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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186화 (186/656)

제 186화

그리고 또 삼십여 년이 지났는데, 이때 그는 자신보다 한 수 아래인 무공 천재, 남궁가의 가주 남궁천과 생사결을 짓다가 현경의 벽을 깨고 생사경에 도달했다.

생사경의 경지에서 진혁은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을 겪었다. 흰 머리와 수염이 빠지고 새로이 검은 머리가 돋아나며 피부의 주름이 사라지고 뼈와 근육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남궁천에게 일말의 빚을 졌다고 여긴 임진혁은 변덕스레 남궁천을 살려 주었는데, 이것 때문에 광안마가 엄청나게 징징거렸다.

‘끝이 아니었어.’

진혁은 지금 자신이 이미 일월신공을 전부 소화해 입신하기 위한 직전, 탈마의 경지이자 마선의 경지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탈마의 경지 너머에 있는 새로운 벽의 존재를 느꼈다. 동시에 벽 너머에 있는 이들을 심안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저기로군.’

주눅이 들어있는 젊은 청년은 목에 임시직 명찰을 걸고 있었다. 젊고 건강해 보이는 그 청년은 다리가 부러진다고 해도 금방 회복될 것처럼 생겼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려는 듯 오른발을 살짝 들었다. 공기의 흐름이 잠시 흔들리더니 청년의 허리 뒤쪽에 거센 바람이 밀어닥쳤다.

“어어어어어!!”

한쪽 발을 든 채로 갑자기 흔들리며 균형을 잃은 청년은 손을 휘젓다가 물통 뚜껑을 그대로 잡아 열어버렸다. 청년과 함께 넘어진 물통에서 2리터에 달하는 물이 그대로 콸콸 쏟아져 나왔다.

“야, 이놈아!”

“용만 씨! 다치지는 않았어요?! 어머, 여기 시퍼렇게 멍든 것 좀 봐.”

“멍청한 놈이, 바로 일어나서 여기 물부터 닦아!!”

“매니저님! 미화원 아저씨 불러요, 얜 지금 몸도 제대로 못 가누네요.”

진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늘도 착한 일을 했다. ……아.’

광안마 놈이 있었으면, 저런 실수를 저지른 놈을 보자마자 적절한 처벌이라며 채찍으로 저놈 목을 잘라 날려버렸을 것이다.

‘굳이 내가 벌을 주지 않아도 되잖아?’

하지만 지금 이곳은 현대. 광안마 놈은 여기에 없다. 그 녀석이 섣불리 칼을 휘둘러 목을 베어버리기 전에 적절한 처벌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전에 내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주변의 부하 녀석들이 과도한 충성심으로 지나친 형벌을 줘버리는 통에 골치가 아팠지.’

일 년 동안 감옥에 가두기 이런 건 꺼내주면 되는데, 목이나 팔을 잘라버리면 도로 붙여줄 수가 없으니 곤란하다.

‘광안마 녀석이 그리울 때도 있군.’

그 녀석이 곁에 있었다면 끊임없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품위를 지키라고 귀찮게 굴었을 테니 없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녀석이 그립기도 하다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역시 없는 것이 좋아.”

진혁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브라이언이 물었다.

“임진혁 쉐프도 굳이 타르타르 소스가 아니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음?”

유키코가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각자 취향은 다 다르니까요. 타르타르와 연어는 아주 잘 어울려요.”

“심사를 듣고 나니 거기에 아보카도까지 넣은 게 조금 과했나 싶군요.”

브라이언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심사위원석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아드레아노 존부가 브라이언의 케이크를 평가하였다.

『훌륭한 케이크 위치입니다. 숲속의 버터라고 하는 아보카도, 그리고 바다의 쇠고기라고 하는 연어가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소스와 크림의 조화가 조금 아쉬웠으나 이대로도 충분히 좋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걱정하고 있던 브라이언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아드레아노가 한 마디 덧붙였다.

