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1화
‘그 남자가 결혼하지 않는다고 했지.’
유키코는 진혁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씩 숙취 해소 음료를 나눠 주었다. 숙취 해소 음료를 받은 브라이언 신이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유키코 쉐프. 그리고 진혁 쉐프! 잠시 괜찮으십니까?”
“음?”
브라이언은 길게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았다.
“제 부모님을 찾아주신 것. 따로 찾아가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진작 이야기를 드리지 못했죠. 제 친부모님도 진혁 쉐프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 사례는 유키코 쉐프하고 흥신소장한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난 한 게 없고.”
“물론 그분들께는 따로 사례했습니다. 하지만…… 흥신소장님은 임진혁 쉐프가 계시지 않았으면 의뢰를 받지 않았을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 음.”
브라이언 신이 두꺼운 카드 봉투를 내밀었다.
“이걸 꼭 받아 주십시오.”
진혁이 그 봉투를 열어 보았다. 두터운 종이 위에는 손으로 쓴 짧은 글과 장소,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익히 봐온 형식이었다.
“청첩장?”
“가능하다면 진혁 쉐프도 제 결혼식에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 한 번, 미국에서 한 번 합니다. 미국에서 하는 결혼식에 오신다면 저희가 호텔과 티켓을 준비하겠습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이 브라이언에게 준 작은 도움에 비해, 이 자가 표하는 예가 지나치게 중하다 느꼈다. 자기는 말 한마디 거들었을 뿐, 실제로 사람을 부려 부모를 찾도록 도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진혁이 뜬금없는 질문을 꺼냈다.
“웨딩 케이크는 누구한테 맡기는데요?”
“원래는 직접 만들려고 했는데 정신없다고 다들 말리더라고요.”
“날짜와 장소는 이미 다 정했는데 웨딩 케이크만 없다니. 시판 제품으로 할 생각이었습니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전통 혼례라서 케이크가 필요 없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진혁이 웃었다. 그는 이전 감 노인의 혼례에서 크로캉 부쉬를 만든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 축하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케이크다.
“진혁 쉐프가 맡아주신다면, 예. 영광이죠.”
브라이언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축하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직접 만드셔도 상관없어요.”
브라이언이 머쓱하게 웃었다.
“사체 결혼식 이런 테마를 생각하고 계신 것만 아니면 됩니다.”
“전에 했던 웨딩 케이크를 보여드리죠.”
진혁이 핸드폰을 꺼냈다. 행복한 두 커플의 모습이 정교하게 묘사된 웨딩 케이크, 그 위에는 크로캉 부쉬가 우아하게 맵시를 드러내고 있다. 브라이언이 그 케이크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아니, 임진혁 쉐프. 엄청나잖아요?! 이런 케이크를 만들 수 있었는데 여태까지 대회에서 그런 걸 만든 거예요?”
무심코 흘러나온 본심에 임진혁이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런 거’라뇨?”
“그래, 브라이언 쉐프! 우리 임진혁 쉐프는 한 종류의 컨셉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컨셉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고. 대단하지 않아?”
루이스 강이 갑자기 끼어들며 말했다.
“…….”
브라이언이 의아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전통 결혼식에 어울리는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컨셉은 따로 만나서 협의하죠. ”
“감사합니다!”
루이스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전화가 왔다. 그는 구석에서 목소리를 낮추어 전화 통화를 했다.
“승패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야, 너 자꾸 그렇게 말할래?”
동생에게 이야기하는 루이스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다정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루이스의 동생이 설마 형이 그 녀석에게 졌냐며 믿을 수 없어 하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점점 더 톤이 높아지긴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형제간의 격의 없는 대화는 듣기 나쁘지 않았다. 진혁은 수화기 너머, 마리오의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
‘사이좋은 형제로구만.’
진희 생각이 났다.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은 항상 누나 행세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호칭에 집착하지 않는다. 전보다 어른스러워진 느낌이다.
‘누나라고 불러주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이제야 오빠 대접을 해 주고 있어. 진희도 꽤 달라졌지.’
요즘은 누나라고 부르지 않아도 뭐라고 하지 않고 잠잠하다. 전처럼 병원에 드러누워 있지 않고 실력을 보여주며 사업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지도 모른다. 혼자 술을 마시던 임진혁에게 막내 PD 박하연이 말을 걸었다.
“저번에 키우시는 고양이 봤어요. 튼튼하고 건강하던데요.”
“건강…… 하죠.”
“저희 집 고양이는 잔병치레가 많아 걱정인데, 어떻게 그렇게 건강하게 키우셨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뭐 해준 게 있나요. 어머니께서 돌보다 보니 그냥 알아서 크던데요.”
진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나저나 막내 PD님이 저희 집 고양이를 봤다니, 추가 가족 인터뷰 촬영을 했군요?”
“앗! 그건 비밀이에요. 모르는 척해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프로그램에 가족들이 등장하려나 보군. 가족들을 초청해 방청하게 하는 건가? 아니면 가족들’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진혁은 다음에 진행될 대회를 대강 예상해 보았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연이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원래 건강하게 태어난 애라서 그런가 봐요. 휴우.”
‘그렇진 않지만 말이지.’
박하연은 스마트폰에 있는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꼬리를 치켜세운 작은 고양이는 화면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귀엽죠?”
“작군요.”
진호 고양이의 뒷다리만 한 작은 고양이다. 앉아서 앞발로 코를 문지른다거나, 발라당 누워 배를 보여주고 있는 사진을 보니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고양이는 주인을 매우 좋아하는군. 그런데 왜 이걸 나한테 보여주는 거지?’
