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85화 (185/656)

제 185화

“…….”

루이스는 팔짱을 끼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브라이언 신이 말했다.

“제 케이크는 아주 맛있습니다. 연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좋아할 거고요.”

“내 신호등 케이크도 맛있다고. 하지만 저길 봐. 일반인 평가단이 감동해서 울고 있잖아. 저걸 어떻게 이겨?”

루이스가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지금 맛이 아니라 이야기를 먹고 있다고.”

무대 한구석의 케이크 평가단만이 아니라 관객석에 앉아있는 방청객들 전부가 거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마저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중년 아저씨가 콧물을 훌쩍이며 유키코가 잘게 잘라준 케이크 위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만에 하나 내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내 마누라가 나를 계속해서 기다려 줬다고 하면…… 케이크가 아니라 석탄을 구워 줘도 먹어 줘야지.”

그 옆에 앉아 있던 안경을 쓴 30대 남자는 숫제 울먹이고 있었다.

“저는 군대 갔다가 백일 휴가 나와서 여자친구한테 이별 통보를 들었던 적이 있어요. 백일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5년 가까이 기다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응원합니다.”

감정적으로 동요한 건 남자들만이 아니었다. 여자들 역시 코끝이 상기된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는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렸거든요.”

먼저 이야기를 꺼낸 여자는 평범하게 생긴 30대로, 정장을 갖춰입고 있었다.

“전 남자친구가 군대 간 거 기다리는 2년 동안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연락도 안 되고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애인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소식도 모르는 사람을 믿고서 몇 년씩 기다렸다는 게 대단하고…… 미련해요. 나라면 저렇게 못 할 거라는 걸 아니까 존경스럽고, 응원해 주고 싶어요. 남편분은 전생에 세계를 구하신 게 아닐까요?”

“그 애인 분을 찾아서 오해가 풀린 데다가, 의식도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사람 한 명 인생 망칠 뻔했잖아요.”

지긋하게 나이든 아주머니가 점잖게 말했다.

“애도 있는데 당연히 결혼해야죠.”

“국어 시간에 배운 조선 시대 망부석 이야기 생각나요.”

바다 너머로 배를 타고 멀리 떠난 남편을 절벽 위에서 기다리다가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 여인의 설화다. 수업시간에 배운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재희가 생각했다.

‘만일 임진혁 쉐프님이 내 애인이라면 저렇게 기다릴 수 있을 텐데.’

여고생 이재희가 이야기했다.

여고생이 하는 생각과 정반대로, 직장인 여성이 말했다.

“솔직히 요즘 세상에 누가 저렇게까지 하냐고요.”

마치 주부 사랑방 같은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케이크의 맛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게 저분 남편 될 사람이 좋아하시는 맛이군요.”

“이 케이크를 받는 사람이 남편이어야 할 텐데, 우리가 다 먹어버려서 어떡해? 텔레비전 너머로 케이크를 먹을 수도 없고.”

“알아서 새로 만들어 주지 않겠어?”

유키코는 케이크의 맛보다 자신의 이야기가 더 고평가되는 상황에 약간 당황했다. 심사위원들은 일반인 방청객들의 의견을 들어 보고 난 후 의견을 교환했다.

“치즈 크림이 느끼해지지 않게 설탕을 추가해서 맛을 조절했군.”

『이 오렌지 콩피는 아주 제대로 됐어요. 난 이런 맛이 좋아요.』

『중간중간 씹히는 견과류의 맛과 얼그레이 커스터드 크림, 슈가 크림치즈 크림이 아주 잘 어울려.』

『호두의 껍질을 제거하는 후처리를 게을리한 건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 뒷말이 씁쓸하군요. 잼이 진하게 달아서 나쁘지는 않은데, 이건 후처리하는 편이 더 맛있었을 거예요.』

‘아차, 호두!’

재민 씨는 호두 껍질의 씁쓸한 맛까지 좋아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굳이 그걸 심사위원이 맛볼 케이크에서 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키코는 당황했으나 애써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희주가 호명했다.

“브라이언 신, 케이크 위치를 잘라 주세요.”

“예.”

그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굳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번 케이크에 자신이 있었다.

“연어 타르타르와 아보카도 케이크 위치입니다.”

임진혁과 유키코가 눈빛을 교환했다. 어제 유키코가 만들어왔던 것 역시 연어 케이크 위치였다. 그녀는 훈제 연어와 올리브, 그리고 토마토와 양상추를 사용했다.

‘그것도 꽤 맛있었는데. 브라이언 신이 만든 케이크 위치는 어떠려나.’

임진혁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데, 갑자기 진행 보조 요원들이 스튜디오 바깥에서 나누던 이야기 중 ‘물통’이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왔다.

‘내 물통 비워 놓은 놈인가?’

본디 스튜디오 내외부를 구분하는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어, 스튜디오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촬영할 때 녹음에 잡음이 섞여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이 ’물통‘은 진혁이 촬영을 시작할 때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 왜 물통이 있어? 네가 빼놓은 거 아니냐?”

나이가 많은 진행팀 관리자 한 명이 누군가를 야단치고 있었다.

“어? 아니에요! 분명히 다 안에 갖다 놨어요.”

젊은 목소리가 억울해하며 말하는데, 관리자가 호통을 쳤다.

“갖다 놓긴 뭘 갖다 놔! 여기 세 통 전부 물이 가득 차 있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등장해 젊은 목소리를 도와주었다.

