 수프가 입안을 적시고 아삭아삭한 파프리카가 씹혔다.
삶은 콩과 파프리카, 감자와 당근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져 내린다. 동양식 닭죽보다는 미국식 치킨 수프에 가깝다.
채소와 닭고기가 듬뿍 들어간 맑은 치킨 수프를 맛보며 백진영이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맛있다, 이거. 그런데 끓이는데 시간 좀 걸리지 않았어?”
“미리 만들어둔 걸 데우기만 했지.”
순식간에 수프를 마셔버린 백진영이 채소와 쇠고기가 담긴 붉은 수프를 그릇째 들어 올렸다.
자극적인 향기가 나는 수프에 코를 들이대도 냄새를 맡으며 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토마토 수프야?”
“아니, 채소 살사 수프. 멕시칸 살사 소스를 수프로 끓여낸 거야.”
살사 역시 직접 만들었다. 멕시코에서 제일 자주 사용하는 소스인 살사는 잘게 썬 양파에 마늘과 껍질 벗긴 토마토, 칠리 페퍼와 고수, 라임 주스를 넣어 만든다.
진혁은 새벽에 미리 만들어둔 살사를 채소 베이스의 국물에 넣어 살사 수프를 끓였다.
소금과 설탕을 사용하지 않고 간을 하기 위해 살사 소스를 빌려온 것이다.
“후우, 이것도 진짜 맛있다. 영혼을 깨우는 살사 수프네.”
백진영은 후루룩 살사 수프를 마시며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진혁이 킥킥 웃었다.
“그건 닭고기 수프에 해야 하는 이야기 아니야?”
“둘 다 맛있으니까 괜찮아.”
다른 수프들은 비슷비슷했지만, 맛이 살짝 달랐다. 진혁은 꼼꼼하게 백진영에게 질문했다.
“이 수프하고 저 수프 차이점을 알겠어?”
“둘 다 살사 수프인데 향이 좀 다른데. 왜 다른지는 모르겠어.”
“이건 채소 베이스, 저건 닭고기 베이스라서 그래. 어떤 데 더 나은 것 같아?”
“채소는 토마토 향이 진해서 잘 어울리고, 닭고기 베이스는 또 그 나름대로 맛있는데.”
“으-음.”
진혁이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진혁이 요리를 해온 경우 설거지는 무조건 백진영이 맡고 있다.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물에 헹구어내고 거품을 내 문질러 닦으며 백진영이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프는 왜?”
“개발 의뢰를 받아서.”
적은 양이라고는 해도 순식간에 여덟 그릇의 수프를 마셨다.
설거지를 마친 백진영이 배를 두들기며 소파에 눕다시피 몸을 기댔다.
“난 또 우리 가게 브런치에 모닝빵이나 바게트하고 같이 낸다고. 그렇게 해도 맛있을 텐데.”
“우리 가게에서는 이런 식으로 맛없게 안 하지”
“맛이 없다니?! 엄청나게 맛있는데.”
“이거 하루 전에 끓여서 포장해 둔 걸 뜨거운 물만 부어서 데운 거야. 그것도 소금이랑 설탕 쓰지 않는 환자용 메뉴야. 가게에는 소금 팍팍 치고 직접 끓여내야지, 이런 걸 내면 안 되지.”
백진영이 질색을 했다.
“너 삼계탕집에서 일하는 내 친구 목광우 알지, 광우?“”
“형이 여러 차례 얘기했으니 이름은 들어 봤지.”
“걔가 말하길 곰탕이나 삼계탕 같은 건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했어. 온종일 화구 하나에 사람이 매달려서 계속 저어주고 끓여주고 해야 맛이 난다더라. 완전히 슬로우 푸드 그 자체야. 우리도 좁은 공간에 지금 너랑 은동이, 유키코 쉐프에 베이커 쉐프까지 있잖아. 복작복작해서 할 수가 없어.”
“그 메뉴는…… 그거야 그렇지.”
진혁이 킥 웃었다.
“형. 그거 알아?”
“뭐?”
“지금은 곰탕이나 설렁탕 보고 슬로우 푸드라고 하는데 사실은 아니야. 옛날에는 그런 음식들이 패스트푸드였어.”
“온종일 끓이는 곰탕이 어떻게 패스트푸드냐?”
“옛날에는 요리를 하는 게 오래 걸렸으니까. 다이얼 하나 돌린다고 바로 화구에 불 들어오는 가스레인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제대로 된 객잔이나 주루, 요리점이라면 아궁이에 장작으로 불 때고 탕 하나쯤은 걸어 놓지. 그럼 주문 들어오면 바로 뜨거운 탕에 소면이나 밥 말아서 나갈 수 있어. 다른 메뉴들은 주문이 들어오는 시점에 조리를 시작하니까 무지무지하게 오래 걸리거든.”
백진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건 또 몰랐네.”
“그래서 수프 아홉 개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어?”
“다.”
진영이 당당하게 말하자, 임진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자라서 입맛이 까다로운 백진영이다.
그가 맛있다고 한 메뉴 절반 정도를 우선적으로 개발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다라고 하면 시식을 한 보람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