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0화
진혁을 따라 입에 고기를 넣었던 루이스가 질색하며 고기를 도로 뱉었다.
“……내 건 익었는데.”
일단 기생충 따위는 진혁의 체내에 침입할 수가 없으니 날것을 먹어도 된다. 보통 사람이 생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맛 때문도 있다. 하지만 진혁은 날고기를 먹으며 연명한 적도 있으니 이렇게 제대로 도축해서 숙성 처리한 고기는 아예 날것으로 먹어도 입맛에도 나쁘지 않다. 진혁은 굳이 그 사실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으윽.”
이빨 자국이 난 고기를 다시 구우며 루이스 강이 말을 이었다.
“실은 임진혁 쉐프가 부러웠습니다.”
“…….”
진혁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루이스 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부럽지.’
뛰어난 제빵 실력은 상승의 무공 실력과 마찬가지로 전혀 ‘부러워할 것’이 아니다. 그 실력을 얻기 위해 무엇을 대가로 지불했는지 안다면 더 그렇다. 노력해서 그 경지에 닿기만 하면 되는데 왜 부러워한단 말인가?
‘이놈, 제빵하는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인데.’
화산파의 본산에서 수학한 장문인의 직전 제자가 시골 무관에서 속가제자 문하에서 무공을 전수받은 제자를 부러워하는 격이다.
“지금은 완전히 컨셉을 바꾸셨지만. 그전에 만들었던 컨셉들 있잖습니까? 피 흘리는 바다와 토막 난 인체. 보통은 기피하는 주제인 무덤 봉분 등등.”
“음?”
“전통이라는 굴레에 얽히지 않고 자유롭게 떠올리는 상상력과 그 상상을 재현해낼 수 있는 실력 말입니다. 바다에 피 흘린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색의 변화, 점차 진남색 파도에 휩쓸리며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붉은색을 표현하신 방식이 대단히 아름다웠어요. 임진혁 쉐프의 그런 점이 부러웠습니다. ”
“…… 음.”
‘이 녀석, 좋은 녀석이군.’
진혁은 루이스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그 색깔 변화의 미묘한 차이까지 보고 칭찬한 이들은 많지 않다. 보통은 ‘이런 걸 케이크라고 만들었냐’라는 반응이 대다수다.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요.”
유키코와 리처드 베이커는 진혁이 걸어야 할 길을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도록 권유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진혁이 걸어온 길을 좋아하며 부러워하는 이가 있었다. 그 사실은 싫지 않았다.
‘프랑스와 한국, 그 중간에 서 있는 네 고민 말인데. 나도 무림과 한국 사이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방황하는 순간이 있으니까, 우리는 아주 조금은 닮았는지도 모른다.’
루이스에게 미약한 동질감을 느낀 임진혁이 살짝 웃으며 변덕스레 말했다.
“살다가 힘든 순간이 오면 말씀하시죠.”
“예?”
“한 번 정도는 도와주죠.”
루이스 강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진혁보다 나이도 많았고, 경험도 풍부했다. 현장에 수년의 경험을 가진 그를 진혁이 도와줄 일이 과연 있을까?
‘누가 누구를 도와준다는 거야?’
놀리려고 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진지하다. 생각해보면 이 청년은 젊은 나이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장한 능력을 선보였다. 루이스 강이 웃으며 대답했다.
“……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한 번 정도는 무료로 도와줄 테니까.”
“하하하!”
진혁이 웃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그렇습니까.”
삐리리리, 임진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전에도 왔던 국제 전화다. 이탈리아계의 낯익은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임진혁 쉐프! 혹시 시간이 있나? 사업적인 제안이 들어와 방문하고 싶은데…….』
안토니오가 빠른 영어로 정신없이 주절거렸다. 임진혁은 굳은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어 루이스 강에게 넘겼다.
“그 무료 서비스, 지금 이용하죠.”
“예? 무슨 일이시길래.”
