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7화
물론 가게에서는 도매가로 시중가보다 더 싸게 들여오긴 한다. 그렇다 해도 가벼운 마음으로 판매용 샌드위치에 듬뿍 넣기에는 어려운 가격이다.
“이거, 지금 팔 생각은 전혀 없는 메뉴인가 본데? 가성비가…….”
창덕이 말을 흐리는 동안 모두에게 햄 & 치즈 케이크 위치를 나누어 준 가영은 바로 자신 몫의 조각을 맛보았다.
그녀는 치즈의 가격이나 햄의 종류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뭐로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맛만 있으면 되지.’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데코레이션을 위해 발라진 치즈 크림이었다. 그다음에는 보드랍고 폭신폭신한 새하얀 식빵, 그리고 거기에 발라진 포마드 버터와 머스터드.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풍부하고 강렬한 산미를 가진 고다 치즈와 그에 어울리는 두툼한 햄이다.
짭짤한 햄은 달면서도 새콤하고 짭조름한 치즈와 환상적인 풍미를 이루었다.
“맛있다. 이거 고다 치즈만 있는 건 아니네요. 체다하고 모짜렐라 치즈를 좀 섞었나 본데?”
“머스터드하고도 잘 어울려요.”
백진영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얇게 썬 햄과 청경채가 최고야. 하얀 빵이 가볍고 푹신하니까 진한 치즈하고 두꺼운 햄하고도 잘 어울리네. 여기에 케첩을 찍어 먹어도 되겠다.”
“이미 머스터드가 발려져 있는데 무슨 소리를.”
예은이 흘끔 두 쉐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케이크 위치 조각에 손을 대지 않고서 서로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을 뿐이다.
“햄 & 치즈 케이크 위치……이거 진혁 쉐프가 만든 거 아니에요? 전에 말씀하셨던 그 가성비 말이에요. 고다 치즈에 뒷다리 햄을 이렇게 듬뿍 쓰면 절대로 메뉴엔 못 올라갈 것 같은데요…….”
예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은 씨도 전에 리처드 베이커 쉐프가 말한 걸 생각하고 있구나.”
“네.”
그녀가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햄 & 치즈 케이크 위치를 먹으며 예은이 생각했다.
‘이런 걸 맛보는 것만으로도 견문이 넓어지는 것 같아.’
“예은이도 제과제빵학과였지? 휴학생이잖아.”
“요즘 고민하고 있어요.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을까 하고.”
예은이 웃었다.
“일이 힘들잖아요. 제가 생각했던 건 케이크에 크림 장식하고 이런 게 전부였는데, 막상 학과에 입학하니까……진짜 다르더라고요.”
“그렇지. 그리고 학원에서 하는 거랑 가게에서 하는 일은 또 다르고.”
제과제빵 학원에 다녔던 적이 있는 가영이 맞장구쳤다. 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아는 건 하나도 없고.”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구나?”
“네. 임진혁 쉐프님이 만드는 케이크는 진짜 최고잖아요. 너무너무 맛있으니까,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도 한 입 먹으면 정말 순식간에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게 너무 좋거든요. 그리고 제가 제과제빵학과에서 배운 것들이 있으니까, 포마드 버터가 뭔지 그리고 클로티드 크림이 커스터드 크림과 어떻게 달라서 이런 맛이 나는지 손님한테 설명해줄 수 있잖아요.”
포마드 버터는 실온에 둔 무염 버터를 으깨서 크림 상태로 바른 것으로, 빵에 바르면 흡수되어서 더 맛있어진다.
지금 이 케이크 위치 사이사이에서도 부드러운 포마드 버터의 향이 난다. 두툼한 햄 & 치즈 케이크 위치를 베어 물며 예은이 입을 우물거렸다.
“고다 치즈랑 체다 치즈도 구분할 수 있고, 제 입맛엔 고다 치즈가 햄이랑 더 잘 어울린다는 거!”
그녀는 정말로 이 가게에서 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일은 바쁘지만 직원용 식사가 너무나도 맛있다.
