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4화
『아니, 진짜로. 저런 케이크를 만들 수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였다는 이야기잖아요.』
『이제까지 저런 걸 만들지 않고 뭘 한 거야? 저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야?』
“출연자한테 저놈이라뇨. 그보다 두 분, 화내신 이유가…….”
『센스가 엉망인 건 자기 잘못이 아니지! 하지만 할 수 있는데 안 한 건 자기 잘못이야!』
『지난 회차 쇼까지 만들었던 잔혹한 장면들! 그건 케이크가 아니었다고요. 우리들을 갖고 놀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면, 이건 심사위원에 대한 모독이에요.』
“일부러 그랬을 것 같진 않은데, 한 번 물어보죠.”
이희주 사회자가 마이크를 가지고 출연자 좌석으로 다가갔다. 그가 임진혁 쉐프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물었다.
“임진혁 쉐프님, 지난 회까지 만들었던 케이크와 이번에 만든 작품의 스타일이 매우 다른데요. 그동안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으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방청객 여고생 이재희는 입을 딱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임진혁 쉐프님이 만든 게 맞았어! 정말로 환골탈태하신 것 같아!’
그녀가 거짓을 말할 필요도 없이, 임진혁 쉐프가 스스로 바뀌었다.
‘부회장님, 회장님, 임진혁 쉐프님은 역시 멋져요!’
팬 한 명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임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리처드 베이커 쉐프와 유키코 쉐프에게 어떤 케이크가 아름다운지 많이 배웠습니다.”
“…… 그럼 이제껏 만드신 케이크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셨던 겁니까?”
“비장미가 있었죠.”
“두 쉐프님들이 많이 가르쳐 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유키코 쉐프는 라이벌의 실력을 늘려서 어떻게 하실 셈이죠?”
질문의 방향이 유키코에게 돌아갔다. 유키코가 웃으며 대답했다.
“본래 제가 아는 제과제빵은 다른 사람과 실력을 겨루는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실력을 가다듬어서 눈앞에 계신 손님께 최선의 빵과 과자를 드리면 됩니다.”
“하지만 이건 대회잖아요?”
“대회라고 하더라도 심사위원님과 방청객 여러분들이 제 빵을 드실 ‘손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임진혁 쉐프님은 임진혁 쉐프님의 최선을, 저는 제 최선을 선보여드리면 됩니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이희주가 유키코 쉐프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심사위원석에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주영모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임진혁 쉐프의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어.”
‘내가 가르쳐 줬어야 했는데, 리처드 베이커 쉐프와 유키코 김 쉐프한테 배웠다니. 고작해야 1주라는 시간 만에 저렇게 변하다니 엄청나군.’
스텔라 위스커스가 임진혁 쉐프를 노려보다시피 하면서 말했다.
『여태까지는 몰랐다가 이번에 새로 배웠다는 거죠? 대중성이 1주일 만에 배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말이 되냐고요.』
『극히 단순하게 하는 것만 배웠다면, 한 주 만에 배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그보다 당장이라도 맛을 보고 싶군.』
『맛은 항상 최고였으니까요, 부족한 겉모습도 나아졌고요.』
순식간에 임진혁은 유력한 우승 후보로 뛰어올랐다.
◈ ◈ ◈
곧 심사가 시작되었다. 심사위원들이 진혁의 케이크 위치를 제일 먼저 먹고 싶어 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심사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첫 번째로 심사를 받을 케이크 위치는 루이스 강이 만든 <타라마살라타>였다. 명란을 넣은 타라마살라타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살굿빛과 인테리어 소품처럼 사랑스러운 모양으로 여자 방청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분홍색이고 동글동글하고 예뻐요.”
루이스 강이 연한 핑크빛 돔을 절반으로 자르자, 그 안에 있는 빨갛고 노랗고 초록색 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신선하고 생생한 토마토, 풋콩과 찐 옥수수. 토마토와 콩, 옥수수 사이에는 흰 빵과 얇은 크루아상 파이지가 번갈아 끼워져 있다.
