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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176화 (176/656)

제 176화

그때의 모습에 비하면 지금의 김가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완전 거지꼴이었는데 같이 일해보자고 하셨잖아요.”

“가영 씨가 열심히 하고 싶어 했으니까. 아마 명인님도 그게 마음에 들어서 정식 제자로 들어오라고 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 나가면 곤란해요. 여기 제 뮤즈가 있다고요.”

“뮤즈?”

“임진혁 쉐프님이 만드는 케이크에 어울리는 접시를 만들고 싶거든요.”

“아.”

“지금 이 케이크 샌드, 샌드 케이크, 아니, 케이크 위치도 그래요.”

‘흥분했구나.’

눈앞의 음식 이름도 헷갈려 하면서 가영이 열렬하게 양손으로 크고 둥근 원을 그렸다.

“이건 지금 둘 다 기본 트레이 위에 올려놨잖아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렇게 예쁜 케이크를! 저라면 동그란 블랙 앤 화이트 케이크위치는 흰 접시에 올려놓을 거예요. 흰 접시인데 가운데에 먹으로 검은 점을 하나 찍어서, 케이크 아래에 검은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놓고 싶어요.”

“호오.”

“이쪽 케이크는 싱그러운 초록색이 돋보이고 트리랑 어울리게 노랑과 빨강 원형 점을 찍고 싶어요. 하얀 스퀘어 접시 위에 올려놓으면 더 좋고요. 스퀘어 접시는 백자로 하되 도기 자체에 주름을 넣어주고 싶어요.”

“와, 듣기만 해도 좋은데?”

열렬하게 접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가영을 보면서 백진영이 웃었다.

“가영 씨는 케이크하고 어울리는 접시 만드는 걸,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그렇죠……. 이제 벌써 20대 중반이잖아요. 원래 전 이 나이엔 제가 뭘 할지 전부 결정되어 있을 줄 알았어요. 정장 입고 하이힐 신고 멋있게 일하고 있을 줄 알았죠. 결혼도 일찍 할 줄 알았어요.”

“나도 내가 카페 일을 할 줄 몰랐으니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영 씨! 나 배고파!”

기다리다 못해 서창덕이 노크한 것이다. 가영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너무 길게 얘기해 버렸네요.”

“가영 씨, 오늘 퇴근하고 시간 돼? 따로 시간 잡아서 이야기하자고.”

“……네!!”

가영은 황급히 블랙 앤 화이트 케이크 위치에 한 일(一)자를 그었다.

“저는 이게 더 좋았어요.”

“맛이?”

“맛은 둘 다 비슷하게 좋은데, 눈으로 봤을 때 끌림이 있는 건 이쪽이었어요. 좀 더 모던한 느낌?”

“나는 계절감 있고 좀 더 케이크다워 보이는 울트라 B.L.T. 케이크 위치 쪽이 좋았어. 더 풍성해 보이는 느낌이랄까?”

백진영도 종이 위에 표시를 했다. 두 사람이 나오고 나서, 예은이 들어가면서 가영에게 말했다.

“언니, 뭐가 더 맛있었어요? 뭐부터 먹어요?”

“둘 다 맛있어서 고르기가 너무 힘들었어…….”

“와, 기대된다!”

“울트라 B.L.T를 먼저 먹는 게 좋을 거야. 채소에 수분이 많아서, 나중에 먹으면 빵이 눅눅해질 수 있으니까.”

백진영의 조언에 서창덕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예은과 창덕이 케이크 위치를 먹고 나왔다.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오자 진혁이 물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어떤 쪽을 진혁 쉐프님이 만들었고, 어떤 걸 리처드 베이커 쉐프님이 만들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나도 모르겠더라.”

백진영이 웃었다.

“이제 알려줘도 되지 않아?”

점수가 매겨진 종이를 들어 올린 진혁이 말했다.

“흐음~ 둘 다 동점이네. 맛은 비슷비슷한가?”

“맛도 그렇고 완성도도 그렇고, 가게에 내고 싶은 심정이야.”

“울트라 B.L.T 케이크 위치는 가게에 내놓긴 어렵지. 그건 만들어서 바로바로 먹어야 하는 종류라.”