루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안토니오가 전화했는데, 통역을 부탁드려도 됩니까?”
“하하하하하! 물론이죠.”
루이스 강이 흔쾌히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한참 동안 메모를 하며 통화하더니 무어라 이야기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진혁에게 웃으며 말했다.
“진혁 쉐프, 안토니오 쉐프하고 뭔가 하기로 한 게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
“일단 다음 주 중에 한가한 날이 언제죠? 직접 만나서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던 브라이언 신이 놀라며 말했다.
“안토니오 쉐프라면 그, 탈락했는데 이긴 것 같은 그분 말이죠?”
스태프 중 한 명이 아는 척을 했다.
“성공한 쉐프들을 만나서 환자용 레시피 개발에 도움을 받으려다가 아예 레시피를 통째로 받아가신 분이잖아요.”
“만나서 감사의 뜻이라도 표하려나 보군요.”
브라이언 신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한국에 들어온다는 건 자기 돈으로 비행기 표까지 사서 날아온다는 건데. 사업 제안이라도 하려는 건 아닐까?”
정말로 성공한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다들 자기 사업을 한다. 다국가적 베이커리 체인 프랜차이즈를 경영하고 있는 아드레아노 존부나 컵케이크 가게 프랜차이즈의 CEO인 스텔라 위스커스,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 5개 베이커리 점포와 제과제빵사 국가 자격증 학원을 운영 중인 주영모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임진혁의 나잇대에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가 사업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진혁이 웃었다.
“지금 이미 벌여 놓은 사업이 있어서 바쁜데요.”
“이미 하고 있다고요?!”
“뭘 하길래!?”
다른 두 쉐프가 놀라며 물었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샌드위치를 개발하다가 지금은 샌드위치 공장을 짓는 중이죠. 직접 하는 건 아니고 자문 같은 걸 하고 있습니다.”
“임진혁 쉐프 실력은 진짜니까요.”
다른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유키코가 웃으며 말했다.
“무대에서 몇 번 본 거로 임 쉐프의 실력을 평가할 수는 없어요. 진짜 실력은 매일 옆에서 일하는 제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걸요?”
그녀가 가득 담긴 맥주잔을 내밀며 외쳤다.
“젊은 쉐프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건배할까요?”
“건배!”
선창에 힘입어 다들 맥주잔을 내밀고, 잔을 부딪혔다. 진혁은 유리잔이 깨지거나 금이 가지 않게 신경쓰며 건배를 했다. 개미를 들어올리는 것처럼 적은 힘을 사용하도록 주의하는 것쯤이야 쉽다.
“이제 대회도 끝났는데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루이스 강이 진혁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진혁이 루이스를 바라보며 아주 잠깐 망설였다.
“나도 편하게 해도 된다면.”
‘이 녀석이 갑자기 돌변해서 칼을 찔러올 일도 없을 거고. 설령 그런다고 해도 바로 죽여 버리면 되니까.’
현대 한국에 있어서 가장 좋은 점은 그거다. 그를 경계하는 강력한 거대 세력이 있어 간자와 첩자, 암살자를 끊임없이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전의 택시 기사 마냥 모기처럼 불 무서운 줄 모르고 날아드는 삼류 부랑배는 드물다.
진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루이스 강은 먼저 넘치게 콸콸 따른 소주잔의 내용물을 맥주잔에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맥주를 부었다. 거품이 일며 흘러내린 맥주가 소주와 함께 섞이며 연한 노랑 빛깔로 투명하게 빛난다. 의사도 묻지 않고 자연스럽게 맥주를 소주에 섞는 손짓이 아주 매끄럽다. 임진혁이 루이스를 재평가했다.
‘이 자식, 한국인 맞잖아.’
루이스 강이 자연스럽게 소맥을 제조하고, 음료를 추가로 주문했다.
“아주머니! 여기 콜라 하나, 맥주 하나 더 주세요.”