“신호등 같아.”
일반인 방청객 중 한 명, 교복을 입고 앉아 있던 여학생-이재희가 중얼거렸다. 출연자들과 방청객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딱 신호등 색깔이야.”
“그렇다면 이 케이크의 이름은, 신호등 케이크라고 짓도록 하지요.”
루이스 강이 윙크하며 말했다.
“어머나.”
이재희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루이스 강을 외면했다.
‘임진혁 쉐프는 차가운 미남이지만 루이스 쉐프는 바람둥이 타입의 미남이구나……. 하지만 내게는 임진혁 쉐프님밖에 없어.’
이재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루이스 강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타라마살라타라는 이름은 낯설죠? 좋은 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타라마살라타에서 많이 개량해서 원래 음식과는 좀 다르기도 하고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재촉했다.
『그래요, 그럼 신호등 케이크를 맛보도록 하죠. 잘라서 갖다 주겠어요, 루이스 쉐프?』
심사위원들에게 한 조각씩 분배하고 나자 절반이 남았다. 일반인 방청객, 케이크 평가단들이 늑대와도 같이 예리한 눈빛으로 탐욕스럽게 남은 케이크를 응시했다. 이희주 사회자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케이크 평가단 여러분이 드시기에는 케이크가 너무 적지요?”
“네!”
“조금씩이라도 맛보고 싶으신가요?”
“네에에에에에!”
케이크 평가단 전부가 하나 되어 외쳤다. 이희주가 씨익 웃으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여러분, 목소리가 작습니다! 이래서야 루이스 쉐프님의 귀에 들리겠어요?”
“예에에에에에!”
발까지 쿵쿵 구르며 외치는 케이크 평가단들을 보며, 이희주가 물었다.
“어떠십니까, 루이스 쉐프?”
“저야 영광이지요!”
“그럼 조금씩만 잘라 주세요.”
“와아아아아아아아!”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케이크 위치를 마저 잘랐다. 사람 수가 많다 보니 심사위원에게 전달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가늘게 잘라야 했다. 손가락 하나 크기로 잘린 케이크 위치는 정말로 작다. 케이크 평가단들은 순식간에 케이크 위치를 다 먹어버렸다.
“이래서 케이크인지 아닌지 물어봤구나. 이거 케이크가 아니라 샌드위치네요.”
직장인 여성이 말했다.
“분홍색 크림이니까 당연히 딸기 크림 맛이 날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히 다른 맛이 나요. 짭조름하고 톡톡 씹히고!”
이재희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여기 이 동글동글하게 박혀 있는 건 뭐요, 식용 색소인가?”
중년 남자가 궁금해하며 묻자, 루이스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명란젓입니다.”
“아닌데, 뭔가 부드럽고 짭짤한 게 내가 아는 명란젓 맛은 아뇨…….”
“명란과 으깬 감자 그리고 특별한 재료를 섞었습니다.”
케이크 평가단석 바로 옆, 심사위원석에서도 마침 스텔라 위스커스가 재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명란 포테이토 크림으로 감싼 풋콩과 옥수수, 토마토인가.』
살굿빛 돔 형태를 만들어준 데코레이션 크림은 루이스 특제의 명란 포테이토 크림이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크림을 한 번 더 핥아보았다.
