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5화
어떻게 보면 리처드 베이커보다 임진혁이 더 리처드의 아버지에게 가까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한참 애송이인 임진혁보다 작업을 소화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순진하게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서 울컥한 리처드 베이커가 내뱉었다.
『당연히 할 수 있지!』
김가영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자! 가게 영업 시작할 시간이에요! 백 사장님, 준비 다 되셨어요?”
“응.”
“바깥에 팻말 돌리고, 대기표 나눠주러 나갔다 올게요.”
“고생해!”
그리고 또다시,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11시 30분부터 2시까지. 이 시간대에는 인근 회사와 학원의 손님들이 몰려와 정신없이 바쁘다. 요식업계의 직원들이 누구나 그렇듯 H & J 베이커리 앤 카페의 직원들도 점심시간에는 점심을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미리 준비해 직원용 탈의실 안에 따로 갖다 두면 교대로 들어가 먹고 있다. 손님이 적다면 여럿이 모여 먹을 수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김가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점심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진혁 쉐프가 만드는 케이크 샌드라니 기대된다.’
유키코가 케이크 위치라고 여러 차례 소개했지만, 케이크 모양으로 만든 샌드위치-라는 인식이 굳게 박힌 그녀는 그 음식을 마음속으로 ‘케이크 샌드’라고 부르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진혁이 직원실 안에 하얀 보로 덮여 있는 트레이를 직원용 탈의실 안으로 옮겨 놓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리처드 역시 하얀 보로 덮인 트레이를 들었다. 리처드가 탈의실에서 나오며 문을 닫자, 김가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백진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제일 먼저 먹어도 될까?”
“백 사장님! 우우! 권력의 횡포!”
아침부터 기대해왔던 김가영이 아쉬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자, 임진혁이 제안했다.
“둘이서 먼저 먹지?”
“그래도 되나?”
“창덕 씨가 음료 주문받는 것을 커버할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이 먹고 나오면 예은 씨와 창덕 씨가 먹고, 은동 씨가 혼자 먹고. 나하고 베이커 쉐프가 먹으면 되겠는데.”
“흐음, 만든 두 사람이 나중에 먹는 거군.”
“그렇지.”
김가영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임진혁을 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임 쉐프님!!”
“맛있게 먹고. 먹고 나서 노트에 바를 정(正)자 표시하는 거 잊지 말고요. 슈퍼 B.L.T. 케이크 위치하고 블랙 앤 화이트 케이크 위치 중에 맘에 드는 걸 고르면 됩니다.”
“둘 중 어떤 게 임진혁 쉐프가 만든 거예요?”
진혁이 웃었다.
“둘 중 더 맛있는 걸 고르시면 됩니다.”
그 한국어를 이해한 것마냥 리처드 베이커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맛있게 먹고 맛있는 걸 골라 달라고』
가영이 먼저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공간, 가운데에 놓인 흰색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는 언제 씌웠는지 얇고 흰 종이가 한 포 덮여 있었다.
“임진혁 쉐프님, 섬세하신 데가 있다니까.”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소한 배려를 볼 때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그릇이 깊은지 실감하게 된다. 그녀가 오른쪽 트레이 위에 있는 하얀 포를 벗기자 곧 연두색과 녹색 잎사귀가 풍성한 샌드위치가 드러났다. 신선한 로메인 상추와 연한 양상추, 그리고 새빨간 방울토마토와 잘게 썰린 노랑 파프리카. 연둣빛 크림 위에 놓인 채소들은 익히 봐왔던 형상을 하고 있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백진영이 말했다.
“크리스마스트리네.”
“트리 맞네요.”
스퀘어 케이크 위, 수북이 쌓인 채소는 트리 모양이고 파프리카와 절반으로 잘린 방울토마토는 트리 장식품처럼 보인다.
“계절감까지 생각했단 말이야? 이 연두색 크림은 무슨 맛이려나.”
“마요네즈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요.”
“두 번째는 뭐지?”