임진혁이 새벽같이 출근해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정말로 빵을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진혁 쉐프 진짜 열심히 일하시잖아요. 보고 있으면 내가 너무 게을렀구나, 좀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제과제빵이 날 좋아할 수 있게, 내가 제과제빵이랑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을, 아니 기회를 주지 않고 그냥 떠나 버리려고 했던 게 아닌가 했어요.”
“잘 됐다! 그럼 복학하려고? 부모님이 안심하시겠어.”
예은은 복학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걱정하셨다며 이전에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고민을 알고 있던 가영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헤.”
예은이 부끄러워하면서 뺨을 붉혔다.
“맥주를 마신 것도 아닌데 이런 얘길 하게 되네요.”
오행진 안에서 인간들은 타인에게 좀 더 호감을 느끼기 쉬워지며, 친밀감을 쉽게 느낀다. 이 공간 안에 오래 머물러 있던 직원들은 그 영향을 더 쉬이 받는 듯싶다. 임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평생동안 내가 새콤한 맛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거든.”
서창덕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진혁 쉐프님이 만든 스트로베리 글레이즈드 프로마쥬를 먹어보니까 난 새콤한 맛을 좋아하는 게 아니더라고. 새콤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거였어. 치즈하고 딸기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잘 어울리더라.”
“진혁 쉐프님이 스트로베리 클레이즈드 프로마쥬를 만들어 줬다고요?! 우리 가게에서 안 팔잖아요!”
김가영이 놀라 묻자 창덕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번에 너 쉬는 날에 신메뉴 개발한다고 테스트하다가 만들어 주셨어.”
“임 쉐프님!”
김가영이 세상을 잃어버린 것 같은 절박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임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케이크에 대해 보이는 심각하고 진지한 태도는 종종 진혁을 웃게 만들었다. 진혁은 빵칼로 흔적없이 잘라낸 티라미수를 접시에 올려 나누어 주었다.
“자.”
“지금 빵칼로 이거 자른 거 맞냐? 어떻게 코코아 가루가 측면에 하나도 묻어나지 않을 수 있어?”
백진영이 감탄하면서 티라미수 케이크 위치를 받아들었다.
“케이크 시트가 아니라 식빵이 사이에 끼워져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빵칼을 쓰지 않았으니 빵칼에 코코아 가루가 묻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진혁은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실은 모두의 시선이 장미꽃 햄에 고정되어 있던 동안 뒤에서 강기사로 잘랐다. 강기의 발현과 조절이 이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게 된 진혁은 강기로 케이크 위치를 잘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래쪽의 접시에 실금도 가지 않게 힘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짜 잘 잘랐네요. 이대로 그냥 팔아도 되겠어요.”
“보통 케이크는 빵칼로 자르면 무너지고 크림도 망가지니까 아까운데.”
“임진혁 쉐프님이 서빙을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케이크 잘라 주기까지 하면 다들 기절할지도 몰라요.”
비밀리에 임진혁의 팬클럽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한 김가영이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모두 한 마음으로 티라미수 케이크 위치를 먹느라 바빴다.
“이 크림 좀 봐.”
혀에 닿자마자 살살 녹는 농도 진한 크림은 마스카르포네 치즈를 크림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주로 만드는 이 치즈는 생크림에 레몬주스를 넣고 식힌 후 특수한 천에 걸러내고 남은 것을 24시간에서 48시간 동안 굳혀 만든다.
티라미수 케이크 위치에서 사용한 마스카르포네 치즈 크림은 마스카르포네 치즈에 달걀노른자와 그래뉴당, 바닐라빈을 섞어 더 촉촉하고 진하게 만들었다.
마스카르포네 치즈는 원래 설탕을 섞지 않아도 은은한 단맛이 나는데, 진한 커피 액에 젖은 식빵의 맛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해 크림에 그래뉴당을 첨가하였다.
“저 티라미수는 너무 진해서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건 훨씬 가볍네요.”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은 김은동이었다. 호밀빵이나 바게트 같은 식사 빵을 좋아하는 그는 신기해했다.