『단순한 장식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정진해 주십시오. 미래가 기대되는군요, 브라이언 쉐프.』

브라이언은 이제까지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들로 케이크를 꾸며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지극히 단순하고 우아한 케이크를 내놓았다.

‘임진혁 쉐프가 내놓는 컨셉은 확실하게 한 방향이 있어. 내 케이크의 정체성은 <화려함>이었지.’

하지만 이번 주제 ’케이크 위치‘ 에서는 기본적으로 안에 들어있는 재료가 샌드위치의 재료라는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그 재료를 구상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고, 원하는 만큼 충분히 장식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장식이 칭찬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페이스트리 쉐프로서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한 단계를 넘어섰다고 느꼈다.

‘임진혁 쉐프는 이제 특이한 소재라는 컨셉을 넘어서 단순함을 추구하고 있지. 나도 이제 단순하면서 우아한 디자인을, 장식이 없는 케이크를 구상해봐도 되겠어.’

벌써 머릿속에 몇 개나 새로운 시안이 떠오른다. 브라이언은 눈이 촉촉해져 눈을 깜빡였다. 고국의 TV에 출연하고 있으며, 친부모님을 찾았고, 케이크 위치 라운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지금이 내 인생의 전성기가 아닐까.”

그가 중얼거리자 임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젊은데 벌써 전성기라니, 최소한 마흔은 넘고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지.”

“임진혁 쉐프님은 아직 서른도 안 됐잖아요?”

“그러게요.”

진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루이스 강이 브라이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좋은데!”

“하하하.”

사회자가 마지막 남은 쉐프를 호명했다.

“임진혁 쉐프, 앞으로 나와주세요.”

◈          ◈          ◈

진혁이 2단 케이크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최초로 눈에 들어온 것은 도화지에 진한 녹색 크레용으로 그어놓은 듯 선명한 진녹색 크레송이었다. 그 아래에는 얇게 썬 진분홍빛 쇠고기, 그 노란 체다 그리고 다시 진분홍빛 얇은 쇠고기, 다시 하얀 모짜렐라 치즈, 또다시 진분홍빛 쇠고기가 보인다. 캐러멜라이징될 정도로 볶아 달콤한 향을 풍기는 갈색 양파 소테, 그리고 다시 진분홍빛 쇠고기가 있다. 총 여덟 층의 쇠고기 사이사이마다 치즈와 양파, 그리고 크레송이 눈에 띄었다.

“여기 있습니다.”

진혁은 흰 접시에 옮겨 담은 케이크를 한 조각씩 심사위원들에게 가져다주었다. 특급 호텔의 웨이터처럼 반듯한 자세다. 조각 같은 콧대, 깊은 눈매와 꽉 다물린 입술에서 남녀 방청객들의 시선이 떠나지 않았다.

“너무 맛있어 보인다.”

“고기가 빵보다 두 배 두께는 되는 거 아니야?”

“겉은 케이크인데 안에는 수제 햄버거가 들어있네.”

케이크 평가단 방청객들이 삼삼오오 말했다. 제일 먼저 케이크 위치 조각을 받은 것은 심사위원인 스텔라 위스커스였다. 그녀는 로스트비프와 크레송이 섞인 신선하고 풍부한 향을 콧속 깊이 들이마셨다.

『냄새가 좋군요.』

분홍빛 콧구멍이 벌렁거리며 향기를 폐 깊숙이까지 빨아들였다. 그다음 순서인 주영모는 케이크 위치를 받은 즉시 접시째로 입에 가져갔다.

“로스트비프를 이렇게 절묘하게 익히다니, 이건 식기 전에 먹어줘야 해.”

아드레아노 존부는 품위 없이 허겁지겁 케이크 위치를 먹고 있는 주영모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정중하게 케이크 위치를 받아들고서 나이프를 들었다. 아드레아노는 이미 잘려 있는 로스트비프 케이크 위치를 다시 절반으로 잘라내더니, 분홍빛 고기 부분만 일부 썰어내 입안으로 가져갔다.

