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2화
“그럼 안 될 텐데요.”
대뜸 거절의 말부터 들은 사업가는 가만히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물었다.
『저희는 아직 금액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만, 벌써 거절하시는 겁니까?』
안토니오가 황급히 말했다.
『진혁 쉐프, 이건 아주 아주 좋은 일이야. 미스터 알렉스는 암 환자들에게 영양가가 풍부한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고 싶어서 우리를 찾아오신 거라고.』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음식을 굳이 판매하시려는 이유는 <맛있는 환자식>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 그렇소. 환자식은 원래 맛이 없는 음식인데, 진혁 쉐프가 만든 환자식은 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도 놀랍게도 맛있었지!』
안토니오가 당황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 쉐프, 그렇게 바로 거절할만한 문제가 아니야. ……환자분들이 음식을 더 많이 먹으면 생존율이 올라간다는 연구도 있대. 죽기 직전인 말기 암 환자들이, 조금 더 행복해지는 거라고』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예?』
“그 음식들은 쉐프가 눈앞에서 조리한 요리를 바로 내간다는 가정하에서 만든 겁니다. 식은 음식을 다시 데우는 식으로, 인스턴트 음식 레시피로 그대로 한다면 더 맛이 없을 겁니다.”
고객에게 설명하는 듯 미소를 띠고 천천히 이야기하는 임진혁을 보고 안토니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기존 음식보다는 맛있을 텐데.』
안토니오가 중얼거리는 말을 무시하고서 진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맛없는 음식은 잘 팔리지 않겠죠? 지금보다 더 맛있는 환자식이 만들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알렉스가 동요하지 않은 평온한 태도로 팔짱을 끼었다. 안토니오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진혁 쉐프,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안토니오가 묻자 진혁이 대답했다.
“지금 환자식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소금과 설탕을 최소한으로 쓰면서 맛을 내야 한다는 거야. 네게 준 기존의 레시피의 경우 조미료를 최소한으로 뿌려 음식 본래의 맛을 살려서 담백하게 요리하잖아? 프랑스식 요리처럼. 하지만 그걸 식혔다가 데우면 음식의 식감도 망가지고 맛의 조화도 뭉개져 버린다고.”
『……!』
통역의 이야기를 들은 안토니오와 알렉스, 두 사람 다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데우는 것만으로도 맛있어질 수 있는 종류의 음식을 사용하고, 허브와 향신료를 미량 사용해서 간을 조절해야지. 식감이 뭉개져도 맛있을 수 있는 종류의 음식, 피자나 수프 같은 계열이 좋지 않겠어?”
진혁이 팔짱을 끼며 웃었다.
『시중에도 치킨 수프 알루미늄 캔이나 냉동 피자는 이미 개발되어 있습니다만.』
“캔은 안 되죠. 캔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에 계속 미량 알루미늄이 배어 나와서, 장기적으로 인체에 쌓이게 되니까 위험해요. 환자 대상이라면 캔이 아니라 파우치 계열로 가야 합니다.”
『……! 그건 최근 공개된 최신 논문인데 그것까지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완전히 새로 개발해야 한다는 말씀이신데.』
알렉스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가 잠시 안토니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칼루치오 쉐프, 이 분이 밀 키트를 개발할 수 있을까? 많이 어려 보이시는데…… 전의 그 레시피는 훌륭했지만 그건 그때뿐일 수 있잖아. 식품과 위해요소에 대한 해외의 최신 논문까지 파악하고 계신 점은 대단하지만.』
안토니오가 펄쩍 뛰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미스터 알렉스! 임진혁 쉐프는 내가 몇 년 동안 끙끙대며 고민하던 레시피를 이미 만들어 갖고 있던 천재라고요. 그런 종류의 영감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매일같이 노력하고 고민하며 치열하게 사는 페이스트리 쉐프만이 그런 최적의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요. 임 쉐프를 잡아야 합니다.』
유키코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알렉스가 신중하게 말했다.
『임진혁 쉐프, 그 새로운 아이디어는 이미 있는 건가?』
진혁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짧은 순간 침묵이 흐르며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진혁이 입을 열었다.
“금액이 맞는다면.”
『…… 금액?』
“개발비에 로열티. 얼마까지 생각해 보고 오셨습니까?”
『!!』
◈ ◈ ◈
이야기를 마친 후, 돌아가는 길이었다.
“제가 왜 따라왔는지 모르겠어요.”
“저쪽 통역이 제대로 통역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잖습니까.”
“임진혁 쉐프님, 이런 거래 자주 해 보셨나 봐요. 만만치 않던데요?”
유키코가 감탄하며 말하자 진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일이라고 해서 공짜로 할 수는 없지요.”
“빵을 개발하느라 바쁘신데 제품 논문은 도대체 언제 읽으신 건지 궁금하네요. 잠은 제대로 주무시는지.”
“논문을 읽은 건 아닙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는 이전, 치즈 케이크를 계기로 경지에 달한 이후 주변의 물질들을 세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옥수수 캔이나 황도 캔을 따면서 그 안에 극미량의 금속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인체에 흡입된다는 사실 또한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가게 내에서 사용하는 캔은 반입 즉시 진혁이 캔 내에 금속 요소가 고정되는 술을 걸어 놓아 섭취를 막아 놓았다.
‘내가 경지에 도달해서 알게 된 것들을 현대인들은 연구를 통해서 도착하는군. 만류귀종이라 할 법해.’
진혁이 현대인들에게 감탄하는 동안 유키코는 진혁을 칭찬했다.
“진혁 쉐프, 즉석에서 식어도 맛있고 그냥 먹어도 맛있는 레토르트 환자식 아이디어를 내놓으시다니 대단해요. 설마 바로 떠올리신 건 아닐 테고. 이미 만들어보신 적이 있으신 거죠?”
