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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174화 (174/656)

제 174화

아예 소리를 빽 하고 질러 버린 진희를 보고서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 옷을 입고 있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어.”

진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상관이지.’

옷을 아껴 입는 것은 이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는 미덕으로 보지 않는가?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려던 찰나, 아버지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 자. 새벽부터 일어나서 상경해야 하는데 이만 자지 그래?”

“……알겠어요.”

“잘 자라.”

“예!”

◈          ◈          ◈

깊은 밤.

집안은 고요하여 모두 잠들어 있다. 고양이까지 새근새근 자는 한밤중, 임진혁은 창문을 열고 도약했다. 보법을 사용해 광주의 병원에 금방 도착한 그는 7층의 한 병실을 살폈다. 유키코가 말했던 1인실이다.

‘간병인인가? 가족?’

두 명이 병실 안에 있다. 한 명은 환자 침대 위에 누워있고 기가 대단히 약하며, 다른 한 명 또한 그리 건강이 좋지만은 않다.

바깥으로 나갔다.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들어온 방은 익숙하면서 동시에 생경했다.

‘설마, 여기는.’

진혁은 침착하게 병실을 둘러보았다.

‘……내가 입원해 있었던 병실인가?’

아직 가족들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절, 정확히는 진희가 아직 간호사로 일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에 직원할인 혜택을 받아 가장 비싼 1인실을 썼다. 그는 항상 누워 있었으며 말라버린 눈은 침침해 천장에 있는 얼룩조차 똑바로 보질 못했다. 누군가 몸을 이리저리 돌려주면 문 옆에 있는 회색 얼룩을 노려볼 수 있었고, 반대쪽에 있는 낡고 더러운 유리창을 엿보기도 했다. 서서 보니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자세히 보니 확실했다.

‘얼룩의 위치가 일치해.’

그가 회색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평범한 스테인리스 문손잡이였고, 유리창은 노란색으로 변색된 흰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천장의 얼룩은 모양이 조금 달랐다. 하지만 진혁은 이 방이 그 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결계를 쳤다. 이제 재민의 부모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내가 어디에 가려고 했지? 하고 망설이면서 다시 보호자 대기실이나 편의점 같은 곳을 헤맬 것이다. 그리 오래 걸릴 것은 아니니 빨리 끝내버릴 생각이었다. 진혁은 재민을 살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쇠퇴한 근육에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팔다리는 희고 가늘다. 유키코가 보여주었던 사진 속의 갈색 피부 건장한 남자는 간데없다. 퀭하고 허약한 자가 기저귀를 차고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다.

과거 어느 순간, 진혁도 이런 모습이던 때가 있었다. 진혁이 눈썹을 찡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섭리는 운명을 정하며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이 자는 왜, 하필 여기에 있는 거지.’

임진혁은 미래를 바꾸었다. 그래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를 당해 드러누워야 했을 임진혁 대신 이 남자가 그 사고 위치에 있다가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을까? 이 자가 진혁의 천형을 대신 짊어졌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우연인가?

‘이 자가 나 대신 여기에 있을 가능성이 있나…….’

이제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서 디저트 서바이벌 쇼는 흥하지 않았다. 뉴스거리도 되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누가 출연했는지도 모른다. 미혼모가 화제가 된 적도 없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유키코는 재민 씨를 찾기 위해서 거기에 나갔다고 했으니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해서 평범한 부부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혁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끊었다.

‘아니야, 시간 선이 이상해.’

재민이 사고가 난 것은 선호가 태어나기 1년 전이다. 임진혁이 사고가 나기 전보다 2, 3년은 앞이다. 하지만 그 잠깐의 생각이 진혁을 망설이게 했다. 본디 그는 잠든 남자를 회복시키는 기적을 발휘할 생각은 없었다. 진기 두 푼, 그 정도가 재민에게 허락한 선이었다. 운이 좋다면 눈을 떠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몸이 약하다면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을 정도로 그칠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고.’

