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9화
김산호 PD는 메인 작가가 내놓은 이 의견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좋아. 좋은 의견이야.”
‘그럼 유키코 쉐프가 자연스럽게 돋보이겠군.’
그다음 테마로는 그녀가 과거 개발했던 제품들 중 겹치는 군을 하나씩 선정하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전에 돼지고기를 넣은 고로케 빵을 선보인 적이 있던데, 다음 주는 <풀 먹인 돼지고기>에서 PPL 제안 들어왔잖아요. 아예 거기는 어때요?”
“롤케이크 그리고 레몬과 오렌지 마들렌도 했던데, 테마 미니 쿠키 전을 할 수도 있고요.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을 마들렌으로 하면 좋겠어요.”
“좋아. 다음 주는 돼지고기로 하고, <풀 먹인 돼지고기>에 오케이한다고 연락해 주고.”
심사위원들에게 바뀐 테마를 설명하는 것은 각자 담당 작가들의 몫이었다. 방송 작가들이 담당 심사위원들에게 가서 통역을 거쳐 설명하는 동안, 제일 빨리 이해한 주영모가 준비를 걱정했다.
“재료들은 겹치니까 괜찮긴 할 거예요. 급하게 밀가루 PPL이 들어와서 이렇게 됐어요.”
“흠, 스모르고스토르타를 하려면 식빵이 많이 필요할 텐데. 준비는 되어 있는지 모르겠군.”
주영모 쉐프가 걱정하자, 메인 작가가 웃으며 설명했다.
“식빵을 만드는 시간을 아예 따로 주고, 발효되는 동안에 중간 인터뷰를 촬영하면서 각 출연자의 성격과 가족 관계에 대해 들을 거예요. 다음 라운드에서는 초대 손님으로 가족들을 불러올 거니까, 좋은 예고가 되겠죠.”
“흠.”
“여태까지는 거의 케이크 시트만 만들어왔으니까, 식빵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긴 하겠네.”
이야기를 들은 스텔라 위스커스도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식빵을 만드는 단계부터 판가름이 나니까 나쁘진 않네요, 원래 기본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한 번 보려고 했잖아요?』
『괜찮을 수도 있겠군』
『그럼 일본 출신인 유키코 쉐프가 너무 유리한 것이 아닌가 걱정되기는 해요. 이 중에 스웨덴 출신은 없죠?』
『유키코 쉐프도 이력을 보면 개발팀이니까 접한 적은 있겠지. 하지만 한두 번 접한 적이 있는 것과 새 테마로 케이크를 해석하는 건 별개 문제니까』
“그건 상관없어. 나도 스모르고스토르타를 들어보기도 했고, 만들어 보기도 했으니까.”
주영모가 단언했다. 아드레아노 존부 역시 동의했다.
『세계의 다양한 빵에 관심이 있고 많이 만들어본 건 페이스트리 쉐프에게는 당연한 일이야. 유키코 쉐프가 혹시 미리 만들어본 적이 있더라도, 그걸로 공평하다, 불공평하다 를 따질 순 없지』
스텔라 위스커스와 아드레아노 존부, 주영모 세 사람의 심사의원이 합의에 도달했다. 메인 피디는 내심 기뻐했다.
‘좋아, 기반은 잡았다.’
이 정도면 엄청나게 온화한 방법이 아닌가? 그는 심사위원에게 압력을 가해 유키코가 우승하도록 만들라는 식의 구태의연한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놀라운 맛을 선보이는 임진혁 쉐프도 또 이상한 걸 만들겠지.’
김선호 PD는 최근 임진혁과 리처드 베이커가 열심히 케이크 위치 대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 ◈ ◈
촬영 시간은 여느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사전 인터뷰 5~6시간, 시간제한이 있는 요리 대결이 세 시간, 그리고 다시 사후 인터뷰가 5~6시간 이루어진다. 김선호 PD의 경우 탈락자들이 탈락 후 울거나 하는 둥 감정선이 달라지기 때문에 요리 중 발효 시간 등에 영상을 따곤 했는데, 출연자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전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김선호 PD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상황들을 체크했다.
오늘 인터뷰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이야기는 브라이언 신이었다.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으셨다고요.”
사회자 이희주가 반갑게 말하자 브라이언이 웃었다.
“예.”
그가 보여준 사진은 가족사진이었다. 부모님과 네 자녀, 그리고 두 자녀의 배우자와 네 아이는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브라이언이 눈에 띄었다. 다른 이들이 친밀하게 바싹 붙어 있는 것에 비교해서, 개인적인 거리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이희주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형제가 많네요.”
“예, 저와 닮은 동생이 세 명이나 더 있습니다. 여동생 한 명과 남동생 둘인데, 남동생 둘은 결혼해서 애가 있더라고요.”
그는 새로 생긴 조카가 소방차 장난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즐겁게 이야기했다. 이희주는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사항을 질문했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인데 어떻게…….”
“이사를 하면서 갑자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져서 임시로 보육원에 맡겼는데, 보육원이 문을 닫고 이사를 가 버려서 저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예, 이사를 간 보육원이 화재를 겪으며 서류가 타버리는 사건이 있었대요. 당시에 저를 찾으려고 계속 노력하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를 버리신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계속 찾으려고 하셨다고 말씀하시던데요.”
“기쁘시겠습니다.”
“이건 전부 유키코 쉐프 그리고 임진혁 쉐프가 도와준 덕분입니다.”
“……… 유키코 쉐프와 임진혁 쉐프요?”
