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80화 (180/656)

제 180화

진혁이 키득 하고 웃는 순간 심사위원석에 앉은 주영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빵은 일반 샌드위치용 식빵으로 한정합니다. 샌드위치에 사용하는 빵이라면 호밀빵이든 하얀 빵이든 크루아상이든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주영모가 활짝 미소지으며 스크린을 가리켰다. 손바닥을 펼쳐 가리킨 그 끝에는 평범한 방청객 열 명의 모습이 하나씩 떠올라왔다.

“일반인 방청객 10명이 모두 케이크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케이크가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케이크 위치는 아예 심사를 받지 못합니다.”

대학생과 회사원, 주부와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과 연령을 가진 그들은 방청객 중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이들이었다. 이어서 이희주가 설명을 계속했다.

“테마는 ‘케이크’ 자체입니다! 사용하시는 재료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재료 제한도 없고, 테마도 없다. 다만 ‘가장 케이크다운 모습일 것’이 중요하다. 여태까지와 비교해보면 보다 자유로운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들은 임진혁이 눈을 빛냈다.

‘그걸로 하면 되겠군.’

구상할 시간도 필요 없다. 그는 다음날 만들 예정이었던 케이크 위치를 그대로 만들 생각이었다.

“자, 자. 그럼 추가 설명 좀 하겠습니다.”

김선호 PD가 잠시 촬영을 멈추고서 특별 규칙에 대해 설명했다. 식빵을 발효하는 시간을 케이크 위치 제작 시간에 포함하지 않는 대신, 식빵을 발효하는 도중에는 각자 중간 인터뷰를 하도록 한다. 촬영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새로 생긴 조처라고 한다.

“발효에 문제가 생긴 경우에 다시 하는 건 가능합니까?”

이희주 사회자가 심사위원들에게 이 사항에 대해서 묻자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저었다.

『식빵 발효는 기본 아닌가. 거기서부터 실패하면 옷 벗어야지』

『전후 3시간이니까요. 이후 데코레이션 시간을 포기하고 그 시간에 발효를 하면 두 번까지는 아슬아슬하게 가능할걸요』

스텔라 위스커스의 말에 아드레아노 존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퀵 브레드(Quick Bread)를 만들어도 되고』

퀵 브레드는 이스트를 사용하지 않는 종류의 기본 빵을 말한다.

일부 스콘이나 머핀, 비스킷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이스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크림을 만들고 장식할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여유로울 것이다. 이희주가 출연자들에게 외쳤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부지런히 반죽을 시작하는 출연자들 사이에 친구는 없었다. 주영모는 친구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용태가 이번 라운드까지 남아 있었으면 좋은 성적을 보여줬을 텐데 말이지.’

지난주의 패자부활전은 스텔라 위스커스의 ‘트리플 레이어 초콜릿 퀸’ 케이크를 재현하는 것이 주제였다.

유키코는 알려주지 않은 마지막 재료 ‘계피’를 무사히 추측해내 케이크를 만들었으나 이용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더 둔해진 미각이 패인이었다.

‘그래도 송별 회식에서 마음을 좀 풀고 갔으니 다행이야.’

주영모 쉐프는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남아있는 출연자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시작했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지금은 네 명만이 남아 있다.

오늘 그중 두 명이 패자부활전을 치르고, 다시 세 명이 남는다. 디저트 팩토리에 자신의 디저트를 판매할 수 있는 영광을 얻는 것은 이 중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는 꼼꼼하게 한 명 한 명을 살펴보았다. 유키코 김이나 브라이언 신, 그리고 루이스 강 모두 A4 용지에 디자인을 휘갈기고 있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임진혁은 눈을 감고 그냥 서 있었다. 주영모는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어 진혁을 세심히 관찰했다.

‘일본이나 프랑스에서 배우지 않고, 순수하게 한국에서 배워서도 얼마든지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녀석이지.’

주영모는 임진혁이 이번에 1위를 할 것이라고는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10년 후에는 그가 날개를 펼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주리라 생각하였다. 처음에 머랭 치기를 할 때 경력도 부족하다며 진혁을 떨어뜨릴 뻔한 때를 생각하면 뒷목이 땡긴다.

‘저런 인재는 내 날개 아래에서 두고 가르치면 딱 좋겠는데.’

그 피를 좋아하는 이상한 취향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한 원석이다.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가르쳐주기만 하면 뭐든지 충분히 해낼 것이다.

주영모의 염원, 프랑스의 제과 대회에서 토종 한국인이 1등을 수상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승의 이름을 빛내는 훌륭한 제자로 키우려면 먼저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당장은 심사위원과 출연자라는 관계 때문에 제안할 수 없다. 그러니 주영모는 진혁이 탈락하는 즉시,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자신만의 계획에 대해 생각하던 그는 임진혁이 조리대 아래를 들여다보고 순간적으로 굳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          ◈          ◈

시청자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방송국의 쿠킹 스튜디오에는 수도관과 가스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수도꼭지는 단순한 장식일 뿐이고 가스레인지 사용도 불가능하다.

진행팀의 보조 요원이 미리 떠놓은 물을 사용하며, 가스를 써야 할 때는 임시로 가스버너를 쓴다.

업소에서와는 환경도 다르고 화력도 약해서 요리할 때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러한 청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편집할 때 물통에서 물을 붓는 장면이나 가스버너가 등장한 장면은 전부 잘라 버리는 것이다.