“저희 이모님이 몸이 안 좋으셨던 적이 있어서 그때 구상해 봤지요.”
“역시 효자세요.”
진혁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에 하는 브라이언 신 쉐프 결혼식, 유키코 쉐프님도 초대받으셨지요?”
“아……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한국식 전통 혼례는 처음 보는 것 아니신가요? 저도 이번에 처음 보는 거라 조금 기대하고 있는데.”
일월신교의 혼례식에서는 닭의 목을 잘라, 그 피를 신부와 신랑이 나누어 마신다. 신랑이 그 목을 깔끔하게 잘라야 한다. 무공의 고수가 한 번에 제대로 목을 자르면, 닭은 목이 잘린 것도 모르고 퍼드덕거리며 뛰어다닌다. 닭의 목을 친 후 얼마나 오래 살아있는지로 가른다. 한국의 전통 혼례에서 닭을 잡지는 않지만, 진혁은 유사한 장면을 재현해 줄 셈이었다.
“전통 결혼식에 어울리는 테마를 구상 중입니다.”
그는 봉관하피(鳳冠霞?: 봉황의 관, 구름무늬의 옷)를 입은 신부에게 어울릴만한 케이크를 생각했다. 원앙 한 쌍의 새를 만드는 것보다 봉황을 만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서경 중 한 권인 주서(周書)에서는 봉황이 닭과 비슷하며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 그리고 용의 비늘을 가졌다고 한다.
“그 케이크 저도 기대되네요.”
“와서 직접 보시면 되죠.”
유키코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한국의 결혼식에 가면 불길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길한 일이요?”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동티 날 일은 피하고 싶어서요. 결혼은 축하해 주고 싶지만, 식 참석은 피하라고들 하더라구요.”
‘우리나라에 그런 풍습이 있던가? 장례식을 치른 사람이 가면 안 되는 게 아닌가?’
한국 풍습에 대해 잘 모르는 진혁이 갸웃거렸다.
“그런 풍습은 잘 모르겠지만 유키코 쉐프님이 최대한 주의하고 싶어 하시는 건 알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로 여기고 계시군요. 사람마다 믿는 건 다 다르니까요. 저도 그렇고.”
“진혁 쉐프님은 종교가 없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뭔가 믿음이 있으세요?”
“믿음이라고 하기엔 뭐하고요.”
진혁이 피식 웃었다.
‘다른 이들이 말하는 <종교> 따위와는 다르지. 일월신교에서 받드는 것은 세상에 있는 유일한 진리니까.’
그는 이 세상에 오로지 그 혼자만이 무엇이 진정한 섭리인지 알고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가 다른 이들과 만나면서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세계관’에서부터 나오는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럼 징크스 같은 거라도 있나요?”
“징크스는 아니지만, 새벽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해를 바라보죠.”
해를 바라보며 하는 운기조식. 그것은 마치 종교의식과도 같이 그가 오롯이 홀로 진행하는 의식이었다. 하늘도 다르고 땅도 다르며 물도 다르지만, 저 하늘의 태양은 변치 않고 그 모습 그대로다. 이전에는 수백 수천의 교도 중 선발된 자들이 함께하는 의식이었으나, 지금은 오직 그 혼자만이 알고 진행한다.
“동이 트기 전에 햇빛을 받을 준비를 하다니 꼭 태양 경배 의식 같네요.”
그래서 유키코가 그 단어를 언급했을 때 진혁은 크게 놀랐다.
“그건 뭡니까?”
“저도 잘은 모르는데, 아쉬탕가 요가에서 요가를 시작할 때 하는 자세에요.”
유키코가 검지로 허공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보였다. 진혁이 눈썹을 꿈틀 였다.
“아무나 가서 배울 수 있습니까? 입문 의식이 필요하다거나 한 건 아니고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진혁이다. 그런 그가 요가에 흥미를 보이자 유키코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진혁 쉐프도 요가에 관심이 있으시면 제가 소개를 해 드릴게요. H & J에서 가까운 아쉬탕가 전문 요가원이에요. 제가 오래 다니던 곳인데 바빠서 요즘은 못 다니고 있는데 선생님도 아주 좋은 분이세요.”
‘요가는 잘 모르겠지만 태양 경배 의식이 궁금해.’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준비해야 할 건 없습니까? 개인 향로라거나 향이라든가.”
최근 진혁은 하고 있지 않지만 본래 의식에서는 특정한 허브를 태워 향을 피운다. 해가 오는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중의 하나다. 유키코가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께서 향을 피우는 날도 있으신데, 피우지 않는 날도 있으시고 그래요. 학생이 준비할 건 편안한 복장 정도? 개인 매트가 있으면 가져오면 좋지만요. 그건 체험을 해 보고 결정하시면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진혁 쉐프.”
유키코가 아직 웃음이 남은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진혁 쉐프는 승부욕이 없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승부보다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걸 만든다는 느낌이거든요. 이번에도 그렇고요. 심사위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준비해 온 거 만드셨죠?”
“…… 흠. 들켰습니까?”
“들켰다기보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랑 리처드 베이커 쉐프가 주로 해오던 걸 오마쥬해서 더 낫게 만들었잖아요? 리처드 쉐프도 이 방송분 보면 놀랄걸요. 저희를 향한 도전장을 심사위원에게 내밀었으니.”
“승부욕이 없다면 케이크 위치 승부를 일주일째 이어가지 않았겠죠?”
“그러네요.”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놓은 겁니다.”
진혁이 미소지었다. 유키코가 걸음을 멈추고 진혁을 바라보았다.
“승부욕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만만한 거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