이희주가 뜻밖의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두 분이 어떤 도움을 주셨습니까?”
“유키코 쉐프의 가족을 찾아 주신 분이요, 처음에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임진혁 쉐프가 설득해서 그분이 제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어요.”
“임진혁 쉐프는 이전에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군요.”
“진심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어 행운입니다. 이제 네 분의 부모님을 모시고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오랜 약혼 기간이었다고 들었는데 약혼녀분이 좋아하시겠네요.”
“예. 양부모님들께서도 기뻐해 주셨습니다.”
행복해하는 브라이언의 모습을 보며 이희주가 장난스레 물었다.
“유키코 쉐프나 임진혁 쉐프가 도와준 만큼, 이번 승부는 양보할 생각도 있으신지요?”
“그럴 리가요.”
브라이언 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제가 양보를 할 만한 입장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쉐프에요. 열심히 해서 멋진 케이크를 보여줘야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미안한 일이죠.”
◈ ◈ ◈
인터뷰하는 동안 메인 작가가 김선호에게 넌지시 물었다.
“메인 피디님. 메인 피디님은 누가 우승할 거라고 생각해요?”
“시청자들은 어차피 맛을 볼 수 없어. 방송 요리는 비주얼이지.”
“그럼 브라이언 신이 유리하겠네요.”
“유키코 쉐프도 나쁘지 않지. 일본 출신이라서 그런지 아기자기해. 그 둘이 박빙일걸?”
“임진혁 쉐프는 아예 후보로 들지 않으시는 거예요?”
메인 작가가 웃으며 묻자 김선호 PD가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출연자들은 전부 사전 인터뷰 촬영 중인 것을 확인하고 그가 말했다.
“임진혁 후보는 괜찮아. 재밌는 이야기를 갖고 나오잖아. 자극적이고 이야깃거리가 되는 케이크들을 만들어내니까 우리 쪽에서는 좋지.”
심사위원들이 미각적인 면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이야기하는 ’임진혁 후보‘의 경우, 김선호가 보기에는 영 아니었다.
‘유키코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곁다리로 쓰면 딱 좋지.’
지금 안쪽에서 인터뷰 중인 임진혁에게 그 이야기가 전부 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 역시, 김선호 PD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맞아요, 그리고 맛이 없으면 벌써 탈락했겠지만 맛은 확실히 있어요. 심사위원들 표정이, 임진혁 쉐프 케이크 먹을 때는 정말 누가 봐도 맛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라니까요.”
메인 작가가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누가 탈락할 것 같냐고 신 작가가 물어보던데요. 다음에 시작하는 요리 기행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요리사가 한 명 필요하다고…….”
“신 작가가 하는 프로, 언제 하는데? 그거 박 PD랑 같이하는 프로그램 아니야?”
“맞아요.”
촬영 중인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를 빼가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에 속하지만 같은 라인에 속한 PD나 작가 사이에서 좋은 캐릭터를 추천하며 소개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아예 타 방송국의 같은 시간대에 방송하는 프로그램이거나 유사한 프로그램이라면 절대 불가능하지만, 시간대와 장르가 전혀 다른 경우에는 일부 허용된다. 김선호는 그런 면에서 속이 좁은 PD는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한창 촬영하는 중인데 지금 애를 데려가면 어떡해?”
“어차피 누군가 탈락자가 생기게 되잖아요. 그때 파일럿 찍고 나서, 나중에 저희 종영한 다음에 촬영 시작되는 스케줄이라고 하더라고요.”
“일찍 탈락한 애를 데려가는 거구먼.”
“남자 출연자들하고 같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프로그램이라서 남자가 좋겠다고 하긴 하던데.”
“신 작가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면 이미 봐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맞아요. 임진혁 쉐프를 봐놨대요. 젊은 애답지 않게 진중하고 착하고, 효심도 있는 게 딱 착한 사람 캐릭터로 가면 된다고, 다른 출연자들 사이에서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탈락한다면 소개는 해줘도 되지.”
“이번 라운드에 탈락할지도 모르니까요.”
누가 승리하고 누가 탈락하는지는 메인 PD와 작가도 모른다. 누가 우승하고 누가 탈락하는지 상관없이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대본은 이미 대략적으로 짜여 있다.
◈ ◈ ◈
이희주 사회자가 오늘의 테마를 밝히자 임진혁이 중얼거렸다.
“케이크 위치?”
이틀간 점심시간마다 리처드 베이커, 유키코 쉐프와 함께 삼파전을 벌였다. 누가 만들었는지 숨기고 어떤 것이 맛있는지 결정하는 투표에서 진혁은 70% 이상의 승률을 보였다. 라운드 케이크, 롤 케이크, 스퀘어 케이크, 미니 케이크 등등 다양한 모양의 케이크 모양을 재현하며 진혁은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사실 세 사람 중 이 대결로 인해 제일 많은 것을 얻은 것은 임진혁일 것이다. 그는 ‘누가 봐도 케이크처럼 보일 것’이라는 제한을 걸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식으로 케이크를 만들어야 할지 대략적인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임진혁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이 테마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만들어 봐야겠군. ’
그가 옆을 흘깃 바라보자 유키코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점심에 연어를 넣은 화이트 케이크 위치를 내놓아 승리했다. 브라이언 신과 루이스 강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 얼굴만을 봐서는 그들이 케이크 위치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지 어떤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직감했다.
‘저 표정은 알겠다.’
진혁이 현대적인 나침반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하오문 문주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었다.
‘뭔지 대충은 아는데 자세히는 모르는 얼굴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