백진영이 왼쪽 트레이 위의 보자기에 손을 뻗었다. 올망졸망하게 놓인 조그마한 컵케이크가 보였다.
“말 그대로 블랙 앤 화이트네요?”
“이 검은 빵은……오징어 먹물 바게트인가?”
칠흑처럼 검은 오징어 먹물 바게트를 동그랗게 썰어내 부드러운 부분만 남겨 쌓았다. 층층이 놓인 사이사이에는 희디흰 크림이, 그리고 맨 위에는 그린 올리브가 놓여 있다. 씨를 빼낸 녹색 올리브 안에는 붉은색 피망이 들어차 있어 검고 흰 케이크 위에 포인트가 되어 주었다.
“맞네요. 그 바쁜 와중에 언제 올리브를 일일이 손질한 걸까요?”
“스터프드 올리브(Stuffed Olive)는 원래 장식(곁들임)용으로 아예 따로 팔아. 보통 칵테일에 곁들일 때가 많거든. 그런데 우리는 스터프드 올리브를 따로 안 쓰니까 일일이 올리브 씨를 빼고 피망을 집어넣었다는 건데. 둘 다 진짜 대단하다. 오늘 안 바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알록달록한 트리 케이크에, 블랙 앤 화이트 컵케이크라. 두 가지 스타일이 진짜 다른데. 누가 뭘 만든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블랙 앤 화이트 크림 소라 빵 생각하면 이걸 진혁이가 만든 게 아닌가 싶은데.”
백진영이 검고 흰 미니 케이크 위치에 손을 댔다.
“이게 조그마해서 집어먹기는 편하네.”
“으음…….”
우유를 섞어 쳐낸 크림치즈는 오징어 먹물 바게트를 부드럽게 감싼다. 부드러운 크림은 포실포실한 바게트와 우아하게 어울렸다. 흑백의 대조, 묵직한 바게트가 씹히는 맛과 크림의 부드러운 식감의 대조, 그리고 그사이에 숨어 있는 건조된 토마토와 베이컨까지, 뒷맛은 짭조름했다.
“겉보기에는 크림 케이크처럼 생겼는데, 진짜 샌드위치는 샌드위치네요! 토마토에 올리브, 그리고 베이컨에 치즈 크림이잖아!”
“기가 막히게 맛있네.”
입맛을 다시며 ‘체커보드 케이크 위치’를 내려보던 백진영이 볼펜을 집어 들었다. 김가영이 판정용 종이를 빼앗아 내려놓았다.
“사장님! 울트라 B.L.T 케이크 위치도 먹어보고 난 다음에 평가해야죠.”
“아차, 너무 맛있어서 그만.”
“하하하!”
홀서빙에는 자신 있는 김가영이 웃으며 빵칼을 들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트리의 아래쪽 부분을 잘라, 접시에 얹어 내밀었다.
“싸장님 먼저 드세요.”
“호칭에 강세가 있는데?”
“저를 두고 먼저 혼자 날름 먹으려고 하신 싸장님.”
“아하하. 나도 아침부터 기대하고 있었거든.”
조각을 잘라내자 단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크림 안쪽, 트리의 바로 아래에는 두툼한 호밀식빵이 있었다. 가장자리를 잘라내 부드러운 부분만 남겨진 호밀식빵 아래에는 양상추, 그리고 두껍게 썰어낸 생토마토, 그 아래에는 토마토보다 더 두꺼운 베이컨이 듬뿍 들어 있다. 그 아래에는 완벽하게 익은 오믈렛, 아래에는 다시 녹색 채소와 호밀식빵이 자리했다. 크림이라는 겉옷을 입고 있을 뿐 내부는 일반적인 샌드위치와 동일한 모양이다.
“이건 완벽한 샌드위치네요. 소스가 빵 안이 아니라 바깥에 발라져 있을 뿐이지.”
가영은 곧 자신의 몫으로 샌드위치를 잘라냈다. 다른 사람들도 트리 모양을 즐길 수 있게 일부러 모양이 상하지 않게 하는 데 신경을 썼다.