제한 시간이 이미 시작된 지금, 임진혁의 물통에는 물이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조리대 밑, 싱크대 아래에 있는 물통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까 순서가 밀려 진혁은 제일 마지막으로 시작 전 인터뷰를 촬영했다. 그가 인터뷰를 끝내고 무대에 오르자마자 바로 사회자가 새 테마를 발표했고, 제한시간이 시작되었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의 촬영 전에 진행팀 보조 요원이 물통에 물을 채워놓았어야 했는데 제대로 채워놓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야.’

지금 시점에서 책임을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

“…….”

임진혁은 지금 시점에 진행팀 보조 요원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았다.

‘아냐, 시간이 안 맞는다.’

느리고 약해빠진 현대인들은 고작 물을 조금 가져오는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전의 촬영 휴식 시간 때 준비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보조 요원 한 명이 2리터짜리 물통 여섯 개 빈 것을 카트에 싣고 낑낑대며 화장실에 가면 거의 한 시간이 다 돼서 돌아온다.

물을 옮기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뿐만 아니라, 수압이 약한 수도관에서 물을 받아 통을 채우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쿠킹 스튜디오가 건물 7층에 위치해 있는 것도 한몫한다. 그렇다고 해서 임진혁이 곤란한 처지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행 요원을 불러 책임 소재를 따지며 물을 가져오도록 요청했겠지만 진혁은 방법이 있었다.

그는 물통 표면에 살짝 손을 댔다.

물을 창조할 수는 없지만, 근방의 물을 빌려올 수는 있다.

‘하지만 눈이 너무 많으니 잠깐 꺼 둘까.’

그는 잠시 천장과 주변을 살펴서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순간 카메라들이 삑 소리를 내며 작동을 중단했다. 무대의 우측-임진혁이 있는 방향을 촬영하던 카메라 세 개와 무대 전체를 지켜보던 카메라 두 개가 멈춰버린 것이다.

“무슨 일이야?!”

“5번 카메라가 멈췄습니다!”

“4번 카메라 멈췄습니다!”

카메라맨들이 웅성거리며 촬영장에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김선호 PD가 손을 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다섯 개가 동시에 고장 나?”

무대의 좌측에 있던 카메라맨들이 대답했다.

“여기는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잠시 소란이 벌어지며 카메라가 멈춘 동안, 임진혁은 물통에 살짝 손을 댔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

루이스 강이 끓이고 있는 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물통에 있는 수분. 그가 사용하려는 수단은 사술 중의 하나였다.

빙결은령진(氷結銀嶺陣)은 특정 촉매를 이용해 공기 중의 수분을 모아 얼음을 만들어내는 진으로, 화염기망진과 완전히 상극에 서 있다.

진혁은 자신의 피 한 방울을 이용해 조리대 바닥에 빙결은령진을 그렸다. 핏방울을 하나 더 촉매로 사용해 진을 발동시킨 직후, 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는 자신이 물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생각했다.

‘그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아.’

그가 만들 레시피에는 물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설거지할 때 필요할 약간의 물과 반죽할 때 필요한 물 소량이면 충분하다.

사실 진혁의 입장에서 세제와 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릇을 씻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릇에 애초에 밀가루가 묻지 않도록 호신강기처럼 내력을 둘러 그릇을 보호해도 되고, 아예 그릇에 묻을만한 것을 전부 파괴해 버릴 수도 있으나 지금 이곳에서 그렇게 하기는 애매했다.

그릇을 씻을 때마다 카메라를 전부 멈춰버리면 아예 촬영이 진행되지도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충분하군.’

누군가 진혁의 조리대 밑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임진혁의 물통 안에 갑자기 물이 찰랑거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임진혁은 빙결은령진의 흐름을 단절시켜 얼기 시작하려는 흐름을 막았다. 주영모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카메라맨들이 일으킨 소란에 시선을 빼앗겨 아무도 진혁을 주목하지 않았다.

‘좋아,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군.’

카메라들을 멈춘 것은 첫째로 만에 하나라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녹화로 남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그가 물통에 수작을 부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진혁에게 아예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식빵 반죽을 마치고 발효 단계로 들어갔다.

촬영이 멈추었다고 해서 마감 시간까지 카운트다운이 멈춘 것은 아니다.

이쪽의 카메라 다섯 대가 멈췄다고 해도 저쪽의 카메라들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진혁은 무대 위에 선 다른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흘깃 바라보았다. 이들은 무대 아래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유키코는 식빵 반죽을 주무르고 있었다. 진혁은 그녀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보지 않고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만들려는 것은 진혁이 계속 먹어왔던 부드럽고 하얀 식빵이다. 그녀는 H & J에서 이 식빵을 수없이 만들어왔으며 진혁은 그 식빵을 여러 번 먹었다. 그녀가 공유해준 레시피를 통해 만들어보기도 했다.

‘내가 지금 만들려는 케이크 위치에도 그 빵이 제일 잘 어울리긴 하지만.’

그는 이 대결에서 유키코가 만들어낸 레시피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반죽에 특별한 재료를 섞어, 유키코의 빵 반죽보다 조금 더 부드럽게 할 생각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케이크 위치는 빵을 바삭바삭한 파이지로 대체했으나 이번에 만들려는 케이크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이번에 사용하려고 하는 크림은 두유 크림이다.

바삭바삭한 파이지는 두유 크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두껍고 부드러워서 포마드 버터를 듬뿍 흡수할 수 있는 식빵을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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