빈 맥주컵을 추가로 요청하더니 유리잔 안에 작은 소주잔을 넣는다. 소주잔에 약간 부족한 듯싶게 콜라를 붓고, 그 위 또 소주잔을 올린다. 뭘 하나 지켜보고 있노라니 맥주를 천천히 따라서 세 층이 생기게 술을 섞었다.
“고진감래라고, 동생이 한국 대학에서 배워서 알려 준 거야.”
“…… 흠.”
어디서 본 것 같지만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술 섞는 법이 생경해 뚫어져라 바라보자 루이스 강이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첫맛은 쓰고 뒷맛은 콜라의 단맛이 느껴져서 인생 같다고, 고진감래라고 한다고 하던데.”
“이제 기억나네.“
“진혁 쉐프가 나보다 더 잘 알 줄 알았는데. 뭐 또 더 아는 거 없나?”
“없어.”
진혁은 고개를 저으며 맥주잔을 손으로 살짝 잡았다. 양강지기를 조금 불어넣어 따뜻해진 맥주는 미지근해지고 말았다.
‘음…… 맥주는 따뜻하게 마시면 별로군.’
손님을 맞이하면 동주(董酒)나 분주(汾酒), 죽엽청(竹葉靑) 등, 술은 따뜻하게 데워서 내놓는다. 강호의 동도에게 있어 차가운 음료를 대접한다는 것은 푸대접을 의미한다. 너를 손님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옛 생각이 잠시 나서 스스로 술을 데워 보았지만 우스웠다.
‘차가운 물과 술을 요청하면 참 별난 사람 취급을 받았는데 말이지. 여기서는 내가 오히려 술을 데우고 있으니, 원.’
진혁은 데웠던 술을 도로 식혔다.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니 취하지는 않으나 즐거웠다.
“진짜로 네가 부러운 이유는 따로 있어.”
“왜?”
“너는 뿌리가 한국에 있잖아. 한국에서 태어나서 계속 한국에서 자라고 여기서 일하잖아.”
루이스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진혁이 잔에 술을 마저 따랐다.
“……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오래 머물면 거기서 그만큼 배우는 게 있지. 여기에 계속 있으면 모르는 것들 말이야.”
심법이라든가, 초식이라든가, 술법이라든가, 기문진식 같은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군대에 가 있던 어린 진혁은 몰랐던 것들. 쌍둥이 여동생이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이지만 그 일들이 있었기에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나보다 네가 더 어른스럽다.”
“뭐가?”
“보통 이런 말을 하면 프랑스 유학이 부럽다고 할 뿐인데.”
“평안 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싫은 거지.”
진혁이 태연하게 폭탄주를 한 번에 들이마시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진혁을 주목했다.
“임진혁 쉐프, 술을 잘 마시네요?”
“한 잔 더 따라드리죠.”
옆에서 김선호 PD가 끊임없이 술을 따랐다. 사람들은 이미 반쯤 취해 있었다.
“임진혁 쉐프, 술이 정말로 세군요.”
초반에 한두 잔만 마시고 계속해서 사이다만 마셨던 유키코가 감탄했다.
“별로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요.”
“제가 본 것만 맥주만 세 병, 소주만 네 병은 마셨는데요?”
“…….”
이 정도의 술로는 취하지 않는다. 진혁이 웃어 보였다.
“내일 일하는 데에는 지장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유키코가 한숨을 쉬며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진혁은 얼떨결에 갈색 유리병에 담긴 숙취 해소 음료를 받아들었다.
“그만큼 마시고 괜찮을 리가 있어요? 조금 전에 편의점에서 사 왔어요. 이거라도 마셔요.”
“이런 건 또 왜…….”
정말로 쓸데없는 짓이다. 유키코가 살짝 웃어 보였다.
“매일 도움만 받고 있으니까요.”
“이건 꼭 갚죠.”
“푸하핫! 갚지 않아도 돼요.”
‘아니, 갚을 건데.’
진혁은 이미 어떤 식으로 갚을 건지 생각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