“으음-.”
빵 안쪽에 포마드 버터가 발려 있어, 얇은 베이컨과 양상추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부드럽고 폭신한 흰 빵과 아삭아삭한 채소, 신선하고 수분이 풍부한 토마토는 아주 잘 어울렸다. 크게 썰어놓은 생양파가 씹히며 베이컨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빵 바깥에 있는 소스가 너무 많아서 샌드위치 맛이 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네.”
너무나 맛있어서 현실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김가영은 무심코 마음속 깊숙이 있던 진심을 말해버렸다.
“매일 이런 걸 먹을 수 있으니까 여기를 떠날 용기를 낼 수가 없네요.”
“뭐? 김가영 씨, 여기 그만둘 계획이 있는 겁니까.”
백진영이 놀라서 물었다.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느라 다람쥐처럼 양 뺨이 불룩해진 가영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예 떠날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냥 스승님이 저한테 아예 공방에 정식으로 들어오는 게 어떤지 물어보고 계셔서, 고민이 많아졌던 것뿐이에요.”
“가영 씨 스승님이라면……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되신 명인님 아니야? 백자하고 청자부터 시작해서 현대적인 도기를 만드시는 그분.”
“예, 원래 서울 공방에선 이틀만 나와서 가르치시고, 다른 날에는 계속 공방에서 구우시거든요. 현대식 전기 가마가 아니라 흙을 구워 만든 망댕이 가마를 쓰시기 때문에 서울 공방의 전기 가마는 아예 쓰지도 않으세요. 이번에 이천으로 아예 내려가신다고,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백진영이 감탄하며 김가영을 보았다.
“허어. 가져오는 그릇들이 초보가 만든 것 같지는 않다 싶었는데, 가영 씨가 그릇 만드는 데에 재능이 있구나.”
“스승님이 저한테 아예 도예 쪽에 전념하는 건 어떻냐고 물어보셨는데……저는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거든요.”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는 김가영을 바라보며 백진영이 언성을 높였다.
“우리야 당연히 가영 씨가 있어 주는 게 좋지. 그렇지만 도예에 그렇게 재능이 있으면 그 길을 가야지! 하물며 인간무형문화재의 기술을 정식으로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닌데. 나도 달커피에서 바리스타 기술을 배우려고 이승주 선생님께 몇 번이나 찾아가서 간신히 허락받았잖아.”
“귀한 기회라는 건 아는데……여기서 일하는 게 너무 좋단 말이에요.”
김가영이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저는 공시 준비하면서 제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너무 우울하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포기할 용기는 안 났고. 그러다가 여기 빵이 너무 맛있어서 그대로 취업해 버렸잖아요.”
백진영은 아무 말 없이 들어 주었다. 생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형 앞치마를 두르고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김가영은 단정하고 아름답다. 항상 미소로 손님들을 응대하여 반응도 좋고, 종종 그녀에게 연락처를 주는 손님들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깔끔하게 모든 것을 거절했다.
‘좋은 사람 있으면 만나보지그래? 의외로 인연일 수도 있잖아.’
백진영이 이야기하자 김가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 사람들, 제가 거지같은 꼴을 하고 있을 때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거든요? 그냥 겉모습만 보고 다가오는 거잖아요.’
그때하고 똑같은 얼굴로 김가영이 당차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 사장님은 처음 봤을 때 저 기억하시잖아요.”
“당연하지.”
그는 처음 봤을 때의 김가영을 기억했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밧줄을 발견해서 붙잡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감지 않은 머리는 눌러쓴 모자로 감추고, 지치고 퀭한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무거운 배낭을 멘 탓에 앞으로 숙여서 자세도 좋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백진영은 아홉 살 때의 자신을 보았다. 삼촌과 숙모와 함께 살면서, 사촌 누나와 형들의 눈치를 보며 주눅이 들어있던 어린 소년의 모습에 김가영이 겹쳐졌기에 기꺼이 채용했다. 가영은 일하면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