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8화
태권도를 취미로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프랑스 청소년부에서 국가대표급 태권도 선수였지만 부상 때문에 그만둬야 했다.
‘상처를 극복하고 이겨냈다는 이야기는 재미없어.’
어린 나이에 프랑스에 갔던 루이스는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자기야 그렇다 치고 동생이 친구도 없고 말도 안 통한다며 콧물 흘리면서 울면서 돌아오는 게 싫었다.
루이스는 자기가 제일 잘하는 것을 애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배워 온 태권도식 발차기였다.
어린 소년들은 두 형제가 동양에서 온 무술의 고수라고 생각해 경외심을 가졌다. 그때부터 친구가 생겼고, 같이 노는 애들이 생기니 말을 배우기도 쉬워졌다.
루이스는 파리에 있는 태권도 도장을 찾아냈다.
엄마에게 졸라서 다니기 시작한 태권도장은 재미있었다.
동네 애들 앞에서 태권도의 달인인 척하려면 진짜 실력이 필요했다. 그 순간은 루이스의 인생을 바꾸었다.
몇 년간 도장을 다니며 꾸준히 연습했고, 파리 소년부 대회에서 우승해 유로피안 소년 챔피언십에 도전할 기회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전날, 모든 것이 망가졌다.
발차기를 연습하다가 발목을 살짝 삐었다. 발목 염좌는 태권도 선수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부상이다.
루이스는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무리한 동작을 시연하다가 정통으로 넘어졌고, 인대가 찢어져서 수술해야 하는 큰 부상을 입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는 루이스가 아닌 다른 선수가 나갔고, 루이스는 이후 무리한 운동은 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의견 하에 재활운동을 시작했다.
태권도 선수 생활을 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루이스는 그때까지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태권도 선수 생활에 필요한 비용이나 옷값 등을 일부 보태왔다.
빵집의 파티쉐는 루이스를 좋게 봤고 자신이 아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사람이 사부였다.
“빵은 보이는 대로 맛이 나야 혀.”
사부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로 느끼는 맛이 달라서는 안 되며, 바게트는 바게트처럼 생겨야 한다고 했다. 새로 개발하는 빵이나 퓨전 빵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전통의 가치를 지켜야 저런 것들도 의미가 있는 거지. 전통이 없으면 발전도 없는 법이야.”
사부는 루이스가 태권도를 하다가 온 것을 기꺼워했다.
“전통 무예를 소중히 여기는 놈이라면 우리나라의 빵도 소중히 여겨 줄 것 아니겠나.”
사물이 표리부동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던 사부는 자기가 말하는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요령을 부리는 법이 없이, 사십여 년간 한결같이 새벽 세 시에 일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우드 오븐을 예열하고 천연 발효종을 이용한 반죽을 직접 해서 하루에 천이백 개에 달하는 바게트를 구워냈다.
1993년 프랑스 당국이 발표한 ‘바게트 법’은 오직 밀가루와 물, 발효종과 소금만을 넣어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운 빵만 ‘바게트’라는 호칭을 쓸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 정부가 어떤 것이 전통 바게트인지 규정하기 전에도 프랑스식 전통 바게트를 만들어 왔던 사부는 그 법을 비웃었다.
“차라리 빵을 빵이라고 부르라고 법을 만들지그래? 당연한 것을 가지고!”
바게트에 미친 사부에게서 루이스는 수십 종류의 전통 바게트를 종류별로 어떻게 굽는지 배웠다. 수백 번, 수천 번 같은 사람이 같은 양의 똑같은 밀가루로 빵을 구워도 그때그때 다르게 나온다.
그날의 날씨, 기온과 습도, 반죽할 때의 힘 등 모든 것이 반죽의 점도에 영향을 준다.
수없이 빵을 구워내면서 루이스는 좌절을 잊었다.
더 이상 촉망받는 태권도 선수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뜨겁게 타오르는 오븐의 불길을 바라보면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분명히 어제와 같은 반죽 같은데 나오는 결과물은 다르다.
마침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도, 햇볕이 뜨거운 날에도 똑같은 바게트를 구워낼 수 있게 되었을 때쯤에 사부는 루이스에게 이제 네 빵을 구우러 가라고 했다.
그것은 파문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네 갈 길을 가라는 말이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부상 때문에 더 이상 프로로 활동할 수 없었던 운동선수가 좌절한다는 것. 사부가 아니었으면 그 시기를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루이스는 사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사부가 케이크 위치 같은 메뉴를 보면 기겁하셨을 테지.’
겉으로 보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케이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샌드위치다. 루이스는 그게 싫고 불편했다.
‘아니면 그냥 나 같기도 하고.’
프랑스에서 십 년 이상 살며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프랑스인이 아니다. 주류사회에서는 이방인일 뿐이다.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곳에서는 더 이질감이 심했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는 화제가 없다.
그는 이들과 다른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며 다른 학교를 다니면서 자랐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
겉은 한국인이지만 속은 프랑스인이 되다만 어설픈 무언가다.
케이크인 척하지만 케이크도 아니고, 샌드위치라고도 할 수 없는 케이크 위치 같다.
‘그래서 만들기 싫었나.’
치즈 크림을 바른 빵은 교묘하게 의태하고 있어 케이크처럼 보인다. 한입 물었을 때 진하게 맛이 느껴지는 햄과 치즈는 의외의 맛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당연히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며, 같은 감성을 공유할 것이라며 생각하며 말을 건 사람들이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외국에서 오래 사셨나 봐요.’ 하면서 한 걸음 물러날 때의 그 놀라움과 같을 것이다.
