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7화
머릿속이 핑핑 돌며 온갖 생각이 다 든다. 30cm 거리 앞에 임진혁 쉐프님이 서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쁘다. 이재희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부회장 언니도 엄청 오고 싶어 했는데 내가 당첨돼서…….’
진바라기 회원 중 방청객으로 초대되어 온 사람은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지금 무대에 올라 임진혁을 영접한 행운의 주인공은 이재희, 자신밖에 없다. 평생 쓸 운을 여기에 다 써버린 것 같지만 후회는 없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이재희를 깨운 것은 테너처럼 낮고 그윽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받아서 드셔보시면 맛있을 겁니다.”
“아, 예에!”
이재희는 당황해서 입을 딱 벌렸다. 눈앞에 임진혁 쉐프님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너무 감격해서, 쉐프님이 내민 케이크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양손을 내밀어 접시를 받았다.
‘kim88님이 직접 만들어서 선물했다는 접시야…….’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임진혁 쉐프는 자연스럽게 묵례를 하고 빙글 돌아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케이크 위치를 가져다주었다. 이재희는 눈앞의 케이크 위치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걸 그대로 플라스틱 수지에 넣어 굳힌 다음에 가보로 물려주고 싶다
‘아니야, 임진혁 쉐프님이 먹으라고 했으니까 먹어야 해. 먹고 심사도 해야 해.’
이걸 먹어버리면 그대로 없어져 버릴 텐데, 아깝고 아깝다. 그녀는 최대한 적은 양을 포크로 잘라내 살짝 맛보았다. 혀끝에 닿는 소고기는 아주 맛있었다.
‘최고급 햄버거를 케이크 모양으로 구웠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야, 이건 햄버거 패티 같은 살이 아니야. 조금 더 건강하고 아삭하면서 신선해.’
도톰한 고기가 이름 모를 향 강한 채소와 함께 듬뿍 씹힌다. 공기를 충분히 뺀 반죽에 크림을 섞어 반죽한 식빵은 촉촉하고 부드럽다. 이재희는 지금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너무너무 맛있어. 평생 이런 걸 먹으면서 살고 싶다.’
임진혁이 만든 ‘로스트비프 케이크 위치’를 먹은 방청객들은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접시를 내려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이거 더 없나요? 더 먹고 싶다.”
“너무 맛있어요.”
방청객들이 칭찬하는 가운데, 중년 아저씨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어디서 살 수 있나? 포장은 안 되나?”
진혁이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출연자석과 방청객석은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진혁은 반 푼 정도의 내공을 실어서 목소리를 보냈다. 덕분에 그가 하는 말은 무대 전체에 아주 잘 들렸다.
“아쉽게도 여기서는 어렵군요. 반응이 좋으면 나중에 가게에서 판매는 고려해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팔아야지.”
케이크 평가단 석에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심사위원석은 조용했다. 밤의 사막처럼 고요한 침묵 속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심사위원석에 누가 말 좀 시켜!’
이미 방청객들은 케이크 위치를 더 달라고 언성을 높이고 있다. 김선호 PD는 카메라 옆에 서서 렌즈에 보이지 않는 범위에서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댔다. 그가 필사적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심사위원석에 있던 이들 중에서 방송 경험이 제일 풍부한 이희주 사회자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케이크 위치를 쪼끄마한 조각으로 하나 얻어먹었을 뿐인 그가 먼저 입술을 뗐다.
“미쳤네요.”
이희주 사회자가 말문을 열자, 스텔라 위스커스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이건 로스트비프가 아니에요, 내 인생의 보물이죠.』
『이전보다 더 발전했군.』
“두유 크림하고 로스트비프는 어울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한 거지?”
주영모 쉐프는 질문부터 던졌다. 임진혁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보통 케이크 위치를 만들 때는 빵에 포마드 버터를 발라서 균형을 맞추지 않습니까? 포마드 버터 대신에 홀스래디쉬 소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따로 삶은 풋콩을 갈아내 한 겹 얹었더니 괜찮아지더군요.”
『아, 마지막 소고기 아래에 깐 게 풋콩 간 거로군.』
『두유 크림을 차갑게 굳혔을 텐데 고기에는 차갑지 않고 열이 남아 있어 혀를 부드럽게 적셔와요. 이건 어떻게 하신 거죠.』
‘소고기를 구울 때 양강지기를 십 분의 일 푼 정도 아주 조금만 주입하면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나와도 거뜬하지.’
진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고기 안에 잔열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다행이군요.”
『당연히 콜드 슬라이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혀 위에서 겨울과 여름이 함께 축제를 벌일 수 있다니. 정말 놀랐어요.』
“맛있게 드셨습니까?”
그녀가 푸른 눈을 들어 정면으로 임진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환상적인 경험이었어요.』
스텔라 위스커스와 임진혁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드레아노 존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눈앞의 케이크 위치를 절반 남겨놓은 상태였다. 그가 지그시 눈앞의 케이크 위치를 살폈다. 존부는 눈으로 케이크를 잡아먹을 것처럼 접시 위의 남은 조각을 노려보았다. 그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더니 아주 천천히, 남겨둔 조각을 입안에 넣었다.