마음을 바꾼 진혁이, 재민의 백회혈(百會穴)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          ◈          ◈

새벽, 오픈 준비 타임에 나온 진혁을 보고 백진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리처드 베이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이! 임진혁 쉐프. 오늘은 내가 얼마나 훌륭한 쉐프인지 보여주지』

자신만만하게 인사하는 리처드 베이커 앞에 백진영이 나서며 말했다.

“넌 오늘 오후 출근이잖아? 유키코 쉐프님이 늦는다 싶었는데……, 혹시 네가 너하고 근무를 바꿨어?”

매의 눈으로 쏘아보는 백진영에게 임진혁이 대답했다.

“아침에 잠깐 밑준비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들렀어.”

“유키코 쉐프님이 늦어. 정식 출근 시간보다 30분씩 일찍 나오던 사람이, 별일이야.”

“그럼 연락해 보지그래?”

진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지. 일찍 나오는 게 당연한 건 아니잖아. 지금 전화하면, 매일 일찍 오는 걸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잖아. 출근 시간 되어도 안 오면 전화해 보려고.”

따르르르르르릉! 가게 전화기가 우렁차게 울렸다. 뒤에 서 있던 김은동이 전화를 받았다. 은동이 눈을 깜빡이다가 백진영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유키코 쉐프님인데……사장님 바꿔 달래요.”

“무슨 일인데?”

은동이 전화기의 송화기를 손으로 가리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지금 우는 것 같은데요? 집안에 무슨 일이 있대요.”

백진영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옆에 서 있던 서창덕이 걱정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지. 애가 아프기라도 한가?”

“우리 조카 다니는 유치원에도 감기가 돌고 있던데.”

예은이와 김가영 역시 청소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백진영을 응시했다. 단 한 명, 이 중에서 진혁만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소식이 들려올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예민한 청력은 수화기 너머의 소리까지 빈틈없이 잡아냈다.

〔회사 앞에 거의 다 오긴 했는데……재민 씨가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고……흑, 혹시 오늘 근무를……흑, 흐윽〕

전화 저편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유키코가 횡설수설했다. 상황을 이해한 백진영의 얼굴에도 점차 미소가 번졌다.

“네! 네. 가게는 걱정하지 마세요. 당연히 가보셔야죠. 휴가로 처리할게요.”

“무슨 일인데?”

진혁이 부러 묻자 백진영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묻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혹시 오늘 유키코 쉐프님 대신 근무 가능하냐?”

“추가 수당.”

진혁이 손을 올리자 백진영이 맞받아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알았어!”

업무를 시작한 후에도 진영은 여러 차례 거듭해 사과했다.

“그 사람이 깨어났다고 하는데 보내줘야지 싶어서…… 그래도 네 사정을 물어보고 해야 했는데. 미안하다.”

“그런 사정이라면 한 번 정도는 괜찮지.”

“두 번은 안 된다는 이야기구나.”

“남편 되실 분이 깨어났대요?!”

“정말로 잘 됐다!”

“그렇게 걱정하시더니, 하늘이 도왔나 봐요.”

직원들이 한마디씩 하는데, 김가영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오늘 점심엔 유키코 쉐프님의 케이크 위치를 못 먹겠네요.”

“케이크 위치? 아, 그거 말이구나.”

유키코가 며칠 전부터 아이 것과 함께 직원들 용 점심 샌드위치를 만들어왔는데, 그 모양이 케이크를 닮아있어 꽤 예뻤다.

“진혁 쉐프는 어제 못 봤죠? 어제 점심은 월남쌈을 변형한 케이크 위치에 저녁엔 스팸이랑 달걀, 밥이랑 소스를 조합한 케이크 위치였는데 진짜 예뻤다고요. 맛도 괜찮았고.”

“가영 씨는 그래서 나 말고 유키코 쉐프가 왔으면 좋겠다는 거군요?”

“아~니요!”