“그걸 진혁이 네가 만든 거야?”

임진혁이 씨익 웃었다.

“글쎄, 맞춰 볼래?”

『리처드 쉐프, 당신이 만든 게 블랙 앤 화이트 케이크 위치입니까?』

『그걸 보고 모른단 말인가? 맞춰 보라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떤 걸 만들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리처드 베이커와 임진혁이 탈의실에 들어선 후, 문이 닫혔다. 김은동이 중얼거렸다.

“……저보고 먼저 먹으라면서요. 저는 언제 먹어요?”

김은동이 구석에서 반죽을 하고 있는 동안, 리처드와 임진혁이 은동을 두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조그맣게 말한 그 목소리를 들은 임진혁이 문을 열고 불렀다.

“들어와서 같이 먹자고.”

“네!”

리처드 베이커와 임진혁이 묵묵히 케이크 위치를 먹는 동안, 김은동은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둘 다 너무 맛있는데요.”

지금까지는 2:2로, 승패의 향방이 정해지지 않았다. 김은동의 한 표가 승부를 결정하게 된다. 잠시 고민하던 은동이 종이 위의 두 이름을 보고 고민하더니, 손으로 가리고 보이지 않게 새로 한 일 자를 그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에 투표했는지 보이지 않게 가리더니, 웃으며 물었다.

“이거, 울트라 B.L.T 케이크 위치를 만드신 게 임진혁 쉐프님이시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트리 모양으로 꾸며놓은 녹색 잎사귀들은 수분이 풍부하기 때문에 방금 진혁이 이야기한 대로 빵이 눅눅해질 수밖에 없다. 그 이야기를 임진혁이 했기 때문에 은동은 그것이 진혁의 케이크라고 생각했다.

‘리처드 베이커 쉐프는 아무래도 임진혁 쉐프보다 쉐프 생활을 오래 했지. 가게에서 상업적으로 내놓지 못할 작품을 만들 리가 없어.’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땡.”

“어?”

은동이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난 크림치즈를 좋아하니까, 우유랑 섞어서 일부러 오징어 먹물 브레드랑 같이 올려놓았는데. 블랙 앤 화이트 크림 소라 빵을 보면 알잖아요. 흑백 대비를 좋아하니까 맞추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아까 두 사람이 뭘 만드는지 좀 눈여겨볼걸!’

크림치즈에 우유를 섞는 것은 보았지만, 오징어 먹물 브레드를 써는 건 보지 못했다. 녹색 채소와 베이컨은 두 사람 다 사용했다. 김은동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리처드 베이커가 손을 내밀었다.

『누가 이겼지?』

김은동이 3표를 받은 케이크 위치가 무엇인지 종이를 내밀며 짚어주었다.

“블랙 앤 화이트 케이크 위치…….”

『내가 졌군』

리처드 베이커는 얼굴을 찡그리거나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더니 말했다.

『저녁엔 두고 보자고』

◈          ◈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고생했습니다.”

영업이 종료된 후, 셔터를 내리고 나면 보통 청소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미 깨끗하게 닦인 테이블 앞에 옹기종기 모여선 직원들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두 쉐프를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앞에 서 있는 것은 김가영이었다.

“이미 준비되었나요, 쉐프님들?”

백진영이 킬킬대며 웃었다.

“가영 씨, 몰랐어? 아까 두 사람 다 만들어서 넣어놨잖아. 하나는 냉장고, 하나는 급속냉각기에 있어.”

“왓! 전혀 몰랐어요. 저는 냉장고엔 접근할 일이 없으니까요.”

“기다려봐, 내가 꺼내올 테니까.”

“제가 꺼내오겠습니다!”

백진영이 움직이려 하자, 주방 안에 서 있던 김은동이 냉장고로 다가갔다. 은동이 냉장고에서 트레이를 꺼내오는 동안 임진혁이 급속냉각기에서 다른 트레이를 하나 꺼냈다.

“냉각기에 들어있던 게 임진혁 쉐프님 거에요?”

“먹어보고 나서 맞춰 봐.”