“처음 크림 맛이 살짝 달기도 한데, 뒷맛으로 남는 커피 향이 좋아서……백진영 바리스타 사장님이 만드신 것처럼 좋아요. 백진영 사장님 커피가 맛있으니까 그거랑 또 잘 어울리는데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같이 마시면 딱 좋겠다.”
“보통 티라미수는 아래쪽에 바삭바삭한 비스킷이나 초콜릿 과자류를 넣어서 달게 하는데, 이건 식빵으로 끝나니까 가볍다. 크림은 혀처럼 부드럽고.”
“햄 & 치즈는 정말 식사로 먹을 만한 맛이고, 이건 가벼운 디저트네요. 둘이 진짜 잘 어울린다.”
김가영이 입가에 묻은 코코아 가루를 닦아내며 말했다.
“이게 임진혁 쉐프님 디저트네요.”
그녀가 당당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햄 & 치즈 케이크 위치였다.
“임진혁 쉐프님은 치즈를 좋아하시잖아요.”
“티라미수에는 마스카르포네 치즈가 들어갔잖아.”
서창덕이 참견하자, 김가영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임진혁 쉐프님은 음식에는 좋은 재료를 아끼지 말자, 주의잖아요. 리처드 베이커 쉐프님은 재료는 적절한 재료를 쓰자, 파고. 그런데 고다 치즈를 이만큼이나 아~낌 없이 써버렸잖아요?”
백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스카르포네 크림치즈도 그렇게 저렴하진 않아. 우리 가게에서 워낙 좋은 치즈를 쓰다 보니…….”
“……에. 햄으로 장미꽃을 만드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보통 웨이퍼 페이퍼나 크림을 짜내서 꽃을 만드는데, 햄을 얇게 썰어서 장미꽃을 만들었잖아요. 그 미묘하게 센스가 어긋난 부분이 임진혁 쉐프님 같다고나 할까…….”
제과제빵 학원에서 수업을 받으며, 카빙 클래스와 플라워 케이크 클래스 역시 견학해 본 적이 있다. 수박이나 사과를 깎아 꽃 형태를 만들거나, 다양한 깍지를 사용해 크림을 짜서 쌓아 올려 꽃을 만드는 것은 자주 보았다.
하지만 햄 꽃은 정말로 본 적이 없다. 김가영이 본심을 꺼내놓자 다른 사람들이 전부 웃음을 터트렸다.
리처드 베이커가 멀뚱거리며 보고 있다가, 백진영이 번역해 주자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서 가영이 확신했다.
“봐요, 리처드 쉐프님도 웃잖아요.
“푸핫, 그런 이유였어? 그럼 나도 임진혁이 햄 & 치즈 만들었다에 한 표.”
“듣고 보니까 맞는 것 같네. 그럼 저도 햄 & 치즈는 임진혁 쉐프가 만들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누가 뭘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 어떤 게 더 맛있는지 판정을 내리란 말이야.”
“저는 햄 & 치즈가 맛있었습니다.”
서창덕이 말했다.
“티라미수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저는 이게 더 좋아요.”
“아! 창덕 오빠가 왜 좋아하는지 알겠다. 딱 맥주 안주지?”
“응. 짭조름한 게 진짜 맛있어. 가능하면 집에 하나 포장해 가고 싶을 정도예요.”
“맥주라니? 브런치 감 아닌가.”
“브런치로도 괜찮겠어요. 스크램블드에그 곁들여서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메뉴 꾸려도 되고, 그냥 아메리카노만 곁들여도 되고요.”
“기획을 하지 말고 점수를 매기라고.”
백진영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저는 티라미수 케이크 위치요. 크림도 그렇고 진짜 티라미수의 맛을 잃지 않고 색다르게 살려냈다는 게 대단해서……. 제가 이런 식으로 티라미수를 좀 가볍게 만들려고 이것저것 테스트해봤는데 다 실패했거든요. 빵을 식빵으로 바꿨을 뿐인데 엄청나게 잘 어울려요. 그 점이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