가영이 씩 웃었다.

“혹시 진혁 쉐프님이 점심이랑 저녁을 만드실 여유가 있을까 해서요!! 재룟값 200% 지원해드리고 싶습니다!”

맛있는 걸 좋아하는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진혁을 보았다. 진혁이 웃었다.

“샌드위치 만드는 건 나도 꽤 하는데, 알잖아요? 내가 그린워터 샌드위치 개발하는 거.”

“그러니까요!!”

“진영이 형, 점심이랑 저녁 내가 만들어도 될까?”

“야, 그러면 영광이지.”

한쪽에서 소외되어 있던 리처드가 잠시 손을 놓고서 물었다.

『어이어이, 무슨 일인데?』

리처드에게 백진영이 사정을 설명해주자, 그가 기뻐했다.

『엄청난 기적이군! 잘 됐어. 꼭 영화 주인공 같군』

리처드 베이커는 말하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임진혁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 그는 꽤 빨라져 있었다. 구워진 슈 안에 크림을 짜 넣으며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헌신적인 병간호 끝에 연인을 되찾고 쇼 프로그램에서 우승까지 하면 완벽해지겠는데』

백진영이 고개를 저었다.

『우승자는 당연히 진혁이죠. 유키코 쉐프님이 만드시는 케이크는 확실히 괜찮지만, 진혁이 것이 더 맛있지 않나요?』

『자네도 알잖나? 임진혁 쉐프의 케이크는 맛이 문제가 아니야. 센스가 없지』

『……센스는 기르면 되는 겁니다』

『아니지. 날씬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갑자기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겠어! 라고 마음먹는다고 그게 가능할까? 임진혁 쉐프의 센스 없음은 그 사람이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형성한 가치관과 심미안, 영혼의 일부라고. 그걸 억지로 꾸며내서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갈고 있던 백진영이 웃었다.

『임진혁의 세상은 넓습니다』

『……음?』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 내가 처음으로 맛본 진혁이의 케이크입니다. 맛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아름답죠』

『그건……그렇지』

저물어가는 황혼이 강을 붉게 물들이는 것과도 같은, 주홍빛 색조에 노랗고 붉은빛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케이크.

『맞습니다. 진혁이는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그걸 재현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유키코 쉐프 대신 오늘 점심과 저녁을 만들어 준다고 하는군요. 요즘 유키코가 끼니때마다 미리 만들어 오던 샌드위치 케이크를 새롭게 만들어 보겠다는데요』

『어이, 그건 안될 말이지. 점심은 내가 만들 테니, 저녁을 만들라고 해. 승부하자고!』

두 사람이 빠른 영어로 대화하는 동안, 임진혁이 손을 들었다.

“둘이서 내 이름 이야기하면서 무슨 얘기해?”

“……점심은 자기가 만들 테니까 네가 저녁을 만들면 어떻겠냐는데? 누구 것이 더 맛있는지 투표해 보자고.”

“아예 점심, 저녁에 같이 만들자고 해. 일하다가 틈틈이 만들어서 누구 것인지 모르게 직원들한테 투표하자고 하지 뭐. 2회전인 셈이지.”

백진영이 그 이야기를 전달하자 리처드 베이커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일하는 양도 엄청난데, 특히 점심과 저녁을 준비할 때에는 더 그런데……거기에 아이디어를 짜내서 순식간에 새로운 걸 만들어내라고?’

그는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는 동양인이지만 콧대가 높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수려한 얼굴이다. 취향이 특이할 뿐 실력은 누구 못지않다. 리처드의 아버지 역시 손이 빠르다고 했다. 리처드는 아버지가 일하던 호텔에서 주방장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버지만큼 손이 빠르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버지는 작업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항상 개성 있는 작품을 대중의 구미에 걸맞게 창조해내는 예술가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리처드 그는- 대중만을 좇느라 자신만의 개성이 없다시피 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서 걷고 있는 길이지만 아직 아버지보다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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