생각하던 크림 맛과 다르다는 놀라움, 그것은 본디 불쾌하여야 할 것이었다.
‘뭐야. 이거, 맛있잖아?’
달콤하면서 새콤한, 낯설고 신기한 맛이다. 두껍게 바르지 않은 치즈 크림은 빵과도 햄하고도 잘 어울렸다.
숨어있는 올리브와 토마토, 양상추는 아삭아삭한 식감을 더해준다.
자그마한 미니 케이크 위치는 하나하나 전부 다른 맛이었으나 모두 달라서 맛있었다.
케이크처럼 생겼으면 어떻고, 샌드위치처럼 생겼으면 또 어떠한가. 꼭 100% 순수한 프랑스인이어야만 하는가? 100% 한국인이어야만 하는가? 프랑스에서 자란 한국인이면 어떻고, 한국에서 자란 프랑스인이면 어떤가? 바다에 휘몰아쳐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처럼 의문이 샘솟았다.
‘이건 이대로 괜찮잖아.’
시간이 부족해 맛을 즐길 수가 없다. 잘라서 단면을 확인한 케이크 위치는 전부 바로 입안에 넣었고 하나씩 씹으며 맛을 확인했다. 장식용 삶은 메추리 알을 반으로 갈라 올려놓은 연한 마요네즈는 폭신한 우유 식빵과 잘 어울렸다.
‘마요네즈 안에 넣은 이건 참치통조림인가? 느끼하지 않게 기름을 빼고 따로 소금을 친 모양인데. 그냥 소금이 아니라 허브 소금 같아. 어떤 허브를 쓴 거지?’
깊이 의문을 가질 틈이 없다. 그다음에 맛본 두유 크림 새우 케이크 위치는 겉보기에만 예쁜 것이 아니었다.
신선한 새우살이 탱탱하게 입안에서 씹히는데, 담백한 두유 크림과 놀랍게도 잘 어울렸다.
두유 크림 안에서 톡톡 씹히는 옥수수 알갱이와 새우살의 조화 역시 아주 좋았다. 하나하나가 감탄할 수밖에 없는 맛이다.
‘감탄할 틈이 없어. 빨리 다음 것을 맛보고 기억해야 해.’
짭짤한 새우를 먹고 난 후에 루이스는 다급하게 물을 들이마셨다.
“켁켁, 캑.”
그가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출연자, 브라이언 신이 멀리서 안타까워했다.
“5분에 20개. 15초에 1개를 확인하고 헷갈리지 않게 기억하라는 셈인데……. 20개 중 몇 개나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느냐를 대결하게 되겠네요.”
“좋은 테스트로군요.”
임진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실력보다 운을 테스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브라이언은 자신이 지금 저 자리에 서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분은 너무 적다. 아무리 겉으로 봐서 알 수 있게 재료를 올려놓았다고 해도, 케이크 하나당 5분은 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임진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맛 확인은 빨리 빨리해야 위험하지 않잖아요.”
‘독을 맛볼 때는 더욱더 그렇지.’
임진혁의 말에 브라이언이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빵이 왜 위험해요?”
“…….”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각종 독의 맛을 구분하기 위한 테스트를 시행해 보니 후각이 예민한 녀석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냄새만 맡고 맛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유리한 녀석들은 미각이 예민한 녀석들인데, 혀끝만 살짝 닿아도 무슨 독인지 바로 알아내니 오래 맛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개중에 후각도 미각도 둔감한 놈들이 있어서 쓰러질 때까지 독을 핥곤 했다. 하지만 지금 저들은 그런 테스트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맛인지 알아내는 데 오래 걸리면 위험하겠네요. 승부에서 질 위험성이 높아지니까요.”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혼자 납득해버린 브라이언 신을 보며 진혁이 웃었다.
“맞습니다. 그 얘기였습니다.”
◈ ◈ ◈
루이스 강이 허둥거리는 동안 유키코는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케이크 위치를 절반으로 가른 다음에,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고서 살짝 맛을 보았다.
‘작년 밸런타인데이 한정으로 나왔던 컵케이크들을 케이크 위치로 만든 거야.’
쿠키 앤 크림 케이크 위치와 초콜릿 칩 케이크 위치는 스텔라 위스커스가 이미 공개한 컵케이크 레시피를 변형한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하나씩 하나씩,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루이스 강이 어떤 속도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를 위해서라든가, 아들에게 아버지를 갖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따위도 전부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유키코는 이 기회를 꼭 잡아야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제빵사의 자존심만이 아니다. 그녀는 스텔라 위스커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의 케이크는 내 삶의 희망이었어요.’
케이크 위치를 만드는 데에는 자신이 있다.
스무 개 중 열 개는 유키코가 과거 재현했던 컵케이크와 유사하다. 그녀는 메뉴를 하나씩 빠르게 확인했다.
‘백포도주 식초와 흑설탕을 넣어 절인 파프리카를 안에 넣으면 돼.’
그녀는 파프리카에 살짝 혀를 대어본 후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옆에 있는 방울토마토 케이크 위치도 마찬가지다.
아래에 있는 하얀 크림은 삶은 달걀과 마요네즈를 섞은 에그 마요 샐러드가 분명하다.
촉촉하게 닿아오는 크림을 보기만 해도 달걀과 마요네즈를 1:1로 섞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레시피를 혀를 통해 재차 확인한 후 유키코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스타 페이스트리 쉐프에게 최고의 작품을 완벽하게 재현해 바칠 수 있다니, 팬으로서 얻기 어려운 경험이다.
‘기다리라고요, 스텔라 위스커스 쉐프님. 제가 당신의 케이크 위치를 똑같이 만들어서 맛보여드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