『바다에서 온 명란과 땅에서 난 감자. 서로 다른 곳에서 온 두 가지 재료 사이에 마요네즈가 다리를 놓아주니 아주 잘 어울리네요.』
『삶은 풋콩도 비린내 없이 잘 익었어. 부드럽게 푹 익은 식감이 옥수수의 톡 터지는 맛과 잘 어울리는걸.』
『하지만 토마토는 조금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상큼하고 새콤한 맛을 더해주려고 한 것 같은데, 오히려 마요네즈가 느끼함을 더 돋보이게 한 것 같아.』
“빵은 파이지나 가장자리를 잘라낸 흰 식빵 중 하나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난 그건 괜찮은 것 같아. 식감에 차별화를 두려고 한 건 좋은 시도야』
“시도가 좋으면 뭐해. 결과가 말해주는데. 마요네즈에 눌린 파이지는 완전히 눅눅해져 버렸으니, 원. 버터를 바른 흰 빵은 좀 더 낫지만 말이야. 차라리 포마드 버터를 제대로 바른 흰 빵만 했으면 더 나았을 거야. 괜히 두 개가 함께 있어서 식감이 섞여 망가져 버린 거지.”
심사위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루이스 강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관리하며 살짝 미소를 띤 채로 자리로 돌아갔다. 루이스 강의 심사는 끝났다. 바로 이희주가 중후하게 말했다.
“자, 그럼! 유키코 김 쉐프, 부탁드립니다.”
바로 유키코 김의 차례다. 그녀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케이크 앞에 섰다.
저물어가는 태양처럼 황홀한 주홍빛의 오렌지 콩피 위에 빵칼을 갖다 대자, 진 주황빛 과일 절임이 오른쪽으로 밀려나며 레몬 향 나는 마멀레이드 잼이 시럽처럼 흘러내렸다. 마멀레이드는 걸쭉하게 흘러내리며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끈적한 마멀레이드 잼은 호두 가루, 헤이즐넛 조각과 아몬드 파편을 끌고서 바닥에 고였다. 유키코는 빵칼을 이용해 마멀레이드 잼을 잘린 옆면에 발라주었다. 지켜보고 있던 방청객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맛있어 보여.’
‘여기까지 시트러스하고 꿀 향이 풍겨. 진짜 맛있어 보인다.’
방청객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은 이희주가 웃으며 물었다.
“케이크를 소개하기 위해서 하실 말씀이 있나요?”
루이스의 차례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이다. 그녀가 결심한 듯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유키코는 이희주가 아닌 카메라를 똑바로 주시했다. 코랄 핑크빛 입술이 살짝 열리고 치열이 고르지 못한 흰 앞니가 엿보였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민 씨, 나하고 결혼해 주세요.”
‘여기서 하려고 그렇게 수십 번을 연습했군.’
듣고 있던 임진혁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유키코는 모르지만, 그는 유키코가 H & J 내부의 직원용 탈의실에서 수없이 이 대사를 연습하는 것을 며칠간 반복해서 들었다. 그는 기꺼이 양손을 들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곧 진혁을 따라 다른 이들도 박수를 쳤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무대 양쪽에서 폭죽이 터지고, 낯익은 멜로디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유키코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이 없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앞으로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길기를 바랍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방송을 타서 잘 알려져 있다. 왜 그 케이크를 선택했는지 유키코가 설명하는 동안, 이미 저평가를 받은 루이스 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여기서 청혼을 하면 비겁하잖아. 저런 이야기를 담은 케이크를 먹고서 누가 맛없다고 하겠냐고.”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루이스 강 역시, 열렬하게 양손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역시 함께 박수를 치고 있던 브라이언 신이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미스터 아드레아노 존부가 있습니다.”
“음?”
“전에 디저트 팩토리의 직원들이 미스터 존부의 생일날, 케이크를 만들어줬다고 합니다. 미스터 존부가 좋아한다는 초콜릿 베이스로 케이크를 만들었지요.
“그런데?”
“한 입 먹고 나서 이거 맛없는데 누가 만들었냐고 묻고서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피드백을 줬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 이야기. 유명하지.”
“그러니까 청혼을 하든지 고백을 하든지 상관없이, 케이크에 대한 피드백은 공평하게 이루어질 겁니다. 루이스 쉐프님은 그냥 자기가 만든 케이크에 자신이 없는 게 아닙니까?”
브라이언 신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