『어디 보자.』

핏기가 살짝 비칠락 말락 하는 부드러운 고기다.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으며 육즙이 터져 나왔다. 가장자리는 갈색으로 바싹하게 익히고, 안쪽은 붉은색이 덜 된 핑크빛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아드레아노가 중얼거렸다.

『이 케이크 위치의 핵심은 소고기로군.』

『크레송과 소고기가 기가 막히게 어울려요, 치즈도요,』

『왕관의 가운데 박힌 다이아몬드처럼, 이 소고기가 크레송과 모짜렐라, 체다와 양파를 균형 있게 잡아주고 있어. 두툼하고 두껍게 썰어 육질을 강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얇게 썰어서 중간 중간에 다른 맛을 집어넣은 거야,』

심사위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임진혁은 케이크 위치 아래에 있는 접시를 보며 흐뭇해했다.

‘부탁하길 잘했어.’

진혁이 미리 스튜디오에 가져다 둔 이 접시는 김가영이 구워온 수제 도자기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흰 무광 사각 도자기 접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혁이 어떤 케이크나 빵, 과자를 구상해서 담아도 그 무엇과도 조화를 잘 이룬다. 그 위에 담긴 음식을 조금 더 먹음직스럽게 보여준다고나 할까.

‘역시 이 접시가 잘 어울려. 그 여자한테는 도공이 천직이야.’

무공과도 같다. 혈도객의 강건한 체격과 긴 팔에는 검이 어울린다. 하나 검이 만병지왕이라 해도 모든 이들에게 검이 적절한 것은 아니다. 창이 어울리는 자가 있으며, 도끼를 쓰면 최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있다. 광안마는 검도 쓸 수 있지만 멀리서 거리를 두고서 낭창한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즐긴다. 키가 작고 팔이 짧지만 눈은 나빠 창을 들었으나 진혁이 채찍을 추천해 주어 뱀 가죽을 꼬아 만든 채찍을 쓰게 되었다. 육체와 성격, 그리고 살아오면서 형성한 가치관이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가영 씨는 역시 빵이 아니라 자기를 만들어야 한다니까. 당문의 독기 노인한테 소개해주면 좋을 텐데 아쉬워.’

독기(毒器) 노인은 암기의 달인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도공이기도 했다. 도자기 연적이나 벼루, 붓 같은 문방구만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노리개나 비녀 등 다양한 생활 잡화에 독을 주입했다.

‘뭐, 골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암기만 만드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빵집에서도 일하고, 공방도 다니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지.’

이전에 김가영과 백진영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얼핏 들었다. 인간문화재인 스승이 아예 이천의 공방에 내려오라고 했던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였다. 진혁은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여겼다. 벽돌처럼 딱딱하게 만든 바게트부터 시작해서, 머랭을 걸쭉한 크림 눈물처럼 만들어버리는 둥 제빵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 김가영이다. 진혁은 그녀가 H & J에서 일하기 전부터 백진영과 함께해왔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한 친절한 여자다.

‘오지랖이 넓은 게 단점이지만, 손은 빠르지. 뭘 하던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잘 할 거야.’

진혁은 딴생각을 하면서 케이크 평가단들에게 하나씩 흰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          ◈          ◈

“여기 있습니다.”

마침내 여고생, 진바라기 회원 이재희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내 앞에 임진혁 쉐프님이 서 있어.’

사진이나 동영상은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티 하나 없이 백옥처럼 희고 깨끗한 피부는 갓 구운 우유 식빵만큼 고와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썹에 맑은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초연하다.

‘진짜 제빵만 하시기엔 아까운 얼굴이야. 저 조각 같은 몸매에 곧은 자세하며……. 임진혁 쉐프님이 제빵 계에 머물러 있는 게 대한민국 연예계의 크나큰 손실이라는 얘기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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