“매니저님, 얘가 오늘 실수한 것 같지는 않아요. 다 채운 물통을 갖다 놓지 않았으면, 촬영할 때 난리 났을 거 아니에요. 지금 안쪽에 페이스트리 쉐프님들 전부 문제없이 오늘 케이크 위치 만들기 다 끝내셨어요. 벌써 심사 중이라고요.”

“그거야 그렇지.”

관리자는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하지만 젊은 목소리가 눈치 없이 다시 말했다.

“관리자님, 스튜디오 안까지 들릴지도 모른다고 복도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지금 나보고 조용히 하란 얘기야?! 그럼 이렇게 복도에 물통을 방치해놔도 돼? 이게 다 방송국 재산이다, 이놈아!”

이야기를 전부 들을 필요도 없다. 임진혁의 입가에 쓴웃음이 서렸다.

‘저놈 짓이군.’

누군가 일방적으로, 진혁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실행한 짓이 아니다. 그저 멍청한 실수일 뿐이다. 진혁은 그게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제대로 된 음모였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벽을 폭발시키면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촬영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천장을 무너뜨려도 마찬가지다. 진혁은 천리통(千里通)을 잠시 내려놓았다.

지금은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기감을 뻗쳐 인간들의 기척을 살폈다. 벽과 스튜디오에는 공기를 통과시키는 관이 여럿 연결되어 있어 어렵지 않았다.

‘누가 어디에 서 있는지?’

삼류 무인보다도 약한, 아주 아주 약한 기척이 셋 느껴졌다.

‘이쪽인가.’

심안(心眼)으로 방음벽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이 벽은 소리를 통과시키지 못하게 만들어진 벽이며, 그 건너편에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자리해 있다.

진혁은 살짝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심안을 통해 이 두꺼운 벽을 뚫고 벽 너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전에 원격으로 치즈 케이크를 만들려고 했던 때와 똑같다. 한순간 세상이 점멸하며 눈이 부시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한순간, 선명하게 보였다.

“!!!”

강호의 무인 중 제일 흔한 자들은 삼류 무인이다. 재능 없는 자가 무공에 입문하여 제대로 된 사부 산하에서 5, 6년을 정진하여 수련하면 삼류 무인이 된다.

삼류 무인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인 열 명 정도는 혼자 두들겨 팰 수 있을 정도다. 강호의 파락호나 흔한 부랑자는 삼류 무인도 무림인이라 부르며 피한다.

모래알처럼 수많은 삼류 무인 중에서 재능이 없고 성실한 자는 십여 년, 재능이 뛰어나며 진심전력을 다해 정진하는 자는 이삼 년, 재능이 있으나 노력이 부족한 자는 칠팔 년 이상을 무공에만 매달려야 이류 무인이 된다.

일류 무인이 되기란 이보다 더 어렵다. 만 명의 삼류 무인 중 삼천 명 정도가 이류, 백 명 정도가 일류 무인이 될 수 있을까 말까 한다.

일류 무인은 한 성에 두어 명이 있으면 많다고 할 정도로 그 수가 적으며 절정의 경지에 달한 무인은 희귀하다.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이만 명 중 한두 명 정도만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다.

하지만 최소한 절정에 달한 무인만이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가주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기에, 그들은 후계자의 무공 수준을 높이려 최선을 다한다.

한 가문이 뛰어난 무인과 풍부한 금력을 동원해 어린 시절부터 후계자 교육에 정성을 들인 끝에 간신히 장년의 나이에 절정 고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홀로 수련해서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회자된다.

그러한 절정 고수들 사이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초절정이라 한다. 구파일방의 장로가 상당수 포함된 무림맹의 팔대 고수와 일월신교의 칠장로가 초절정의 위치에서 무림의 절대 고수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초절정의 너머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최초로 알린 자가 바로 임진혁이다. 본디 무공이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실력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바깥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그 경지가 삼류에 불과할지라도 태양혈이 솟고 눈에 총기가 충만하여 누가 보아도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 진혁이 새로이 도달한 경지에서는 자신의 기를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 반박귀진이라 하는 이 경지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태양혈을 가라앉히고 눈의 총기를 숨기어 일반인인 척 가장할 수 있다.

진혁은 이 방법을 써서 동서남북의 강호를 헤집으며 돌아다녀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었다. 그는 이 경지를 ’현경‘이라 이름 지었다.

진혁이 최초로 현경에 도달하고 이십여 년, 그는 혈도객과 광안마 두 부하의 경지가 현경에 닿도록 이끌어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기들이 최강이라 믿어오던 정파의 늙은 생강들은 세상에 도산검림-임진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무공을 절차탁마하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섰다. 어떻게 보면 진혁이 강호 무림인들의 경지를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시 현경의 초입에 입문했던 임진혁은 세상에 생사경이라는 벽이 또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았다.

진혁의 뒤를 따라오던 혈대곡과 광안마, 남궁천은 항상 그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언제나 진혁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한 걸음 한 걸음 탐험하는 느낌이었다.

‘보이저호가 된 느낌이었지.’

현대의 지식이 아무것도 없는 인간들을 상대하며 환멸이 치밀 때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과학 시간에 배웠던 지식들은 잊은 지 오래지만 70년대에 우주선 하나가 인류에 대한 정보를 금판에 새겨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래의 언젠가 외로이 우주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여행하고 있을 그 금판을 생각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우주는 넓고 지구는 티끌에 불과해. 나도 티끌 속에 잠시 있다가 갈 먼지일지도 모르고.’

어찌 보면 무림이 세상의 전부라 믿고 있는 이들보다 현대의 과학 지식을 통해 우주와 현대, 미래에 대한 사색을 하는 진혁이 더 멀리 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다음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