『시크릿 링 케이크에서 임진혁 쉐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확인했지. 하지만 지금 이 맛은 이미 그때를 뛰어넘은 맛이야. 다시 맛봐도 대단해. 엄청나다고.』
진혁이 가볍게 웃었다.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케이크에도 경지가 있다면 아드레아노 존부의 경지는 가히 현경의 고수가 아닐까? 그는 자신이 지금 제빵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강남 목 좋은 곳에 작은 무관을 낸, 평판 좋은 신진 고수쯤 되겠군.’
신진 고수 평가를 받은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해야 할 것도 많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신난다.
‘무당파처럼 역사가 오래된 정파의 경우에는 속가 제자들이 독립해 나와 호북성 곳곳에 자그마한 무관을 내지. 내 무관이 무당파처럼 역사를 쌓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 새로 영업하는 객잔이나 주루 같은 것과 비교해야겠지만, 진혁은 아직 모든 것을 무공 중심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그저 점점 더 많은 메뉴를 개발해 나간다면, 작은 진혁 무관(武館)들이 번성하지 않을까, 아니, 진혁 베이커리가 속속들이 늘어나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개발한 빵을 먹게 되지 않을까?
‘너무 섣부른 생각이야. 당장은 눈앞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에 만족해야지.’
진혁의 차례가 끝났다. 이제는 심사 발표를 할 시간이다. 루이스 강이 불안한 표정으로 진혁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번 라운드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은 임진혁, 임진혁 쉐프님이십니다! 열렬한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심사위원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던 시점부터 이미 예견된 결과다. 루이스 강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손뼉을 쳤다.
‘이거 동생 놈한테 망신을 당하겠는걸.’
반면에 브라이언 신은 밝은 미소를 띠고 열정적으로 박수를 쳤다. 유키코 역시 자기 일처럼 기쁜 표정으로 신나게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와아아아아아!”
케이크 평가단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중에서도 여고생 한 명이 목이 쉬도록 절절하게 진혁을 응원했다. 그리고 곧, 패자부활전의 시간이 왔다.
“네 분 모두 멋진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떠나야 할 시간이지요.”
주영모와 이희주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남은 세 사람은 곧 다가올 선고를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유키코는 심사위원들을 올려다보았다.
‘호두 껍질을 제대로 손질했어야 했는데.’
아니면 차라리 꿀의 함량을 더 높여서, 쓴맛을 더 사라지게 했어야 했다. 습관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됐다.
그녀는 지금 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날, 자신의 곁에 있을 남자를 떠올렸다.
‘내가 우승을 한다면 다시 웃어 줄까…….’
힘든 재활에 지친 그는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들을 만나면 가끔 웃기도 하지만, 본래 밝고 쾌활하던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가끔은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깨어나기만 하면 바랄 것이 없다고 느껴왔는데, 막상 깨어난 그를 보자 이것저것 욕심이 생겼다. 조금 더 웃어 줬으면 좋겠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의 앞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웃든 말든 상관없어. 그에게 내가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이건 내 일이니까.’
유키코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서 자신의 롤 모델, 스텔라 위스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제과제빵사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하다. 오백 개 이상의 지점을 거느린 프랜차이즈를 경영하면서도 새로운 컵케이크를 계속해서 개발하고, 다양한 방송에 출연한다. 하지만 유키코는 스텔라의 그런 점이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스텔라 위스커스 쉐프는 잉꼬부부로 유명하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과 엄마를 꼭 닮은 두 딸.’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 유키코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나도 당연히 저렇게 살게 되리라 생각해왔지만 그러지 못했지…….’
하지만 그녀가 지난 몇 년간 겪어왔던 시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결혼하지 않은 아이 엄마인 데다가 외국인인 그녀에게 세상이 얼마나 가혹한지, 그녀는 혹독하게 겪었다.
“그리고 패자부활전에서 만나게 되실 두 분은, 유키코 김 쉐프와…….”
유키코가 주먹을 굳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루이스 강과 브라이언 신이 한순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제 다른 한 명의 패배자는 누구일 것인가? 배경에 깔린 스네어 드럼 소리가 쿵쿵, 귓가에 울린다. 이희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루이스 강 쉐프님입니다!”
◈ ◈ ◈
패자부활전이 시작되기 직전, 짧은 심사 총평이 있었다.
“네 분 모두 최선을 다해주셨습니다. 사실은 한 분이 케이크같이 생기지 않은 걸 내지 않을까 의심했는데 그렇지는 않더군요.”
『조스 살해 사건을 만드신 그분 말이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입니까?”
『이번엔 진짜로 발목 같은 게 나오는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발목은 이미 케이크가 아니라고.』
“자, 자. 여기 계신 네 분 모두 훌륭한 케이크 장인입니다. 지금 눈앞의 케이크 위치 하나만으로 평가받기에는 너무 아까우신 분들이죠. 유키코 쉐프의 케이크 위치도 정말로 아까웠습니다.”
『안타깝죠. 마멀레이드도 맛있었고 얼그레이 커스터드 크림도 풍부한 향에 산뜻하게 잘 나왔는데,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제가 그 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케이크 위치라는 컨셉이 낭만적이었고 사랑스러웠어요.』
『여기는 이벤트홀이 아니라 디저트 서바이벌 쇼니까. 생존을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을 고려해야지.』
“루이스 강 쉐프의 케이크 위치는 어울리지 않는 빵이 두 종류 들어갔다는 데서 혹평을 받았죠. 그 점만 고쳤어도 좋을 텐데, 아쉬웠죠. 아마 케이크 위치 자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