진혁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자 하연은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다른 스태프들은 꺄꺄 소리를 내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머, 얘 아직도 이렇게 작아?”
“이름이 뭐였더라? 너무너무 귀엽다.”
“보들보들해 보이는 분홍색 코 좀 봐!”
진혁은 미간을 모았다.
‘저런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 건가?’
별달리 할 말도 없던 진혁은 계속해서 소주잔을 비웠다. 진혁의 앞에 놓인 빈 병이 여덟 개가 넘었을 무렵 유키코가 걱정스레 물었다.
“진혁 쉐프, 이렇게 많이 마시면 어떡해요? 정신은 있어요?”
“멀쩡한데요.”
“와! 진짜 멀쩡해 보이시는군요.”
“술 정말 세다.”
“나중에 <우리 고향 우리 술>에 나와도 되겠어요.”
제작진들이 웅성거렸다. <우리 고향 우리 술>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각지의 음식과 술을 맛보는 프로그램으로, 술꾼이라 자부하는 연예인들과 동네 주민이 나와 술 대결을 한다. 진혁의 아버지도 종종 시청한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제가 그 정도는 아니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혁 쉐프, 주량이 센데요?”
진혁은 멀쩡한 정신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끝입니까?”
“자, 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람들이 각자 일어나 코트를 찾고 가방을 들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진혁! 파리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루이스 강은 자신의 명함을 임진혁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진혁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적힌 명함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 갈 일이 있다면.”
“내 동생 놈도 너를 엄청 보고 싶어 해.”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본의는 아니지만 전화 통화를 엿들었던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하는 척하는 거야. 아직 애라서 그래. 자기보다 뛰어난 또래 제빵사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지.”
‘정말로 그런가?’
진혁은 과거 자신과 마리오가 만났던 때를 돌이켜 보았다. 재킷을 빌려 가서 돌려주었더니 씩씩대면서 자기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따라오다가 혼자 넘어질 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실없는 녀석이다.
“…….”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흠.”
진혁은 침묵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으면 그냥 입을 다문다. 루이스가 대범하게 웃어넘겼다.
“꼭 연락하라고.”
유키코는 저쪽 구석에서 통화 중이었다.
“고마워요. 예, 지금 데리러 갈게요.”
진혁이 손을 흔들어 유키코를 불렀다. 그녀 역시 H & J 카페 앤 베이커리 갈 테니 같은 택시를 타고 가면 된다.
‘전에 진영이 형 건도 있고, 이 나라의 택시 기사는 믿을 게 못 돼.’
지난 사건 이후 한국의 치안을 조금 불신하게 된 임진혁이었다. 택시는 금방 잡을 수 있었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가다가 진혁이 말했다.
“유키코 쉐프. 케이크 위치 건부터 이모저모 신세를 졌습니다.”
“신세라뇨. 애 도시락 싸는 김에 같이 만들어 왔던 건데, 거기에 불붙어서 대결이니 뭐니 한 건 임진혁 쉐프잖아요.”
유키코가 킥킥대며 웃었다.
“제가 오히려 배우면서 도움받았는걸요.”
“유키코 쉐프님. 지금 제일 힘드신 점은 어떤 거죠?”
“직장 상사로서 하시는 질문입니까? 일하면서 힘든 건 없는지?”
“그건 아니군요. 직장에서 있는 일 말고, 개인적인 일 중 힘드신 건 없는지.”
“…… 정말로 친절한 상사님이신 데요?”
유키코가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씁쓸한 미소가 지났다.
“힘들다기보다는 고민이죠. 오늘 시합 도중에 프러포즈한 거, 어떤 대답이 나올지 신경 쓰여요. 오히려 부담을 준 건 아닌가 싶고.”
힘으로 협박해서 강제로 결혼을 하게 시켜 보았자 오히려 관계가 엉망이 될 테니 이것은 진혁이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유키코 쉐프님, 아르바이트하실래요?”
“아르바이트요?”
“사업 통역 건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역은 어려울 것이 없는데요. 문제가 있어요.”
“예?”
“진혁 쉐프님이 사업상 미팅하시려면 가게를 비워야 하잖아요? 리처드 베이커 쉐프님이 진혁 쉐프님의 몫을 다해내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긴 했지만, 사실 혼자 다 하시는 건 무리예요. 진혁 쉐프님. 아니면 저와 리처드 베이커 쉐프는 가게에 있어야 해요.”
“…… 그건 괜찮습니다. 든든한 분이 계시니까요.”
진혁이 씩 웃었다.
◈ ◈ ◈
‘사업상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나흘 후였다.
“반갑습니다.”
통역 역할을 할 유키코와 함께 왔는데, 안토니오 역시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양복을 입은 흑인 한 명, 그리고 동양인 한 명과 함께 왔다. 흑인 남자가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귀하의 환자식 밀 키트(Meal Kit)를 개발하고자 합니다.』
동양인 남자는 옆에서 통역을 시작했다. 유키코가 눈을 깜빡였다.
“진혁 쉐프님, 제가 통역을 할 필요가 없겠는데요?”
“듣다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시죠.”
“예.”
흑인 남자가 제안한 것은 간단했다.
『안토니오 칼루치오 쉐프에게 넘긴 레시피 그대로, 레토르트 키트로 만들 겁니다. 미국 전역의 병원 편의점에서 판매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