진혁이 꺼내온 트레이 위에는 둥그런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민트 잎으로 장식하고 코코아 가루를 골고루 뿌린 상판이다. 커피 색깔 시트 사이로 엇갈려 쌓여 있는 병아리색 크림까지, 어딜 봐도 케이크 위치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건 그냥 티라미수인가?”

모두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서창덕이 입 밖으로 꺼냈다. 예은이 눈을 반짝였다.

“저 티라미수 좋아해요.”

“케이크 모양 샌드위치로 승부한다더니 이건 그냥 케이크잖아요.”

김은동은 티라미수 옆에 냉장고에서 꺼내온 트레이를 올려놓았다. 흰 홀케이크 위에는 연분홍빛 장미가 여섯 송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분홍색 고기를 얇게 썰어서 말아낸 장미꽃은 어린 청경채 잎사귀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장미꽃밭 바깥은 우윳빛이 도는 희디흰 크림으로 둥글게 별 모양 크림을 짜냈으나 케이크의 옆면은 장식 없이 깔끔한 백색으로 마무리 지었다. 전체적으로 새하얗고 장식이 없는 만큼 윗면에 핀 꽃에 시선이 갔다.

“이 장미꽃은……이거 설마 햄이야?”

돼지 뒷다리 햄을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게 썰어내어, 꽃 모양으로 말아냈다. 간이 되어 있는 짭짤한 햄을 알아본 가영이 놀라며 말했다.

“그러네. 햄 맞네.”

케이크 위치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아 본 창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보니 지방이 있는 부분이 군데군데 새하얀 것도 보였다. 햄이 맞다.

“청경채하고 햄이라니, 그냥 같이 싸서 먹기만 해도 맛있겠는데요.”

김은동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백진영이 빵칼을 내밀었다.

“뭐부터 먹을래? 햄 & 치즈 케이크 위치? 아니면 티라미수 케이크 위치?”

“아니, 저 티라미수가 티라미수지 어떻게 티라미수 케이크 위치가 되냐고요.”

“티라미수처럼 생겼지만, 전혀 다른 맛이 날 수도 있지.”

“무슨 맛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저 커피색 가루는 코코아 가루가 맞아요. 냄새가 확실해. 단것을 먼저 먹고 햄을 먹으면 이상해질 테니…… 햄 & 치즈부터 먹는 게 낫겠어요.”

매니저 김가영이 결정하고, 다른 이들 모두 동의했다. 리처드 베이커는 씨익 미소지으며, 내내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두고 보자고』

“백 사장님 먼저 드릴게요.”

장미꽃 모양으로 피어난 햄 봉오리가 다치지 않게, 김가영이 조심스럽게 빵칼을 들었다. 드러난 케이크 위치의 단면을 보고 예은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두텁고 진한 핑크빛과 선명한 노란색이 번갈아 쌓인 모습을 보고 그녀가 기쁘게 물었다.

“진짜 햄 & 치즈네요. 무슨 햄 두께가 내 손가락만 하네. 거기에 이 치즈 좀 봐요.”

“이건 따로 빼놓은 고다 치즈잖아요?”

치즈를 알아본 서창덕이 중얼거렸다.

고다 치즈(Gouda cheese)는 네덜란드의 하우다 지방에서 유통되었던 치즈로, 하우다의 미국식 호칭인 고다로 더 잘 알려졌다. 집에서 만든 치즈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하우다 지방에 모여서 치즈를 사고팔았기 때문에 그 지역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네덜란드의 농가에서 여자들이 딸에게 만드는 방법을 대대손손 가르치며 수제로 만들어 왔으나, 현재는 대부분의 치즈가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고다 치즈에 대해 언급된 최고(最古)의 기록은 1184년으로, 현존하는 치즈 중 제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치즈다. 순수하게 우유만을 사용해서 만드는데 겉은 딱딱하지만 않은 부드러운 반경성 치즈다. 숙성도에 따라 4주부터 12개월 및 그 이상까지 6단계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지금 햄 & 치즈 케이크 위치에 들어있는 치즈는 200g에 2만 원대에 달하는 고가의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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